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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장





오래전, 세헤라자데와 둔야자드라는 자매가 있었습니다. 어릴 때 고아가 된 자매는 서로만을 의지하며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신은 세상천지에 의지할 곳이라곤 서로뿐인 자매를 가엾게 여기어 두 사람에게 마법을 선물했습니다. 자매는 신에게 감사하며 뜻에 따라 인간들을 돕기 시작했습니다.

지상은 한참 악마와의 전쟁으로 어지러웠습니다. 인간들의 왕이자 아르마하덴의 왕인 대제 이브라힘을 도와 세계를 정리하며 악마들을 봉인해 나갔습니다. 본인들의 제 힘을 낼 수 없어, 그리고 두 자매에 의해 번번이 계획이 틀어진 악마들은 분에 차 인간들을 멸망시킬 각종 꾀를 내었습니다.

‘인간들을 고통스럽게 만들자! 자는 순간조차 괴로우면 결국 우리가 이기게 될 거야!’

그들은 인간들에 꿈에 ‘악몽’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온갖 안 좋은 감정으로 씨앗이 움터 나무가 되고, 거기서 열매가 열리면 자신들을 본래의 힘을 낼 수 있을 테니까요!

악마들의 생각을 알게 된 둔야자드는 이를 막고자 자신을 희생해서 ‘악몽의 씨앗’을 제 안에 봉인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힘을 모두 소진한 둔야자드는 영원히 잠들고 말았습니다.

뒤늦게 동생의 죽음에 분노한 세헤라자데는 동생의 죽음에 일조한 악마들을 지옥에 봉인했으며 인간계는 평화를 되찾았답니다. 허나, 동생을 잃은 고통과 그 동생의 복수를 위해 세헤라자데는 자신의 제자들을 데리고 머나먼 곳으로 떠나 버렸습니다.

그 후로 수백 년, 아무도 대마법사 세헤라자데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 누구도…….



*



대제국 아르마하덴의 제도인 사르한의 중심에는 눈부신 흰 대리석과 견고한 붉은 사암, 온갖 화려한 보석과 옥으로 지어진 황궁이 대륙이 갈라졌을 때부터 흐르던 이만 강을 끼고 있었다. 유독 하늘이 청명하던 여름날, 흰 대리석과 사암이 태양빛에 찬란하게 빛났으며 종려나무와 실백편나무가 심어진 후원에서 종달새가 쉴 새 없이 재잘거렸다.

그날, 재상이 은밀히 입궐시킨 의사가 황제를 알현했다. 황제가 악몽에 시달린 후로 보았던 의사 중 가장 젊고, 가장 용기가 가상한 자였다. 마침내 아르마하덴에서 신과 같은 존재이며, 신보다도 아름답다고 칭송받는 황제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고개를 들거라.”

황제 앞에서 침묵이라는 고유한 의무를 묵묵히 수행하던 중인 의사가 고개를 들었다. 순간 말문이 막혔는지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의사라는 이들은 죄다 수염이 길고 희끗희끗하게 세었더군. 그들조차 포기했는데 이토록 젊은 너를 믿어도 되는 것인가?”

의사는 감히 허락 없이 황제를 똑바로 응시하는 불경한 죄를 범하였으나 황제는 너그럽게 관용을 베풀어 그를 용서해 주었다. 그는 황제의 병을 낫게 할 마지막 의사였다.

“내게 평안한 밤을 줄 수 있는가?”

“그조차도 하지 못한다면 어찌 사람의 병을 낫게 하는 의사라 자부하겠습니까?”

맹랑하게 반문하는 의사에게 금빛 눈동자를 가늘게 뜨며 황제가 하문했다.

“전번의 의사는 손목이 잘려 나갔으니, 마지막 의사는 죽어서 나갈지도 모르지. 장례식을 할 때에 필요할지도 모르니 네 이름을 밝히거라.”

그러자 의사가 눈에 띄게 머뭇거렸고, 황제가 오만하게 명했다.

“짐은 네 이름을 물었다.”

그 장소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예상처럼 의사는 겁에 질리거나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황제의 아름다운 미모에 홀려 감상하다 반응이 늦었을 뿐이었다. 의사는 꿈꾸는 것처럼 몽롱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국 아르마하덴을 건국하신 대제 이브라힘의 가장 정통성 있는 후손이며 가장 고귀하고 명정하신 분, 미천한 소인의 이름은 칼리드라고 하옵니다.”

명료하게 소개를 끝낸 의사가 제 주제를 안다는 듯 고개를 떨구는 모습에 황제는 호기심이 생겼다. 몇 달 동안 황제가 만난 의사 중 가장 기묘하고 이상한 자였다. 황제는 친히 황좌에서 일어나 의사에게 다가갔다.

마침내 의사는 황제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황제는 마치 흰 대리석으로 된 조각상처럼 날카로우면서도 아름답고 동시에 우아했다. 흠이라는 것은 황제의 이목구비 온 곳을 세밀하게 뜯어보아도 존재하지 않았으며, 만에 하나라도 감히 황제의 얼굴에 흠을 입히는 자가 있다면 사지를 다 찢어발겨 죽여야만 했다.

황제의 반듯한 이마와 높고 곧은 코, 짙고 수려한 눈썹은 의사를 비롯한 궁인들의 시선을 한눈에 사로잡았고 색이 어두운 긴 속눈썹 아래의 사막의 모래알처럼 찬란하게 반짝이는 금색 눈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보석이었다. 대제 이브라힘이 건축한 황궁보다 더 찬란하고 영광된 것은 바로 그의 후손, 황제 이브라힘이었다. 검푸르고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보석 장식이 달린 흰 천으로 된 터번으로 감싼 황제에게 의사는 속으로 감탄하고 찬사를 퍼부으며 숭배하듯 열렬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이내 의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선을 지그시 내리깔았다. 황제의 미모에 현혹된다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없었다. 의사, 칼리드는 오래도록 갈망해 온 것을 얻기 위해 의사로 가장하여 목숨을 걸고 황제의 앞에 선 것이었다.

“약조드리겠습니다. 소인이 황제 폐하의 마지막 의사가 될 것입니다.”

아름다운 황제의 안에 재앙을 불러일으키는 악몽의 씨앗이 움터 있었다. 칼리드는 점쟁이 칼뤼프소가 그에게 한 예언을 떠올렸다.



*



“칼뤼프소, 점괘가 나왔으면 뜸 들이지 말고 어서 이야기 해 주세요. 제가 한시가 바쁜 몸이란 걸 알면서 왜 그러는 겁니까?”

벽을 칠한 물감이 다 벗겨진 낡고 초라한 집 안에서 젊은 남자가 몽환적인 보랏빛의 베일을 둘러쓴 점쟁이를 향해 초조한 어투로 윽박질렀다. 칼뤼프소라 불린 점쟁이는 벌써 몇 시간째 질리지도 않는지 입을 꼭 다물고 침묵 중이었다.

“전갈을 받자마자 배를 타고 달려왔습니다. 칼뤼프소, 당신이 협조해 주지 않는다면 곤란합니다.”

평소 같으면 남자가 문을 두드리자마자 점괘를 줄줄 읊어 주던 칼뤼프소였다. 하지만 오늘따라 무슨 고집을 부리는지 침묵으로 농성 중이었다. 여전히 입을 꼭 다문 칼뤼프소를 보고 남자는 미간을 찡그렸다.

솜씨 좋은 장인이 짠 붉은 양탄자 아래에서 바스락거리던 토끼가 잠이 들고, 주전자 안에 넣어 둔 염소젖이 부글부글 끓어올라 미약한 탄내가 나기 시작했음에도 칼뤼프소는 불쏘시개나 만지작거렸다. 남자는 초조함을 견디지 못하고 무의식적으로 아랫입술을 짓씹었다. 이대로 칼뤼프소가 점괘를 말해 주지 않는다면 곤란해질 터다. 남자가 연신 초조해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내비치자 굳게 침묵하던 칼뤼프소가 뜬금없이 입을 열었다.

“너를 본 지도 꽤 오래됐네. 아르마하덴은 얼마나 떠나 있었지?”

온종일 기다렸건만 첫마디가 이런 사소한 질문이라니. 남자는 속으로 한숨을 길게 내쉬며 대꾸했다.

“글쎄요, 칼뤼프소. 저는 그런 걸 일일이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라서요. 당신도 잘 알듯이 말입니다.”

“네가 핏덩어리에 불과하던 시절이 있었는데.”

칼뤼프소가 불쏘시개로 화로를 들쑤시는 걸 바라보며 남자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뭐, 그건 옛날이야기죠.”

어깨를 으쓱 올려 보인 남자에게 칼뤼프소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어설프게 자라 버렸어. 성장하려면 제대로 했어야지. 세상에 중립이란 건 없는데 애매하게 됐잖아.”

남자는 빨리 점괘를 받아 이 집을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칼뤼프소의 비위를 맞춰야 점괘를 받을 수 있었다. 남자가 할 수 있는 거라곤 고분고분 그녀의 헛소리를 받아 주며 점괘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가 뜬 칼뤼프소는 앞에 놓인 탐스러운 무화과 하나를 집어 들었다.

“요즘은 제국 아르마하덴을 다스리는 황제를 신이라 일컫는다지.”

영문 모를 말이었다. 칼뤼프소는 무화과를 높이 들더니 기분 나쁘게 킬킬대며 웃었다.

“그가 관장하는 것만 해도 전쟁, 승리, 부와 권력,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칼리드, 너는 알아?”

“제가 알겠습니까? 칼뤼프소, 제가 그걸 알고 있으면 점괘를 봐 달라고 당신을 찾아오지도 않았을걸요.”

칼뤼프소가 중얼거리는 말든 남자는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칼뤼프소가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일개 인간 따위가 신이라 지칭하다니! 참 우습기도 해라. 신이 이 말을 들었다면 대홍수를 불러일으켰을 거야. 하지만 이미 해 봤으니 손짓 한 번으로 모조리 불태우려 하겠지. 제국이 활활 불타오르면 지옥과 지상의 경계가 사라지고 악마들이 그토록 원하는 날이 강림할 거야. ……그들이 지상을 지배하는 날, 지상의 영혼들을 모조리 먹어 치울 수 있는 포식의 날.”

칼뤼프소의 해괴한 말을 남자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딱히 화제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딱히 인간의 편도, 악마의 편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조용하던 칼뤼프소가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더니 남자에게 나지막이 속삭였다.

“전능한 신이라던 황제가 병에 걸렸어.”

짐짓 부담스러워 남자는 뒤로 물러났다. 칼뤼프소는 손 안에 쥐고 있던 잘 익은 무화과를 반으로 쩍 갈라 입이 귀 끝에 걸릴 정도로 베어 물더니 곧 하나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남자는 미간을 좁히며 칼뤼프소에게 아마로 된 고운 손수건을 건넸다. 그녀는 고맙다는 인사 하나 없이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아 내고는 또 까르르 웃었다.

“신을 사칭했으니 그런 저주에 걸릴 만도 하지. 이 무화과 하나로도 죽을 수 있는 한낱 인간이 신이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