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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문을 하나 지나니 줄지어 놓인 이동식 침대에 누워 있는 다른 사람도 보였다. 어딘가에 멈추자 곧 주위를 가리듯 커튼을 쳐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서겸은 눈을 깜빡였다. 보고 듣는 것은 문제가 없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았다.

“이서겸 씨. 이거 몇 개예요?”

그것도 문제라고 내느냐며 비웃고 싶었지만, 멀쩡히 눈으로 보고 있는데도 손가락 개수를 헤아리는 것이 어려웠다. 초점이 안 맞는 카메라처럼 모든 것이 뿌옇게 흐려졌다가 다시 상이 맺혔다.

“……세 개?”

확신할 수 없어 겨우 말하자 의사가 서겸을 심각한 표정으로 봤다.

세 개 맞는 거 같은데.

태평한 생각을 하며 그는 눈을 다시 깜박였다. 천장이 멀어졌다가 아래로 쑥 꺼지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리고 또 깜깜해졌다.

“환자분? 손가락 개수 다시 말해 보시겠어요?”

아파요. 지금은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

드물게 짜증이 나서 서겸은 인상을 구겼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달려들어 무언가를 열심히 하는 건 알겠는데 계속해서 의식이 허공으로 떴다.

눈만 깜박이는데 계속해서 천장의 풍경이 바뀌었다. 하얀색의 형광등 불빛이 캄캄한 곳의 백열등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디로 가요?

바닥이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계속 흔들렸다. 토해 내고 싶은데 그것도 할 수 없었다.

서겸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뜨자 하루가 지나 있었다.



*



응급실은 분주했다.

의사에게 설명을 들으려면 한참을 기다리고도 더 있어야 했다. 그건 응급 환자가 아니니 괜찮다는 소리지만 기다림과 짜증은 붙어 다녔다.

바짝 날 선 쨍한 목소리에 서겸은 힘겹게 눈을 떴다. 여전히 속은 울렁거리고 머리는 무거웠다. 맨정신에 숙취를 앓는 것 같았다. 그는 고개를 움직였다. 바로 옆자리에서 누군가의 고함이 들려오고 있었다.

서겸은 몸을 비틀었다.

괴로움에 몸서리치는 것을 본 간호사가 재빨리 그가 누운 침대 발치에 섰다.

“환자분 깨어나셨어요?”

서겸은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말라 말하기 어려웠다. 그걸 알아챈 듯 간호사가 재빨리 도움을 줬다. 어디서 가져온 건지 모를 물에 적신 거즈를 물고 있으니 갈증이 조금이나마 가셨다.

옆자리의 소동은 그의 자리가 분주해지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되었다. 완전히 깨어났는지 의식 상태를 확인한 담당 의사가 무언가를 바쁘게 적었다.

서겸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몸 상태는 여전히 나빴다. 기억에 없었지만, 꽤 오래 잔 것만은 확실한데도 말이다.

“8번 베드 환자 혈액 검사 나온 거 어디에 있어요?”

“여기요, 선생님.”

누운 몸 위로 차트가 오갔다.

간호사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든 의사가 빠르게 그 위에 적힌 것을 확인했다. 서겸과 종이를 번갈아 보기를 몇 번 마침내 의사는 이야기할 준비가 된 듯 입을 열었다.

“이서겸 환자.”

이름 뒤에 신분처럼 환자라는 단어가 붙었다.

서겸은 눈꺼풀을 깜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의사가 아무래도 좋다는 듯 피곤한 표정으로 다시 질문을 던졌다.

“초등학교 때 페로몬 검사한 적 있죠?”

“……네.”

뜬금없었다.

서겸은 그 페로몬이란 말도 오랜만에 들었다. 학교에 입학하고 처음 건강 검진을 한 이후로 말이다.

“기록상으로는 베타로 나와 있는데 맞나요?”

“네.”

의사가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렀다. 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건지 서겸은 알 수 없었다.

“그 뒤에 혹시 따로 페로몬 검사를 받은 적이 있습니까?”

“아니요.”

보통 초등학교 저학년 때 하는 검사가 처음이자 마지막 검사였다. 그때쯤 되면 자신이 알파, 오메가, 베타 중 어느 타입인지 알 수 있으니까 말이다. 혈액형과 똑같이 바뀌는 일이 드물어 두 번이나 검사하는 일도 없었다.

의사가 정말 이상하다는 듯 서겸을 봤다.

“환자분…… 지금 혈액 검사 결과를 보면, 페로몬 수치상으로는 베타가 아니라 오메가인 걸로 나오거든요. 모르셨습니까?”

“……네.”

서겸은 멍하니 대답했다.



“아무래도 몇 가지 검사를 더 받아 보는 게 좋겠어요.”



한참 이어진 설명 끝에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사람의 페로몬 체계가 베타에서 오메가로 이렇게 갑자기 뒤바뀌는 일은 드문 편이라서요. 게다가 환자분은 염증 수치가 지나치게 높습니다.”



비틀거리는 몸으로 서겸은 병원 곳곳을 다니며 검사를 마쳤다. 체력이 바닥을 쳤는지 이제는 걷는 것도 힘들었다. 진통제인지 항생제인지 모를 주사를 맞았는데도 여전히 그랬다.

서겸은 벽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딱딱하고 차가운 게 좋았다.

그는 한참을 그렇게 기대어 있었다. 사람들의 발걸음이 적은 곳이라 그런지 복도만 나가도 시끌벅적한데 여기는 조용했다.

“의사가 또 뭐라고 했더라.”

머리를 식히고 나서야 겨우 생각이란 걸 시작했다. 처음 듣는 영어 단어가 너무 많았다. 외국어로 된 단어와 단어 사이에 끼어든 은, 는, 와 정도가 그가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의 전부였다.

그래서 간호사가 일러 주는 대로 움직였다.

“머리만 두 번 찍었네.”

페로몬에 이상이 생기면 우선 찍는 곳이라 했지만 서겸은 요즘 계속해서 두통에 시달린 게 마음에 걸렸다. 피도 한 번 더 뽑았다. 결과는 아직 몰랐다.

병원에서 하루를 기절해 보냈고 검사를 하느라 반나절을 더 있었지만, 당장 확실한 거라곤 어마어마한 돈이 병원비로 깨질 거라는 사실밖에 없다는 게 웃겼다.

한 달 동안 뼈 빠지게 공사판에서 자재를 나르며 벌어들인 돈이 한 번에 털렸다.

서겸은 수중에 남아 있는 돈을 계산했다. 이리저리 나갈 빚을 정리하고 나면 딱 생활비 정도는 떨어질 거라 여겼는데 병원비를 더 빼면 이번 달은 턱없이 부족했다. 역할 대행 아르바이트가 들어올 경우를 대비한 비상금마저 빼 버리면 그냥 굶어야 했다. 숨이 턱 막혔다.

당장 느끼는 통증만 아니었다면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똑같다며 검사도 받지 않았을 텐데.

“이게 뭐라고.”

그는 이를 꽉 깨물고 어지럼증을 견뎠다. 또다시 눈앞이 팽그르르 돌았다.



*



「앨리가 죽었습니다.」

―방금 들었단다.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단조로운 목소리에 로넌은 이를 꽉 깨물었다.

「어머니!」

그는 터져 나오려는 울분을 누른 채 다시 입을 열었다.

「앨리가 사고를 당했어요. 아이와 함께…….」

―그랬니? 그나저나 로넌? 자선 파티에 참석해야 해서 이만 통화를 끊어야 할 것 같구나. 내게 더 할 이야기가 있니?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으시면서 그런 건 왜 물으시는지 모르겠군요.」

처음에 높았던 목소리가 불편한 심기를 보여 주듯 끝으로 갈수록 점점 가라앉았다.

―로넌 던.

「바쁘시다니 간략하게 말하죠. 앨리의 일이 정리될 때까지 한국에 머물 겁니다.」

로넌은 통보하듯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끊자마자 다시 울려오는 전화에 번호를 확인한 그는 휴대폰의 전원을 끈 후 고개를 돌렸다. 한국의 법률 자문 변호사를 만나러 가겠다며 아침 일찍 자릴 비웠던 대니얼이 어느새 돌아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로넌은 숨을 골라 냈다.

「괜찮아?」

대니얼의 물음에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괜찮지 않을 게 뭐가 있겠어?」

로넌은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앨리가 태어나지도 못한 조카와 함께 죽었다는 거? 녀석의 연락처엔 사고 소식을 전할 남편 전화번호도 없고 그 남편이 범인일지도 모른단 거? 그것도 아니면 딸의 죽음보다 당신이 참석해야 할 자선 파티가 더 중요한 어머니가 있다는 건가.」

「로넌.」

대니얼은 무거운 한숨을 뱉었다.

로넌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스름이 걷힌 서울이 보였다. 떠오른 태양 아래 분주히 움직이는 수많은 사람이 어딘가로 가고 있었다.

「앨리가…… 날 보고 싶어 했어.」

「알아.」

대니얼은 가까이 다가와 로넌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게 마지막 통화라곤 생각조차 못 했어.」

「그건 누구도 몰라.」

죽음은 늘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었다. 사고도 마찬가지였다.

「……앨리의 남편과는? ……연락됐어?」

로넌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니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통화 목록에 기록된 전화번호를 다 뒤졌는데 진전이 없어. 앨리가 네게 알려 준 남편의 이름과는 전부 달라. 아침이 되자마자 전화를 해 봤더니 통화음은 가는데 받지 않는 번호도 몇 개 있고.」

로넌은 손바닥으로 얼굴을 문질렀다.

「변호사는?」

「한 시간 후에 올 거야.」

그는 대니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



「사망 신고를 하게 되면 자동으로 유산 상속 절차가 진행됩니다. 한국 민법상 별거 중이었다 해도 이혼 상태가 아니면 법적으로 남편이신 분이 배우자 자격으로 1순위 상속인이고요. 지윤하 씨의 사망 신고도 남편분이 직접 할 수 있습니다.」

변호사의 설명에 로넌은 지난밤 회계사에게서 받은 앨리의 재산 목록을 뒤적였다.

1페니 높이만큼 쌓여 있는 종이 위에 어마어마한 재산들이 낱낱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에게는 별 의미 없는 돈이었지만 연락도 되지 않는 앨리의 남편에겐 줄 수 없는 돈이었다.

「사망 신고는 사망 사실을 알게 된 날로부터 1개월 안에 하셔야 하는데 저희 쪽에서는 미루는 게 낫습니다. 과태료가 있긴 하지만 차라리 그걸 내는 편이 낫죠.」

「남편의 상속 자격을 박탈하는 건 어렵습니까?」

대니얼의 질문에 변호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