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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토요일이라 그런지 차가 제법 밀렸다. 서두른다고 했지만 아무래도 약속 시간에 맞추기는 힘들 것 같았다.

돌잔치 장소는 회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으나, 집에서는 한 시간은 넉넉히 잡아야 했다. 승재에 이어 승현까지 결혼에 이르자 아버지의 잔소리는 극에 달해 도저히 한집에서 살 수 없겠다 판단해 작년부터 독립을 해서 살았다. 왜 그동안 혼자 살지 않았을까 후회될 정도로 승목은 자신의 싱글 라이프에 만족을 느끼고 있었다.

“어? 여긴가?”

목적지 근처에 도착했다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들으며 승목은 주변을 살폈다.

“촌스럽게 돌잔치는.”

결혼 자체를 생각하고 있지 않은 승목은 아이가 한 살 먹었다고 이렇게 시끌벅적한 잔치를 벌이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태어나면 당연히 나이를 먹어 가는 건데 그게 뭐가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하지만 생각은 생각이고 돈 봉투를 두둑이 준비한 승목은 재빨리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돌잔치가 열리는 곳으로 올라갔다.

입구로 들어서자 아이를 안고 있던 진수가 반갑게 승목을 맞았다.

“어! 왔냐? 차 많이 밀렸지?”

“중간에 몇 번이나 차 돌리고 싶었는데 참았다.”

“고맙네, 참아 줘서.”

진수가 싱겁게 웃으며 승목의 어깨를 툭 쳤다.

“제수씨, 오랜 만이에요.”

승목은 진수 옆에 나란히 선 진수의 아내를 보며 씽긋 눈인사를 했다. 사실 진수 아내인 주해는 승목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의 문란한 사생활은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도 알 수 있었고, 남편이 그런 사람이랑 어울리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부러 찾아와 준 손님에게 싫은 내색을 할 수는 없었다.

“네. 오셨어요? 감사해요. 주말이라 더 바쁘실 텐데.”

뼈가 있는 말이었지만 승목은 못 알아듣는 척 일부러 하하 웃었다.

“아무리 바빠도 와야죠. 미영이 첫 생일인데.”

“가영이에요.”

“그러게요. 우리 가영이. 하하하하! 아이고, 우리 가영이 아빠 많이 닮았네. 진수야 너 돈 많이 벌어야겠다.”

돌잔치의 주인공인 가영은 아빠를 닮아 눈도 코도 작았다. 하지만 웃을 때마다 보조개가 쏙쏙 들어가는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승목이 숙덕이자 진수가 정색을 하며 눈썹을 치켜세웠다.

“우리 가영이가 얼마나 예쁜데 그런 말을!! 나는 우리 가영이보다 예쁜 애를 본 적이 없어!”

고슴도치도 지 새끼는 예쁘다고 했던가. 승목은 쿡쿡 웃으며 두둑한 돈 봉투를 내밀었다.

“축하한다. 잘 키워! 다른 애들은 안 왔어?”

진수는 승목이 내미는 봉투를 보며 입이 귀에 걸리도록 미소를 지었다. 역시 스케일부터 달랐다. 다른 사람이 내민 봉투의 족히 다섯 배는 될 것 같은 봉투의 두께에 마음이 흐뭇해진 진수가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 왔어. 강우랑 미소도 온다고 했는데. 어? 저기 온다!”

강우는 진수 때문에 알게 된 친구였다. 안 지 몇 년 되지는 않았지만 진중하고 우직한 친구라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서 금세 친해졌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사흘이 멀다 하고 같이 술을 마셨는데 결혼하고, 아내가 임신까지 하자 강우는 완전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여튼, 강우 저 녀석 남자 망신은 혼자 다 시키고 다닌다니까. 쯧. 어이! 문 팔불출! 오랜만이야! 미소도 안녕? 아이고, 배가 터지겠다.”

승목은 몸집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배로 힘들게 걸어오는 미소를 향해 팔을 벌리고 다가가 살짝 안아 준 후 강우의 어깨를 가볍게 툭 쳤다. 강우의 아내가 승목의 대학 후배라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었다.

“얼굴 좋네!”

“너만 하겠냐? 너, 자꾸 새벽에 전화하지 마라. 미소가 잠 깨잖아!”

한 번씩 새벽에 잠을 깨면 괜스레 외로워져 승목은 강우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그럴 때마다 강우는 미소 깬다며 매몰차게 끊어 버렸지만 그런 따뜻한 기운을 받는 것이 좋아 매번 거절을 당하면서도 꾸역꾸역 전화를 걸었다.

“마누라 없는 사람은 서러워서 살겠나! 요즘 같은 경쟁 사회에 아침 일찍 일어나서 운동도 좀 하고, 책도 읽고 해야지!”

승목은 강우를 볼 때마다 놀렸지만 강우의 편안한 얼굴을 볼 때면 기분이 좋았다. 강우의 행복이 제게도 조금은 달라붙는 것 같은 작은 위로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들과 함께 있으면 그 순간만큼은 저도 그럭저럭 상대할 만한 인간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어서 들어가자, 곧 시작하겠다. 어찌나 가영이가 예쁘다고 자랑질인지……. 여기를 가도 자랑, 저기를 가도 자랑! 내가 아주 자랑에 깔려 죽게 생겼어.”

승목은 강우와 미소의 어깨를 동시에 감싸며 식장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를 잡고 앉은 승목은 자신의 인생을 야무지게 살아 내는 이들을 보며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아직은 그들이 사는 세상으로 뛰어들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의 이 자유로움을 두고…….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진수와 주해 사이에 그들을 반반씩 닮은 가영이가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오늘은 자신이 주인공인 줄 아는 듯 한번 칭얼거리지도 않고 순하게 엄마 아빠에게 안겨 있었다.

“자∼ 돌잔치의 하이라이트! 돌잡이 시간입니다.”

기대감에 충만해진 눈빛으로 진수와 주해가 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그들 앞에 놓인 실, 돈, 청진기, 마이크, 그리고 수갑……. 수갑? 승목은 돌잡이 상에 놓인 물건들을 찬찬히 살피다 수갑에 시선을 멈추고는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야, 요즘은 돌잔치 상에 수갑도 올라가냐?”

승목의 질문에 강우가 앞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답했다.

“사촌이 여형사래. 엄청 멋있어서 가영이도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고 진수가 특별히 갖다 놓은 거야. 저 수갑도 사촌이 직접 쓰는 거고.”

승목은 얼마 전 마주친 민주로 인해 ‘형사’와 ‘멋진’이 결코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모든 여형사가 그렇게 무지막지한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불안한 마음이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트라우마가 생긴 게 틀림없어. 이씨.’

승목은 뭔가에 쫓기는 사람처럼 불안하게 하객들을 훑다 짧은 머리를 한 여자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다시 느껴 보고 싶지 않았던 소름 돋는 서늘함에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돌잡이가 시작이 되자 사회자의 번지르르한 멘트가 흘러나왔다. 적어도 수백 번은 말해 본 것이 틀림없었다.

― 자, 우리 아기 아빠는 가영이가 뭘 잡으면 좋겠어요?

땡땡이 무늬가 들어간 나비넥타이를 맨 사회자가 진수 앞으로 마이크를 불쑥 내밀며 물었다.

― 하하하 뭐든 우리 가영이가 원하는 것이면 저는 상관이 없어요.

― 아하! 딸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자상한 아빠입니다. 그럼, 엄마는요?

주해는 눈앞의 물건들을 쓰윽 살펴본 후 결심한 듯 말했다.

― 돈이죠. 돈을 집어야죠.

주해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사람들의 입에서 와하하 하는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 아아, 아주 솔직한 엄마십니다. 자, 그럼 우리 꼬마 천사가 무엇을 집는지 살펴볼까요?

짠짜라 짠짜자잔!

녹음된 음악이 흥겹게 흘러나오자 가영을 안은 진수가 돌잡이 상에 가까이 다가갔다.

앞에서 이어지는 돌잡이 이벤트에도 승목의 시선은 그 무서운 여자의 뒷모습에 고정된 채 떨어질 줄 몰랐다. 저 여자가 그 무식하게 힘만 센 여자가 맞는지 확인하기 전까지는 목구멍으로 어떤 음식도 넘길 수 없을 것 같았다. 드디어 부모의 기대감을 가득 안은 채 가영이 서서히 테이블 위의 물건들로 손을 뻗기 시작했다.

“가영아 돈 잡아! 돈!”

“그, 그거 말고! 가영아!”

부모의 간절한 바람을 뒤로하고 가영이가 손으로 덮쳐 버린 것은 상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케이크였다. 양손 가득 생크림을 묻히고 해맑게 웃는 가영이 때문에 온 장내가 웃음바다가 되고 말았다.

― 아……. 아기가 파티셰가 될 건가 봅니다! 하하하!

처음에는 어이없어하던 진수와 주해도 가영이가 손에 묻은 생크림을 입으로 가져가 먹자 앉아 있는 하객들처럼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주변의 모든 사람은 마치 이 행복하고 따스한 퍼즐 조각의 일부인 듯 자연스럽게 녹아 있었다. 그 와중에 승목은 자신만 물에 뜬 기름처럼 둥둥 떠 있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한바탕 웃음으로 돌잡이가 끝나자 진수와 주해는 가영이를 안고 돌잔치를 찾아와 준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녔다.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해요. 식사 맛있게 하고 가세요.”

승목은 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다시 그 무서운 뒤통수에 시선이 갔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아무래도 숏커트를 한 여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긴 게 확실했다.

‘이건 진짜 정신적인 충격에 대한 손해배상 소송이라도 해야 하는데.’

진수와 주해가 그 뒤통수의 주인에게 다가가서 웃으며 인사하자 그 여자가 일어서서 두 팔로 가영이를 안았다. 드디어 여자의 얼굴이 보였다.

“어…… 어? 어!”

승목이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입에 물고 있던 잡채가 다시 접시로 쏟아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