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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잠시 주춤하는 문형을 두고 태진이 남은 차를 모두 마셨다.

“사장님, 저는 방금 서 의원님께 연락받고 20분 내로 나가 봐야 합니다.”

난감한 얼굴로 규원이 말했다. 잠시 손가락으로 소파 손잡이를 툭툭 두드리던 태진이 고개를 왼쪽으로 기울였다.

“오후에 별다른 스케줄은 없으십니다.”

“그럼 내가 데리고 가지.”

“차 대기시키겠습니다.”

규원이 덩치에 맞지 않게 날쌘 몸놀림으로 사장실을 나섰다.

차라리 규원과 함께 가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외관상으로는 태진이 훨씬 곱상하게 생겼고 늘씬했지만 위압감이 더 크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건 채무자와 채권자의 관계에 놓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주소만 알려 주시면 제가 찾아가겠습니다.”

“됐어. 이렇게 일이 없을 땐 나도 빨리 들어가서 쉬고 싶으니까. 짐은?”

짐을 하나도 챙기지 못했다. 모든 것을 팔아 버리는 것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챙긴 것이라곤 속옷 몇 개뿐이었다. 그나마 옷들도 모두 명품이라 처분이 가능했다.

태진의 시선이 그녀의 옆에 있는 손가방으로 향했다. 알 만하다는 눈빛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안 비서가 안으로 들어왔다.

“차 준비됐습니다.”

“안 비서. 우리 집으로 강 매니저 좀 보내.”

“슈트 준비할까요?”

“아니. 20대 아가씨들 입는 옷이나 속옷 같은 것들. 옷 구분 없이 다양하게 보내라고 해.”

설마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아무 옷이나 입는 것을 볼 수 없다는 뜻인 것일까?

안 비서의 시선이 느껴졌다. 도회적이지만 날카롭게 생긴 안 비서는 마치 그녀를 값을 매기듯 위아래로 쭉 훑어 내렸다.

“알겠습니다.”

“뭐 해, 일어서.”

모든 것이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었다. 문형은 지금 자리에서 일어서며 태진의 뒤를 따라가면서도 이것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문을 지나치기 전 안 비서에게 팔을 잡혔다.

“정신 똑바로 차려요.”

안 비서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등 뒤로 소름이 쭉 끼쳤다.



* * *



문형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생각들이 참 많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레 이런 직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각 잡힌 커다란 검은색 세단을 타고 다닐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태진의 차는 물론 고가이기는 했지만 스포티한 느낌이 나는 SUV 차량이었다.

“운전은?”

“하고 다녔습니다.”

“차도 팔았어?”

“네. 팔 수 있는 건 최대한이요.”

“아닌 것 같은데.”

“네?”

“일단, 타.”

대체 뭐가 아니라는 걸까. 문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멈칫했다. 앞으로 타야 할지, 뒤로 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미안한데 난 기사가 아니라서.”

“네, 죄송합니다.”

바로 조수석 문을 연 문형이 자리에 앉았다. 태진까지 차에 타 문이 닫히자 묵직한 공기가 순식간에 폐를 짓눌러 오는 것만 같았다. 이것이 바로 이태진의 향인 모양이었다. 나쁘다곤 할 수 없었다. 오히려 좋은 향이었다.

하지만 그 특유의 묵직한 느낌이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역시 좋지 않은 상황으로 엮여서일까?

어쨌거나 부모님이 실종되고 빚더미에 앉게 되면서부터 그녀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사실 지금도 어떻게 이 자리에 있는지 알 수가 없을 정도였다.

“한 번씩 정 여사 모시고 병원 가야 할 일이 있을 거야.”

“네.”

“보통은 김 기사님이 운전해 주실 거야. 급할 때는 차고에 있는 정 여사 차, 그거 타고 다니면 돼. 더 자세한 건 차 부장이 설명해 줄 거야.”

“부장님도 같이 사시나요?”

“아니.”

“그럼 설명을 어떻게…….”

“우리 집에 들른 뒤에 퇴근하니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의아했다. 그녀에겐 법정 근로 시간을 지켜 준다고 했다. 그런데 규원은 예외인 모양이었다.

정말 그 계약서대로 믿어도 되는 것일까?

사실 10년 내내 일을 한다고 해도 그녀는 납작 엎드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이보다 더 좋은 상황은 없었다.

“상속 포기는 생각 안 해 봤어?”

“네.”

“동생 때문에?”

“네. 형제 없으세요?”

태진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신호에 걸리자 차를 세웠다. 보통 주위를 보면 남매, 자매, 형제간은 대체적으로 사이가 좋은 편이었다. 개중에 정말 철천지원수 같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문형과 문호는 연년생으로 어렸을 때부터 쌍둥이처럼 사이가 좋았다. 문형이 1월 생으로 학교를 빨리 들어가 학년은 두 학년 차이가 났다.

그럼에도 사춘기를 지나 성장을 완전히 겪고 나자 사람들은 당연히 두 사람이 쌍둥이인 줄로 알 정도였다.

부모님의 말을 빌려 보자면 문형은 어려서부터 늘 의젓했다고 했다. 그건 아마도 본능적으로 동생이 아팠기 때문에 자연스레 그런 분위기를 가지게 된 것인지도 몰랐다.

“형제가 다 사이가 좋은 건 아니지.”

“그런가요?”

“우리 아버지와 삼촌이 재산 때문에 깨나 전쟁을 치렀거든.”

이상하다. 여기까지 오기 전 즉, 태진을 만나기 전까지 이런 대화를 가볍게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해 보지 못했다.

아니, 어쩌면 태진은 자신의 할머니를 맡기는 입장이라 최대한 그녀에게 부드럽게 대해 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 그의 할머니가 어떤 상태이든 그녀는 도망을 칠 구석도 없었다.

알고 있다. 지금 태진은 그녀에 대한 조사를 모두 마쳤을 것이다.

그녀가 문호의 수술비와 생활비를 몰래 남겨 두었다는 것을 말하기 전에 알고 있었을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냥 그것들을 쉽게 넘어가 주었다. 도무지 채권자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의 반응이었다.

“아버지가 다 물려받으셨나 봐요.”

“왜 그렇게 생각해?”

“지금 사장님이시잖아요.”

“정 여사의 승리였지.”

정 여사의 승리?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아 문형이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갸웃거렸다.

“뻔하지 않아? 서로 더 가지려고 개싸움이 난 거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문형은 그저 태진을 보기만 했다. 가볍게 핸들을 쥐고 있는 태진의 손은 얼굴과는 다르게 거칠어 보였다.

“할아버지가 남겨 주신 유산으로 삼촌은 외국으로 떴어.”

“아버지는요?”

“죽었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누군가가 죽는다는 건 그녀가 크게 겪어 보지 못한 일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태진은 다른 사람도 아닌 아버지를 말하면서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부자간의 정이 있는 것도 아니고.”

“네…….”

“사실 얼굴도 잘 기억 안 나거든. 내가 일곱 살에 죽었으니까.”

어느새 태진의 차가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태진이 왜 정 여사의 차를 타고 움직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곳은 차가 없으면 움직이기 힘든 동네였다.

태진의 차가 거대한 차고 앞에 서자 차고 문이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세 대의 차가 주차되어 있었고 앞으로 다섯 대 정도는 넉넉히 주차할 수 있는 공간이었다.

시동이 꺼지자 문형은 조심스레 차에서 내려 태진의 뒤를 따라갔다. 차고 안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건 처음 보았다.

엘리베이터는 순식간에 움직였다. 엘리베이터는 바로 집 안으로 연결된 모양이었다.

온통 유리로 된 엘리베이터 안에서 눈에 들어오는 인테리어에 문형의 눈이 휘둥그레 변했다.

천장과 벽이 모두 대리석이었다. 하지만 바닥만은 나무로 되어 있었다.

왠지 모를 부조화였지만 워낙 깔끔한 탓에 그것도 이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태진이 왔어.”

“인사 나누세요. 이쪽은 앞으로 오후 시간대 맡게 될 서문형 씨.”

“안녕하세요, 서문형입니다.”

문형이 재빨리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인자한 표정의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여자가 그녀를 맞이해 주었다.

“양인숙이라고 해요.”

“방 좀 안내해 줘요.”

“그래. 문형 씨, 이쪽으로 와요.”

태진이 바로 왼쪽에 있는 방문을 열고 들어가 버렸다. 살짝 고개를 숙인 뒤 문형은 인숙의 뒤를 따랐다.

“방은 2층이에요. 엘리베이터 타도 되고, 계단 이용해도 돼요. 편한 대로 쓰면 되니까 부담 갖지 말아요.”

“네.”

“몇 살이에요?”

“스물다섯 살입니다.”

“아이고, 어리네. 일이 많이 고될 텐데.”

“각오하고 왔어요.”

“그래도 인정이 아예 없는 분은 아니라 잘 버텨만 주면 돼요.”

“저기…… 사장님의 어머니 아니세요?”

그 말에 인숙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2층 맨 안쪽 문을 열며 안으로 들어섰다.

“아니에요. 사장님이 태어났을 때부터 보긴 했지만. 유모이자, 집안일 맡고 있어요. 여사님께서 날 키워 주신 거나 다름없거든.”

“참, 말씀 편하게 하세요.”

“그래도 될까?”

그러고 보니 태진과는 전혀 닮은 구석이 없었다. 그냥 50대 후반의 고상한 겉모습에 막연히 태진의 어머니일거라 생각했었다.

“이쪽이 문형 씨 쓸 방이야. 바로 옆은 사장님 서재라 크게 시끄러울 일은 없을 테니까 쓰기엔 편할 거고. 참, 이쪽은 욕실.”

“네.”

“차 부장이 하는 말 조금 들었는데.”

“아…….”

이곳에서 그리 오래 일을 했으니 인숙도 그녀의 사정에 대해 궁금해할 것이다.

아마 시간이 없어서 차 부장에게선 자세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는 뜻이 분명했다.

“짐 좀 정리하고 있어. 차 좀 가져올게.”

“아, 감사합니다.”

인숙이 방에서 나갔다. 물론 그녀의 가방을 보고 짐 정리를 할 것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인숙은 문형을 배려해 준 것이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10년을 버텨야 함을 이 방에서 위로를 받으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