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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5분 전까지만 해도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화창했다.

하지만 역시 여름 날씨는 변덕스럽다. 해가 막 지기 시작하는 것처럼 어두워지더니 순간 번개가 내리쳐 번쩍였다.

문형은 좀처럼 본 적 없던 표정을 하고 있는 남자가 신경 쓰였다. 저 남자는 태생이 그래서인지, 아니면 직업상 그런 것인지 대개 무표정했다.

그녀의 부모님이 저 남자의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려 자신이 찾아왔을 때도 남자는 표정을 구기지 않았다. 그저 늘 그런 것처럼 무표정했다.

30분 전, 이 집을 한바탕 뒤집어엎고 나간 NS통신의 딸이라는 박서희 때문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문이 열리자마자 아무 이유 없이 서희에게 위아래로 쭉 스캔을 받아야 했던 문형이 지금 더 인상을 구겨야 함이 옳지 않을까?

“할머니는?”

“잠 드셨습니다. 따뜻한 차 한 잔 가져다 드릴까요?”

그 말에 태진이 고개를 들었다. 소파에 앉은 채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턱을 괴고 검지로 관자놀이를 툭툭 치는 건 멈추지 않고 말이다.

“너 여기 뭐 하러 왔어.”

“네?”

“내 차 타러 왔어?”

“아닙니다.”

“그럼 신경 쓰지 마.”

문형은 한 번씩 태진이 참 특이한 사람이라 생각했다. 보통 이럴 땐 고개를 끄덕이나, 거절을 한다. 그런데 태진은 그녀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상기시킨다.

빚 10억.

계약 기간 10년.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치매 노인을 보살피는 것. 거기다 오갈 곳 없는 그녀를 재워 주고 먹여 주기까지 하며, 대학원도 나갈 수 있게 배려해 준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보다 그는 훨씬 더 괜찮은 고용인이었다.

다시 한번 사채업자라 그를 무시했던 스스로가 부끄러워졌다.

“신경 안정시키는데 따뜻한 차가 좋다고 해서요. 이건 일이 아니라 배려인 겁니다, 사장님.”

잠시 고민을 하는 듯하던 태진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배려라는 말에 더 이상 거절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식당을 지나 부엌문을 열고 들어서 다기를 준비했다.

한 번 차를 마실 때 계속 우려 마시는 것을 좋아해서 그녀는 정수기보다 포트를 이용하는 편이었다.

원목 쟁반에 다기를 모두 올리고 식당으로 나왔을 때 대리석 식탁에 앉아 있는 태진을 보고 잠시 놀라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 마시지.”

아마 그는 번잡하게 거실까지 쟁반을 들고 나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문형은 식탁에 쟁반을 내려 두고 포트의 전원을 눌렀다.

순식간에 물이 끓자 보이차를 넣어 우려 놓고 그 물로 다기를 데웠다.

다시 뜨거운 물을 넣어 우리는 것을 기다리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곧 우러날 겁니다.”

“스물다섯 살.”

“네?”

“아직 결혼은 좀 이른가?”

“보통 그렇겠죠.”

보통의 스물다섯 살들은 결혼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취업 혹은 공부를 하느라 바쁘고, 풋풋한 연애를 꿈꿀 나이니까.

문형은 찻잔에 차를 따라 태진에게 건넸다.

옅은 호박 빛의 우린 물은 참 따뜻한 느낌을 준다. 향이 좋고, 부담스럽지 않아 문형은 이 집에서 마시는 보이차를 참 좋아했다.

품질 좋은 보이차를 구하기란 쉽지 않았으니까.

이것도 다 태진의 집이기 때문에 맛볼 수 있는 것 중 하나였다.

“그래도 할 수 있는 나이라고 봐요. 박서희 씨는 사장님과 무척 결혼하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던데.”

막 찻잔을 집으려 할 때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태진은 원래 감정의 폭이 크지 않은 사람처럼 웃는 이였다. 저렇게 꼭 입술 한쪽만 올리고.

“스물세 살이야, 서희는.”

꼭 숍에서 꾸민 듯한 외모에 성숙한 차림이라 서희는 20대 중후반처럼 보였었다. 그건 그만큼 잘 꾸미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그녀도 이 일을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름 유복하게, 어려움 없이 살았었다.

심심하면 숍에 가서 메이크업을 받고, 백화점으로 쇼핑을 가기도 했다.

이젠 완전히 꿈이 된 이야기였지만.

서희라.

태진은 그녀를 부를 때면 꼭 성까지 붙여 부른다. 그게 거리감이 느껴져 좋다고 생각했다.

왠지 저렇게 이름만 부르는 건 이태진답지가 않다. 심지어 그는 자신의 오른팔이라는 규원에게도 꼬박꼬박 성을 붙여 불렀으니까.

“그쪽 말이야.”

“네?”

“서문형 씨.”

말도 안 된다.

“나와 결혼해 달란 뜻이야.”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라는 것을 문형은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