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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모두가 잠든 깊은 새벽, 후드를 뒤집어쓴 두 인영이 커다란 저택의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후드가 펄럭이며 여성의 가느다란 발목이 드러났다. 그들은 혹여나 주위에 누군가 있을까 싶어 힐끗거렸고, 가지가 담 밖으로 넘어가는 나무 앞에 서서 고개를 들었다.

후드 밑으로 드러난 녹색 눈동자가 달빛에 의해 비장하게 빛났다. 손바닥을 마주 비비며 준비하던 그녀는 마침내 나무를 천천히 오르기 시작했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나무 밑에 선 소녀가 나무를 오르는 여인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올려다보았다. 여인은 고개를 끄덕일 틈도 없이 후들거리는 팔로 힘겹게 나무를 올랐다.

얼핏 보면 도둑으로 오인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여인의 몸은 가벼웠다.

고작 허리에 돈 몇 푼 든 주머니만 달랑 매고 있는 그녀는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간절했다.

“후, 드디어…….”

후들거리는 팔다리로 겨우 나무를 오른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르다가 나무 밑에 있는 소녀를 향해 작게 말했다.

“메리, 너도 어서 올라와!”

여인의 말에 소녀, 메리는 쭈뼛거리다가 그녀가 했던 것처럼 천천히 나무를 올랐다. 여인은 손을 내밀어 메리가 나뭇가지 위에 안착하도록 도와주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담 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담 위쪽에는 뾰족한 창살이 설치되어 있어서 잘못 떨어지는 순간 끝이었다. 조심조심 가지 끝으로 이동하자, 꽤 밑에 있는 땅바닥이 눈에 들어왔다.

나무 위에서 내려다보니 순간 울렁거릴 정도의 높이였지만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발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이곳을 나가야 했다.

싱긋 웃으며 자신을 바라보던 적안을 떠올리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동시에 이곳에서 뛰어내리겠다는 용기가 생겨났다.

“내가 먼저 내려갈게.”

“꽤 높은데 괜찮을까요?”

메리의 목소리에서 두려움을 눈치챈 여인은 비장하게 말했다.

“발목이 부러지는 한이 있어도 이곳에서 나가야 해.”

그 말에 메리는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그녀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메리를 잠시 바라보던 여인은 다시 나무 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창살이나 나뭇가지에 걸리지 않도록 치맛자락을 움켜쥔 뒤, 그대로 뛰어내렸다. 빠른 속도로 땅을 향해 떨어지면서 그녀의 머릿속에 그동안의 고생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글을 쓰다 찾아온 슬럼프, 갑작스레 나타난 그 남자, 그리고 시작된 지옥 같은 생활.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난다고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입에서 기쁨의 외침이 흘러나왔다.

“이제 드디어 해방……!”

땅에 발이 닿기 직전, 타닥 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몸이 폭신하면서 단단한 무언가의 품 안으로 떨어졌다.

덕분에 다치지는 않았지만, 왠지 불안한 기분이 들어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그 반동으로 후드가 뒤로 벗겨지며 긴 갈색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에 반짝이는 붉은색의 무언가가 비쳤다. 그리고 여인의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작가님은 도망치는 게 취미인가 봐?”

듣기 좋은 미성이 귓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그것이 악마의 속삭임처럼 느껴졌다.

여인의 몸이 흠칫 떨렸다. 안색이 창백해지며, 저도 모르게 입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대, 대체 어떻게…….”

“이 저택 안에 있는 한 작가님은 절대 도망칠 수 없다는 거 알고 있잖아?”

그는 눈을 곱게 접으며 싱긋 웃어 보였다. 그러나 찬란한 미모와는 달리, 입에서 나오는 말은 꽤나 험악했다.

“아예 못 도망치게 다리를 부러뜨려 버릴까…….”

“……딸꾹…….”

여인의 입에서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그는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안심하라는 듯이 말했다.

“농담이니까 걱정 마. 난 작가님의 편의를 최대한 봐줄 거니까.”

“저, 정말로요……?”

“단, 나를 위해 글을 써.”

안심하는 듯했던 여인의 얼굴이 다시 굳어졌다.

남자는 붉은 눈을 가늘게 뜨며 그녀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나를 위해 글을 쓴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거야. 다만…….”

그녀의 다리 밑을 단단히 받치고 있는 그의 손에 은근히 힘이 들어갔다. 그것을 느낀 여인의 몸이 빳빳하게 굳었고, 남자는 빙글 웃으며 짐짓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글도 쓰지 않고 이렇게 계속 도망치려 한다면, 나도 가만히 있지 않아.”

여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리다 못해 파래졌다. 그것이 마음에 드는 듯 남자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며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 들어갈까요, 리아 작가님?”

‘이런 미친…….’

여인은 욕을 읊조렸지만 그것이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나오는 일은 없었다 뇌라는 게 있다면 감히 그 앞에서 욕을 내뱉지는 못할 테니까.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저 그의 품 안에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다.

필리아 로젠트. 그녀는 소설가로서 지낸 인생 중 가장 열렬한 팬이자, 최악의 팬에게 납치당해 있었다. 그리고 그 팬은…….

‘이런 미친 공작 같으니!’

제국에서 미친놈으로 소문이 자자한 제국 제일의 귀족 가문, 아벨하임 공작가의 주인이었다.



* * *



상황이 이렇게 된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설명하려면 먼저 나, 필리아에 대해 설명해야 했다.

로젠트가는 제국 변방에 위치한 작은 시골 영지를 다스리는 자작 가문이다. 역사도 오래 되지 않았고, 제국에 그렇게 큰 영향도 미치지 않았지만 그곳에서 로젠트 자작 부부는 나름의 평화를 즐겼다.

나는 그런 로젠트가의 막내딸이다.

귀족이라는 위치에 연연하지 않는 나의 부모님, 로젠트 자작 부부는 자식들이 원하는 길을 스스로 선택하여 나아가도록 키웠다. 특히나 작위를 받을 일이 없는 나는 오라버니들보다 더 자유롭게 컸다.

로젠트령은 변방의 시골 영지답게 놀거리가 별로 없었지만 저택 주위에 산이나 숲이 많았다. 어린 시절의 나는 그곳에서 뛰어놀며 자랐고, 덕분에 날이 갈수록 상상력이 풍부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가 내게 노트와 펜을 선물해 주었다. 하루가 끝나 가는 시간에 그날 무엇을 했는지 일기로 적어 보라는 의미로 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또래의 아이들이 으레 그렇듯 나 또한 일기 쓰는 것이 지루했다. 그래서 나름 머리를 굴려, 나의 일상을 이야기처럼 꾸며서 노트에 적기 시작했다. 그것은 꽤나 재밌었다.

노트 속에서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고, 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현실에는 없는 새로운 것을 창조해 낼 수도 있었다.

그 덕분에 어느 순간부터인가 일기를 쓰는 시간이 기다려졌다. 오죽하면 노트의 끝 장까지 다 쓰고 나서 아버지에게 새로운 노트를 사 달라고 졸라 댈 정도였다.

단시간에 노트를 꽉 채우자 아버지는 놀라움과 의심이 섞인 눈빛으로 내가 쓴 일기들을 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그것들을 읽어 내려가던 아버지는 끝 장까지 다 읽고 나서야 기특하다는 얼굴로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필리아는 소설을 쓰는 데 소질이 있구나.”



나는 그제야 내가 쓴 것이 일기가 아니라 소설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동시에 마음속에서 설렘을 닮은 무언가가 퐁퐁 올라왔다.

소설, 그것도 내가 쓴 환상 소설은 평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것이었기에 귀족들은 기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 안의 재능을 꿰뚫어 보고 그것을 키워 주기 위해 노력했다.

아버지는 노트와 펜은 물론이고, 다양한 소설책들까지 마련해 주었다. 어린 나는 그것들을 읽고, 쓰면서 나날이 재능과 상상력을 키워 갔다.

그렇게 나는 제국에서 인기 있는 환상 소설 작가가 되었다.



“아가씨, 일어나세요. 도착했나 봐요.”

몸을 흔들며 깨우는 목소리에 눈을 스르륵 떴다. 진한 녹빛의 눈동자가 설렘을 가득 담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메리……? 도착했다니, 어디를…….”

몽롱한 기운에 눈을 비비며 중얼거리자 메리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아가씨도 참……. 주무시느라 잊어버리신 거예요? 아가씨의 새집에 도착했다고요.”

갑자기 눈이 번쩍 뜨였다. 나는 얼굴에 미소를 가득 담고서 물었다.

“정말?”

“네!”

메리의 확답을 받자마자 마차의 문을 열어젖혔다.

체통도 잊고 헐레벌떡 발디딤을 타고 내려가자 메리가 기겁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신경 쓰지 못했다. 내 앞의 아담한 집이 시야에 가득 들어온 탓이었다.

“아가씨, 기쁘신 건 알지만 제발 조신히…….”

나는 메리의 잔소리를 듣다 말고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미리 사람들을 불러 집을 정리한 덕분에 깔끔한 인테리어가 나를 맞이했다. 숨을 크게 들이켜자 새집 냄새가 느껴졌다.

깨끗한 집 안을 둘러보다가, 빙글 돌며 옆에 놓인 침대 위에 풀썩 누웠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여기가 내 작업실이라니…….”

정확히는 작업실이 아니라 앞으로 살게 될 집이었지만 나에게는 작업실이나 다름없었다. 앞으로 이곳에서 생활하며, 오직 글만 쓸 테니까.

“그렇게 좋으세요?”

뒤따라 들어온 메리가 픽 웃으며 물었다. 나는 침대 위를 뒹굴거리다 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너무 좋아.”

“저택보다 훨씬 작은데도요?”

“그래도 저택보다 훨씬 좋아.”

한적한 고향은 글을 쓰기에는 좋은 환경이었다. 그러나 시골 영지답게 도시에서 유행하는 것은 잘 들어오지 않았고, 출판사의 서한도 받기까지 오래 걸렸으며, 무엇보다 지루했다.

그래서 성인이 되는 날, 나는 결심했다. 아르카 제국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도시, 바실로 가서 글을 쓰자고.

물론 가족들은 반대했다. 특히 부모님은 나의 재능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여자 혼자, 그것도 귀족 영애가 홀로 나가 살겠다는 것이 걱정된 것이었다.

그런 부모님의 마음을 잘 알고 있기에 나는 떼를 쓰기보다는 오랫동안 공을 들여 부모님을 설득했다. 마음을 솔직하게 전하고, 결국은 허락을 받아 냈다.

결정이 나자, 부모님은 무리를 해서라도 안전하게 도시 안에 있는 저택을 사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집안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감사한 제안을 거절했다. 대신 도시 외곽의 작은 마을에 있는 집 한 채를 샀다.

평민들이 살 법한 작은 집이었지만 나름 만족스러웠다. 언제든 갈 수 있을 만큼 도시와 가깝고, 조용했으니까.

헤실 웃으며 침대 위에 얼굴을 묻던 나는 방 한쪽에 있는 빈 책장을 발견했다. 그 앞에 책이 가득 들어 있는 상자들도.

그것들을 보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 책장에 책을 한 권씩 꽂기 시작했다.

“아가씨, 제가 할게요.”

“아니야. 내가 할게. 이건 내가 해야 의미가 생기거든.”

내가 제일 소중히 여기는 책들인 만큼 다른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고 내 손으로 직접 정리하고 싶었다.

먼지 때문에 점점 더러워지는 내 손을 메리가 옆에서 조마조마하게 바라보았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차곡차곡 책을 책장에 꽂아 갔다. 그리고 마침내 책장은 책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것을 뿌듯하게 바라보던 나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갑자기 의욕이 샘솟는걸?”

그래. 이 마음, 이 분위기라면 가능할지도 몰라.

눈에서 불이 타오르는 듯했다. 나는 비장하게 책상 앞에 앉아 깃펜을 손에 들었다.

그런 나를 메리가 잠시 의아하게 바라보았지만, 하루 이틀 일이 아니어서 그런지 곧 조용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내 안의 불꽃은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아 픽 하고 꺼져 버렸다.

“왜 안 써지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