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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야아, 이은초. 너 1학기 마치자마자 사라진 이유나 들어 보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모올래 자퇴를 하고. 그때 말이야. 저 새끼가 얼마나…… 악! 이 새끼야!”

윤성이 어눌한 발음으로 중얼거리는 남자의 옆구리를 냅다 내리쳤다. 왼쪽 허리춤을 부여잡은 남자가 앓는 소리를 내며 소파 위로 생기 없이 쓰러졌다. 희미하게 흔들리는 은초의 눈동자가 서빈을 향했다. 첨예한 유리 조각처럼 싸늘해진 그의 얼굴이 보였다.

불현듯, 검은 재처럼 소멸되었다 생각한 기억들이 꿈틀꿈틀 고개를 내밀었다. 몸이 으슬으슬 떨리며 오한이 일었다. 은초는 눈을 질끈 감고 악몽 같은 기억을 차단했다.

“너 왜 그래. 어디 아파?”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그가 은초의 어깨를 잡고 염려스레 물었다.

“아무래도 난 집에, 집에 가야겠어.”

“잘 있다가 갑자기 왜 이러는 건데.”

“놔.”

뒤에서 낮게 욕을 읊는 그의 음성을 무시하고 도망치듯 펍을 빠져나왔다. 은초는 엄습하는 두려움을 내리누르며 무작정 달음박질쳤다. 그러나 채 열 걸음도 떼지 못하고 길가 모퉁이에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손아귀가 은초의 팔을 우악스럽게 낚아챈 탓이었다.

손쉽게 그녀의 팔을 사수한 서빈이 서슬 퍼런 눈빛으로 은초를 쏘아보았다.

“넌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어. 왜 사람을 허허벌판에 서 있는 허수아비로 만드는 건데? 너 그날도 아무런 말 한마디 없이, 아무런 흔적도 없이 나 엿 먹이고 사라졌잖아. 그런 너를 찾겠다고 내가……!”

수려한 얼굴이 험악하게 비틀렸다. 그는 그렇게 뼈아픈 얼굴을 하고, 은초의 팔을 꼭 붙든 채 놓아 주지 않았다.

“왜 날 여기로 불러냈어? 많고 많은 날 중에, 많고 많은 장소 중에 왜 하필 나를 여기로 불러낸 거야?”

남자의 호소 따위 들리지 않았다. 은초는 온전했던 자신을 흐트러지게 만든 그가 원망스럽기만 했다.

“억울해서. 넌 이렇게 태평하기만 한데, 나만 아직도 과거에 연연하고 있는 게 억울해서. 그래서 쟤들 얼굴 보고 감정 한 자락이라도, 기억 한 줄기라도 떠올려 줬으면 좋겠어서. 됐어?”

태평해? 내가? 서빈의 말을 수없이 곱씹던 은초는 그대로 고개를 떨구었다.

“갈기갈기 찢긴 기억 같은 거 찾으려고 온 거 아니야. 난 너한테 이것만 전해 주면 돼.”

은초가 엉망으로 구겨진 지폐 여섯 장을 그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 처량한 종잇장을 내려다보던 서빈이 입가를 끌어 올리며 자조했다.

“내가 지금 너한테, 이깟 푼돈이나 받자고 이러는 걸로 보여?”

“……제발 놔 줘. 집에 가고 싶어.”

서빈의 얼굴을 보는 것이 괴로웠다. 부지불식간에 나타나 지난 옛 기억을 부추기는 그를,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힘이 들었다.

“시간 늦었어. 같이 가.”

“아니, 괜찮아. 혼자 가도 충분해.”

은초는 마침 앞을 지나치려는 택시를 붙잡았다. 강경하게 버티던 서빈의 손을 뿌리치고 뒷좌석에 올라탔다. 등 뒤로, 애석하게 따라붙는 시선이 느껴졌다. 은초는 두 눈을 감고 시트에 머리를 기댔다.

너무 피곤해.

예기치 못했던 그와의 재회에 방치해 두었던 피로가 회색 구름 몰리듯 빠듯하게 밀려들었다.



* * *



“야. 괜찮냐? 이은초는 왜 갑자기 뛰쳐나간 건데?”

펍으로 돌아올 생각을 않는 서빈이 있는 곳을 용케도 찾아낸 윤성이 그를 따라 담배를 꺼냈다. 서빈은 ‘임대 문의’라고 쓰인 종잇장이 붙은 가게 앞에서 술에 취해 해롱거리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내가 그걸 알면, 이러고 있을까?”

서빈은 담배를 피워 물며 생각했다.

속이 비어 버린 것만 같은 그녀가 자신이 알던 이은초가 맞는지.

군집한 사람들로부터 단절된 채 얼어 있는 것만 같았던 이은초가, 자신이 알던 그녀가 맞는지.

“12년 만의 재회에 어울리는 잡스러운 감정이 들어야 하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쓰레기 같지.”

“……말랐더라. 많이.”

누구보다 떳떳하게 잘 살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늘 곧고 강직했으니까.

그러나 그 예상은 그녀를 보자마자 와르르 허물어졌다. 뿔난 짐승을 앞에 둔 사람처럼 벌벌 떠는 모습에, 모질고 독했던 마음도 형적 없이 으그러졌다. 12년 만에 마주한 그녀는 잔인하리만치 섬약했다. 마치 억제할 수 없는 풍파에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인 억새풀을 떠올리게 하는 모습이었다.



‘갈기갈기 찢긴 기억 같은 거 찾으려고 온 거 아니야.’



갈기갈기 찢긴 기억이라……. 모르겠다, 아무것도.

허공에 그려지는 그녀의 모호했던 눈망울이 안쓰럽고 아리고 신경이 쓰인다. 감히 함부로 하고 싶지 않은 눈을 떠올리던 서빈은 이마를 신경질적으로 문질렀다.

그녀의 앞에서는 아닌 척을 했지만, 떨리는 사지육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애를 쓰며 노력했다. 가슴은 미칠 듯이 뛰고 머릿속은 결백한 도화지처럼 새하얘졌다. 그녀를 끌어안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막은 뒤, 부러 이기죽대며 말을 붙였다. 하지만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돌아오는 것은 둔감하기만 한 시선이었다.

“너도 그래?”

“뭘.”

“이은초. 여태 별 탈 없이 잘 살아온 게 아닐 수도 있다는, 그런 생각이 드느냐고.”

“잠깐 봐도 알겠던데? 웃음도 없고, 기운도 없어 보이고. 그거 때문에 나도 따로 뭐 묻지도 못한 거 아니겠냐.”

왼편에서 올라오는 연기와 오른편에서 올라오는 연기가 섞여 들며 하나의 연기를 이루었다. 윤성의 눈에도 은초가 그렇게 보였다면, 자신이 그녀에 대해 살을 보태어 과대 해석 한 것이 아니라는 뜻인데.

“씨발.”

험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서빈은 막대를 내던져 발로 뭉개어 끄고 주말 인파 속으로 걸음을 떼었다. 그녀가 단숨에 제 앞에서 사라져 버렸으니 펍으로 돌아가 그곳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가려고?”

“어.”

“하여간, 새끼. 성질하고는.”

연기를 후우, 하고 뱉어 내는 윤성의 눈동자가 멀어지는 서빈을 바짝 뒤따랐다.

“딱 보니 한동안 저 자식 얼굴은 못 보겠네.”

고개를 휘젓는 윤성의 미소가 미묘했다.







#02. 이성과 감정의 충돌





건설주택포럼 정기 세미나를 마친 서빈은 저녁 회의를 위해 다시 회사로 돌아왔다. 그는 빠른 속도로 내려오는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땅이 저 밑으로 꺼져라 한숨을 지었다.

“네, 대리님. 지금 막 시장 조사 마치고…….”

가쁘게 달려온 누군가가 자신의 발등을 밟는 것이 느껴졌다. 이마를 한껏 일그러뜨린 서빈이 오른편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그 살벌함에 반사적으로 눈을 내리깐 남자가 송구함을 발산하며 고개를 구부렸다.

“죄, 죄송합니다, 본부장님.”

“정신을 어디다 팔아먹고 다니는 겁니까?”

“제가 들어오는 길에 회장님을 뵈어서 정신을 잠깐 놓고 있었나 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무지막지하게 부릅뜬 눈빛을 떠올린 남자가 눈을 질끈 감았다.

서빈은 남자가 마주쳤다는 건설업계의 대부, 교일건설의 수장인 제 큰아버지를 떠올렸다. 서빈과 권남열 회장이 서로 인척 관계라는 것은 그 둘을 포함한 소수만이 알고 있는 진실이었다. 남열이 밀접하게 맞닿아 있는 윗선과 서빈의 입단속을 철저히 해 둔 탓에 사내 직원들은 이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듣기로는 인사 관리 시스템에도 손을 써 놓았다던데. 그 인사가 뭔들 못 하겠는가. 둘의 관계가 사내에 떠벌릴 자랑거리도 아닐뿐더러 자신이 가문의 결점이라나 뭐라나.

그 말을 듣고 서빈은 저 같은 결점덩어리를 왜 회사 안으로 들여놓느냐고 차분히 반문했다. 남열은 한밤중에도 제 소명을 다하고 있는 야경의 빛들을 관망하며 그저 냉철하게 지시했다. 어디 가서 허튼짓이라도 하면 피 한 방울 안 섞인 네가 고아 낸 먹물이 일가의 명예를 더럽히는 것이라고, 그러니 제 감시 아래 일을 하라고 말이다.

권 회장의 말은 앞뒤가 어긋나 있었고 묘하게 설득력이 없었다. 내가 회사 안에서 그러지 않을 거라는 보장이 있나, 하고 말대답을 하려다 그만두었다. 아버지가 큰아버지 밑으로 들어가길 권고했으니까.

그 뒤부터는 일사천리였다. 대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입사를 하고, 서른이라는 나이에 가능하지 않을 승진을 했다. 사실 시기적절한 타이밍의 몫이 컸다.

작년 10월. 임기 만료 두어 달을 앞두고 개발사업 본부장이 큰 사고를 당했었다. 그 뒤, 급히 소집된 임원 회의에서 몇몇 인물이 후임으로 거론되었지만 권 회장의 강한 의견 피력에 서빈이 그 자리를 꿰차고 중용될 수 있던 것이었다. 경력과 나이, 그 두 가지를 필히 중요하게 여기던 관행을 벗어난 특이한 사례였다.

임원들은 아무리 근무 실적이 뛰어나고 회사에 큰 공헌을 할 인물이라 해도 저 나이에 본부장 자리를 꿰차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반발을 했지만 어느 누가 흑호(黑虎)를 이겨 먹을 수 있겠는가. 그렇게 회의는 일단락되었다.

불철주야 업무에 몰두해도 승진이 애들 장난처럼 쉽지 않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는 사원들도 서빈의 승진에 의문을 가지기엔 모자람이 없었다. 서빈은 먹잇감이 되어 여러 사람들의 입에서 수도 없이 씹혀 댔다. 뒷받침을 해 주는 숨은 실세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견과 능력과 역량이 훌륭하니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는 두 의견이 대립했다.

그들이 저를 납작하게 씹어 대도 상관없었다. 자신은 앞만 보며 AI 로봇처럼 일만 하면 되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권남열 회장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제게 압력을 불어넣고 있었다.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못했던 네가 내 동생과 우리 집안에게 진 빚들을 몸을 불살라서라도 갚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빚.

깨끗하게 씻어 내어 청산해 버리고 싶은 빚.

자신은 그런 존재인가. 헛웃음이 불쑥 비어져 나왔다.

“권 회장만 보면 뇌가 짓물러지는 기분이 들긴 하지.”

“……네?”

“앞으론 조심하라고요.”

“아, 네. 조심하고 또 조심하겠습니다!”

평소대로라면 혹독한 설교가 튀어나와야 정상이었지만, 서빈은 관대하고 너그럽게 넘어가는 쪽을 택했다. 서빈의 머릿속은 그녀를 생각하고 떠올리기에도 바빴다.

호된 막소리를 예상했던 남자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빈을 바라보았다. 사수들에게 듣자 하니 불구덩이에서 올라온 사탄이 따로 없다고 들었는데, 잘못 들은 것인가. 아니다. 면접장에서 보여 주었던 살얼음판의 결정 같은 모습을 똑똑히 기억한다.

“개발 1팀 임태준.”

서빈이 남자의 목에 걸린 사원증 모서리를 들어 올렸다. 사원증을 꼼꼼하게 들여다보는 서빈의 행동에 남자가 눈을 끔뻑거리며 턱을 치켜세웠다.

“신입?”

“네. 올해 교일건설에 입사했습니다.”

“선임들이 잘 챙겨 줍니까?”

“네. 노하우도 알려 주시고 도움이 되는 조언도 많이 해 주십니다.”

두 손을 앞으로 공손히 모은 남자가 성실하게 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