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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공포는 걷잡을 수 없이 부풀었다. 당장에라도 저 키 큰 아저씨가 달려와 머리채를 붙잡고 주먹질을 할 것만 같다. 아빠처럼 배를 펑, 걷어찰 것도 같다. 그때마다 우연은 붕, 날아가 화장실 문에 부딪치곤 했다. 그러니 아빠보다 훨씬 덩치 큰 저 사람에게 얻어터졌다간, 분명 대륙 간 탄도 미사일처럼 날아갈 것이다. 미지근한 눈물이 때 묻은 운동화 끝으로 툭툭 떨어진다.

그런데 이상하다. 캐묻는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발발 떨며 고개를 드니 우연을 노려보던 눈이 크게 벌어져 있다. 그의 시선이 퉁퉁 부은 눈과 새빨갛게 얼어 터진 얼굴, 스타킹도 안 신은 맨다리, 얄따란 교복을 차근차근 짚어 나간다.

“……이런.”

아저씨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젓더니 우연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우연은 황급히 뒷걸음질했다. 그가 한 걸음 다가오면, 우연은 두 걸음 뒷걸음질했다. 그의 보폭은 우연의 두 배쯤 되는 것 같았다. 다시 한 걸음, 또 한 걸음. 우연은 서너 걸음 후다닥 뒤로 뛰었다.

아저씨는 다가오기를 멈추고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알았어. 겁을 주려는 건 아니야. 그냥 거기 서 있어요. 어색하게 내민 손이 그렇게 말했다.

마, 맙소사, 안 돼!

소리 없는 비명이 튀어나왔다. 그가 허리를 굽혀 연습장을 주워 펼친 것이다. 안 돼요, 제발 보지 마세요! 우연은 입을 틀어막은 채 발을 동동 굴렀다.

다른 사람이 그림을 구경하는 것이 두려웠다. 조금 전 그린 아저씨의 모습은 그나마 러프 스케치 상태지만, 앞에는 그동안 그려 둔 그림이 수십 장이나 들어 있었다. 사진처럼 정밀하게 묘사된 인물화가 대부분인데, 그로테스크한 구도와 묘사 때문에 ‘정신병자의 그림’, ‘증오를 유발하는 그림’으로 불렸다. 그림의 모델이 된 친구들은 눈썹을 우그리며 ‘미친…….’이라는 말로 소감을 끝내곤 했고, 엄마 아빠는 대놓고 그림을 찢으며 화를 냈다.

아 맞다!

우연은 속으로 다시 한번 비명을 질렀다. 그것 말고도 방금 엄마 아빠에게 남겨 둔 말이 있었다. 앞으로 영원히 안 볼 거라 생각해서 그동안 못 했던 말을 속 시원하게 다 갈겨 놨는데. 어떡해. 난 몰라. 눈앞이 노래졌다.



「김현주

엄만 좋겠다. 하나뿐인 딸이 미친년이라……

……백치 천치 머저리 정신병자 사이코패스라……

……태어난 게 내 탓이야? 둘이 좋아서 낳아 놓……

……소원대로…… 나가 죽을 테니까 엄마도……

진형식

……왜 사람을 맨날 개 패듯…… 뱀술 처먹더니 눈에 뵈는 게……

……탬버린 아줌마…… 체육관 아줌마…… 같이 자니까 좋아?

……채팅 앱…… 더러운…… 확 에이즈 성병에 잔뜩 걸려서 뒤져……

성교육 안 해도 돼…… 드럽고 소름 끼쳐, 재수 없는……

미대 보내 준다더니…… 울면서 비니까 신나지? 정말 뒈지니까 신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쓰지 말걸. 죽어도 쓰지 말걸.

우연이 입술과 손톱을 번갈아 물어뜯는 동안, 아저씨는 연습장을 뒤적이며 자신의 그림을 찾기 시작했다. 다행히 다른 그림에는 관심이 없는 듯, 연습장을 넘기는 속도는 빠른 편이었다.

드디어 움직임이 멎었다. 자기 그림을 찾은 것이다.

그는 눈 한번 깜박이지 않고, 난간에 기대서 있는 자신의 러프 스케치를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잠시 후 아저씨가 연습장을 덮고 고개를 들었다. 표정은 여전히 딱딱하고 눈썹도 계속 찌푸린 상태였다. 하지만 눈물로 얼룩지고 퉁퉁 부어터진 우연의 꼬락서니를 보더니, 하려던 말을 지그시 삼켜 넣는다.

잠시 후, 그의 입술 사이로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춥지 않아요, 학생?”

“아? 네?”

어찌나 뚱딴지같은지, 우연은 몹시 당황했다. 아저씨의 팔이 고무고무처럼 뻗어 나와서 뺨을 후려갈겼어도 이보다는 덜 당황했을 것 같다.

“오늘 영하 12도인데 옷이 너무 얇아 보여요. 바람도 이렇게 센데.”

“아, 안 추워요. 괘, 괜찮아요. 하나도 안, 안 추…….”

“혹시 무슨 일이 있어요?”

제기랄. 눈치챘나 보다. 세종 기지 앞에서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우연은 숨겨 둔 이야기를 실제로 털어놓는 것이 이렇게 부끄러울 줄은 몰랐다.

“……정말 괜찮아요! 오늘이 졸업식이라 그냥 기념으로 한번 와 본 거예요. 저, 저는 굉장히 괜찮고, 아주 정상이에요.”

“글쎄, 이렇게 어린 학생이, 이렇게 추운 날, 그런 얼굴로…… 졸업식 날 학교 대신 한강에 오는 걸…… 아주 정상이라고 하긴 ……좀 어려울 거 같은데…….”

아저씨는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것 같았다. 부모님이 여기 온 거 알아요?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는 걸 보면 생각과 배려가 깊은 사람인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정상이니 비정상이니 판단당하는 일은 아팠다. 그것은 우연의 아킬레스건이었고, 아빠, 엄마, 친구들이 하는 말로도 충분했다. 우연은 바늘에 찔린 고양이처럼 목소리를 높였다.

“저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키가 좀 작아서 그렇지, 고등학생이에요.”

“음, 중학교 졸업이 아니었나요? 미안해요. 그래도 고등학생 정도는 보통 어리다고 하지 않을까?”

아저씨가 가볍게 웃는 모습에 짜증이 치솟았다. 나이 적다고 무시하나? 아저씨 아줌마들은 교복 입은 학생이라면 일단 꼰대질부터 하려는 경향이 있다.

“아뇨, 절대 어린 거 아니에요. 저 오늘이 졸업이고, 아저씨랑 똑같은 성인이에요. 아저씨네 애들이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요, 교복 입었다고 무조건 어린애 취급 하면 꼰대 아재 소릴 듣게 될 거예요.”

아저씨의 입이 살짝 벌어진다. 입술이 잠시 들썩이더니 이내 짧은 헛웃음이 튀어나온다.

“학생, 나 그렇게 나이 많지 않아요. 애도 없고, 아니, 일단 결혼도 안 했어. 아직 젊어요. 겨우 서른둘이야.”

뭐, 젊다고? 나이를 서른둘이나 먹어 놓고? 진심 뻔뻔하다. 우연은 저도 모르게 속의 말을 해 버리고 말았다.

“그거 보세요. 중년 맞잖아요.”

“……허.”

아저씨는 장갑을 낀 손으로 입을 문지르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아마 저 동작은 당황했다는 뜻이겠지. 그런데 왜? 사실을 사실대로 말한 것뿐인데 왜 저런 반응일까?

아, 설마 자기가 중년인 걸 모르나?

……아, 아니, 혹시 중년이라고 대놓고 말하면 버르장머리 없는 건가?

우연은 바로 겁에 질렸다.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면, 분위기에 맞게 제대로 대답을 한 건지 몰라서 늘 긴장했다. 아빠의 반응은 일관성이 없어서 똑같은 말을 해도 어떤 때는 재미있다며 웃었고, 어떤 때는 아가리에서 나오는 대로 씨불인다고 손을 올렸다. 대답을 바로바로 안 해도 화를 냈다. 저 아저씨도 아빠처럼 화를 내려나. 우연은 우물쭈물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양보했다.

“그럼, 아저씨 나이도 있으시니깐 제가 어린 거로 칠게요…….”

“이봐요, 학생.”

학생이라는 호칭도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저씨, 저 이제 학생 아니에요. 오늘 졸업했다니까요.”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제 이름은 진우연이라고 해요.”

“……좋아요, 진우연 씨.”

아저씨가 말을 멈추고 우연을 내려다보며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짧게 웃었다. 불러 놓고 보니 좀 어색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우연은 그를 마주 보며 실쭉 웃는 것으로 새로운 호칭을 받아들였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자신을 진우연 씨, 하고 불러 준 느낌이 너무 특별하고 좋았다.

“그래요, 나는 한이원이라고 해요. 저 여의도에 있는 회사에 근무해요.”

불렀던 용건을 잊어버리고 난데없이 통성명을 하게 된 아저씨가 뒤늦게 머쓱하게 웃는다. 이원, 한이원, 우연은 큰 비밀이라도 알게 된 것처럼 고개를 숙인 채 입속으로 몇 번 이름을 불러 보았다. 입술에 순하게 올라가고 혀에 부드럽게 스며드는 이름, 예쁘고 착하게 느껴지는 이름이었다. 고작 이름을 알게 된 것뿐인데, 거리가 껑충 가까워진 것 같다.

고개를 드니 이원 아저씨가 웃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가슴에 모락모락 열기가 핀다. 그러고 보니 아저씨의 홍채 색깔이 특이하다. 세피아, 초콜릿을 연상시키는 어둑하고 부드러운 갈색, 우연이 가장 달콤하고 따스하게 느끼는 색이었다.

……어쩐지, 눈웃음이 유난히 부드럽고 따뜻해 보인다 했더니.

“잠시만요.”

아저씨가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입고 있던 코트를 벗어서 우연의 어깨에 조심스레 걸쳐 주었다. 아까부터 이걸 해 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것 같다. 안에 털이 덧대어진 코트는 따뜻하다기보다 무거웠고, 생각보다 훨씬 길어 바닥에 닿았다. 허수아비가 된 것 같았다.

아저씨의 목에 걸려 있던 검은 목도리까지 얼굴에 감기자 우연은 당황했다. 비싸 보이는 목도리에 눈물 콧물 따위를 묻힐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고개를 저어도 아저씨는 기어이 목도리를 칭칭 감아 주었다. 목도리엔 그의 체온과 달콤하고 나른한 향이 조금 남아 있었다. 우연은 목도리에 더러운 것을 묻히지 않으려고 목을 쭉 빼고 고개를 하늘로 쳐들었다. 하, 하하, 괜찮아요. 아저씨가 다시 웃는다.

“손 좀 줘 봐요.”

아저씨의 입에서 나오는 입김이 뺨에 와 닿는다. 하얀 입김 속에는 옅은 민트 향기, 아마도 치약이나 구강 청정제의 냄새일 것이 분명한 산뜻한 냄새가 섞여 있었다.

우연이 코트 소매에 손을 넣어 내밀자 아저씨는 한쪽 무릎을 접고 앉아 허수아비처럼 늘어진 소맷단을 걷어 주었다. 그리고 어린아이의 옷을 입히듯 코트의 단추도 하나하나 목 끝까지 바짝 채워 주더니 장갑까지 벗어서 끼워 주었다. 장갑 안쪽은 새하얗고 보드라운 털로 덮여 있었는데 아저씨가 두 손을 꼭 쥐자 느낌이 이상했다. 따뜻한 것 같기도 하고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손을 꼼틀거렸지만 아저씨는 손을 놔 주지 않았다. 갑자기 난간을 뛰어넘을까 봐 그러는 것 같았다.

우연은 드디어 용기를 내서 그의 눈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저씨, 아, 아까 아저씨 그림 보고…… 화 안 나셨어요?”

“안 났어요. 그림 멋지던데, 왜 화가 나야 할까?”

“사람들은 제 그림을 싫어해요. 증오를 유발하는 그림이고, 정상적인 그림이 아니래요.”

갈색 눈동자가 눈꺼풀에 반쯤 가려지면서 음, 하는 낮은 한숨 소리가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