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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 * *



그가 나가고 다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짧았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는 내내 유주는 그의 검은 눈과 풍기던 짙은 향, 손목을 쥐던 힘 같은 것들을 최대한 선명하게 떠올리느라 애를 먹었다.

“힘들었어?”

돌아온 그가 물었다. 기다린 시간이 괴로웠을 거라는 걸 아는 사람 같았다.

“아니요. 괜찮아요.”

유주가 약간 가빠진 숨을 뱉으며 대답했다. 도현이 그런 유주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정말 괜찮아?”

“…….”

“거짓말할 필요 없는데.”

한껏 다정한 목소리에 괜찮은 척 의연을 떨던 마음이 무너졌다. 다 안다는 듯 구는 검은 눈도 피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한숨을 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숨쉬기가……. 숨쉬기가 힘들어요.”

그는 놀란 기색 없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단추 풀어.”

“네?”

“단추 말이야. 두어 개만 풀어. 그것만 해도 조금 편할 거야.”

꿇어앉은 그가 고갯짓으로 블라우스 단추를 가리켰다.

“아…….”

별 의미 없는 말인 것을 알면서도 민망해져 고개를 조금 숙였다. 그 상태로 단추를 쥐는데 갑작스레 닿는 뜨거운 열감에 손끝이 떨렸다. 불꽃을 머금기라도 한 듯 뜨거운 손가락이 발목 언저리를 훑었다. 피아노를 연주하듯 조심스럽고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벗겨 줄까.”

“네?”

말이 야했다.

“구두. 발 부어서 벗기 힘들 것 같은데.”

도현이 눈을 맞추며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기도 전에 그가 조심스레 하이힐을 쥐었다.

“아아…….”

퉁퉁 부은 발 때문인지 구두는 쉽게 벗겨지지 않았다.

“아파?”

“조금……. 아아, 아파요.”

아프다는 말이 쉬웠다. 엄살은커녕 참는 데에 소질이 있다고 생각해 온 유주는 스스로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가 자꾸만 자신을 이상하게 만들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

도현이 가는 발목을 쥐며 말했다. 그의 말에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고작해야 기다려, 괜찮아 따위의 말인데도 이상할 만큼 충실히 따르게 되었다. 얌전히 기다리게 되었고, 정말이지 괜찮은 것 같았다.

그가 구두를 벗겨 내고 6층에서 가져온 아이스 팩을 발목 위에 올렸다.

“며칠 걷기 힘들겠다.”

그 말에 유주는 절로 한숨을 뱉었다.

“안 되는데…….”

내일이 바로 언니의 기일이었다. 할 일이 많은 것은 아니었지만 납골당에 가면 적어도 꽤 오랜 시간 서고, 걷고, 꿇어야 하는 과정이 있었다. 엄마는 아픈 저를 배려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아픈 딸보다는 죽은 딸이 더 가여울 테니 어쩔 수 없었다.

“뭐가 안 되는데?”

생각을 끊은 건 그였다.

“아뇨, 그냥…….”

적당한 핑계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구구절절 좋지도 않은 가족사를 읊을 생각도 없었다.

“내일 가야 할 곳이 있어서요.”

도현이 고개를 들어 눈을 맞췄다. 무심한 얼굴이었다.

“안 가면 되잖아.”

“아…….”

“아픈데 어딜 가.”

발목을 조금 세게 쥐며 그는 대답을 종용했다. 아아― 앓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손에 실린 힘이 강했다. 아파 미간을 찡그리며 그의 어깨를 쥐자 그제야 발목을 놓아주었다.

“아, 홍 팀장한테 연락했어.”

도현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팀장님이요?”

그제야 날아간 이성이 돌아오는 기분이 들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무슨…… 무슨 얘기 하셨어요?”

“무슨 얘기 했을 것 같은데?”

“네?”

“응?”

말장난 같은 물음에 유주는 조용히 숨을 삼켰다. 그는 저처럼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못 할 짓 한 것도 아니면서.”

“아, 아뇨. 저는 그냥…….”

그는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뭐가 그리 무섭냐 물으면서 겁을 주는 건 그였다.

“사실대로만 얘기했어.”

그러니까 그 사실이 무엇일까 궁금했다. 그와 나눈 사실이 벌써 나열할 정도로 많았다. 울었고, 떨었고, 다쳤고, 안겼다. 그중 무엇도 괜찮은 사실이 없는 것 같아 걱정이 솟는다.

“홍 팀장도 놀라더라고.”

아아, 탄식이 나왔다.

도현은 그런 유주를 놓치지 않고 살폈다. 불안해 보였다. 불안에 떠는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재미가 있었다.

“괜찮아.”

말꼬리를 길게 늘였다. 또 한 번 미세하게 찡그리는 미간이 보였다. 잇새로 입술을 씹는 것도 보이고.

아, 이제 그만 놀려야지.

“계단에서 굴렀다고 했어.”

“아, 계단…….”

조금 안심하는 듯 내려앉는 가슴이 보인다.

“그게 다예요?”

“뭐가 더 있어?”

“아, 아뇨……. 없어요.”

“계단에서 다친 거 보고 조퇴시켰다고 했어.”

제가 저에게 유해한 사람인지, 무해한 사람인지 고민하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즐거우니 장난은 여기까지.

“감사합니다.”

유주는 눈을 내리깔며 답했다. 혼란스러웠다. 그가 안락한 동시에 두려웠다. 속을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걸 아는 것 같으면서 또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말하지 않는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 같은데 또 완전히 모르는 것 같기도 했다.

“쉬어.”

도현은 그런 유주의 어깨를 토닥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어진 오후 업무를 시작하려는 듯했다.

유주는 어쩌면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도현이 만드는 기묘한 평화 속에서 조금 더 쉬고 싶다는 열망이 피어오르긴 했지만 어차피 조퇴 처리까지 했으니 집으로 가 안정제를 먹는 편이 장기적으로는 현명한 선택인 것 같았다.

쉬라느니. 가지 말라느니. 수국도 밟은 그가 앞으로 무엇을 할지 알 수 없었다. 일부러 저가 원하는 것만 내어 주는 것 같은 그가 좋아 곁에 있고 싶으면서도, 곁에 있고 싶은 기분이 두려워 멀어지고 싶었다.

“저는 그럼…….”

몸을 일으키려는데 그가 뒤를 돌았다.

“일어나라고 한 적 없어.”

단호했다. 낮은 목소리, 검은 눈. 절로 긴장이 되는 모양새였다.

“쉬라고 했지.”

어르듯 다정했다. 말을 듣지 않는 아이를 대하는 듯했다. 그 기세에 눌려 도로 소파에 앉자 그가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을 했다.

아, 그를 이길 수가 없다. 아무리 상사여도 하고 싶은 말 하나 못 하는 멍청이는 아니었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 * *



시간은 느리게 갔다. 그는 일에 대한 집중도가 높은 사람이었다. 책상에 앉은 이후로는 죽 같은 자세였다.

꽤 많은 전화가 오갔다. 상대는 전시 후원자나 작가들인 것 같았다. 가끔은 비서들의 콜을 받기도 했다. 짧은 보고들이었다. 새로 생긴 일정이나 취소된 일정 같은. 그럴 때마다 저는 허리를 세우고 자세를 바로 했다. 당장에라도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비서들이 이곳에 들어올 것 같은 기분에서였다.

“정유주.”

그런 움직임이 몇 번 지속되자 거슬렸는지 그가 말했다.

“편하게 있어. 신경 쓰이잖아.”

“아, 죄송해요.”

“발목 때문에 그래?”

무심한 얼굴로 걱정을 한다.

“아, 아니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럼 뭐 때문에 그래.”

“그냥…….”

그 미적지근한 대답에 도현은 나지막한 한숨을 뱉었다.

“그냥 뭐.”

“별거 아닌데…….”

유주가 느릿느릿 입술을 열었다.

“비서팀분들 목소리가 자꾸 들리니까 걱정돼서요. 갑자기 막 들어오실 것 같고…….”

“그게 왜.”

“아직 업무 시간이니까……. 제가 여기서 이렇게 쉬고 있으면 오해하실 수도 있잖아요. 조퇴한다고 했는데…….”

비서팀 사람들은 미술관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이었다. 직원들 중 유일하게 6층을 사용하는 사람들이기도 했다. 7층인 그의 사무실에 들어오기란 너무 쉬웠다.

“그런 걱정을 왜 해.”

도현이 건조하게 말했다.

“허락 없이는 못 들어와.”

“아…….”

숨이 막히면서 또 안심이 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rr

……rrr

Rrrrr

잠에 빠진 이유도 그 이상한 평화 때문이었다.

매일 반복되는 악몽에 잠이 부족한 건 일상이었지만 그렇다고 수면욕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낯선 곳에서 잠드는 일은 여태껏 없었다. 오히려 그 어디에서도 잠을 잘 못 자는 편이었다. 잠을 자는 순간 언니를 볼 게 빤하니.

그런데 무슨 일일까. 낯선 공간, 낯선 사람, 낯선 분위기 속에서 잠들었다. 심지어 악몽도 꾸지 않은 것 같은데. 5년이란 시간 내내 선명하게 나타나 저를 괴롭히던 악몽이 처음으로, 악몽이 시작된 이후 최초로 나타나지 않았다.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이 울리지 않았다면 얼마나 더 잤을지 모를 일이었다.

유주가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엄마]



아침과 마찬가지로 표정이 굳었다. 시간이 얼마나 되었는지는 몰라도 커다란 창밖은 어두워져 있었다.

재촉 전화일 게 분명했다. 늦는다고 말했지만 절대 늦어서는 안 되는 날. 수국에 대해 물을 것이다. 하얀 수국은 잘 샀냐고 물을 것이다.

들뜬 엄마의 목소리를 떠올리니 가슴이 뭉근하게 무거워졌다. 너무 무거워 몸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 같았다. 심장을 뜯어 버리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 순간―

“안 받을 거면 꺼.”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박혀 들었다. 소리를 따라 시선을 돌리자 그가 보였다. 잠들기 전 보았던 모습 그대로. 시간이 꽤 지난 것 같은데도 아직 남아 있는 일이 많은지 그는 조금 예민해 보였다.

“…….”

저주다. 유주는 생각했다. 저주가 아니라면 말 한마디의 힘이 이토록 강할 리 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저주에 영원히 사로잡혀도 괜찮을 것 같다는 멍청한 생각을 할 리가 없다. 정말이지 이 정도면 영혼을 팔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조용한 목소리 하나에 온갖 시끄러운 생각이 전부 가라앉을 정도이니.

“정유주.”

그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신경 쓰여. 꺼.”

이번에는 시선을 맞춘 채였다. 전과 같이 명령이었다.

그 엄격한 모습에 유주는 전에 없던 짓을 저질렀다. 핸드폰의 전원을 끄고 엄마의 집착을 외면하는 일이었다.

도현은 그런 유주를 잠깐 동안 응시하다 다시 서류로 시선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