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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 *



유주는 실수를 반복했다. 입사한 지 겨우 한 달인 신입이기는 했지만 타고난 성격이 꼼꼼해 딱히 혼날 일은 없었는데 오늘은 유독 심했다.

회의 시간에 번번이 딴생각을 하고, 상사가 묻는 말에 답도 하지 않기 일쑤였다. 재무팀에 보낼 보고서에 숫자 하나를 빼놓는 일까지 터지자 기획팀의 홍 팀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정유주 씨, 오늘 왜 그래?”

유주의 사수이기도 한 그녀는 기획팀의 엄마라 불릴 정도로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었지만 일에 있어서만큼은 단호했다. 그런 그녀의 눈에 오늘 유주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어디 아파? 평소에 안 하던 실수를 하네.”

정말이지 궁금하다는 듯 묻는 그녀를 앞에 두고 유주는 고개만 푹 숙일 뿐 별다른 변명은 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죽은 언니가 자꾸 꿈에 나온다고, 엄마가 자꾸 내 이름을 까먹는다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5년이란 세월이 흘렀음에도 사고가 일어난 9월이면 어김없이 죄책감에 사로잡혔다. 매일 밤 꿈에 나타나는 언니 덕분에 그날의 기억은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았다. 언니는 상처받은 얼굴을 하고 있었고, 저는 잔인했다. 끝끝내 언니를 위로하지 못했고 언니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기는 하지만 만약 그날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언니의 죽음을 막았을 것이다.

언니가 매일 밤 꿈에 나타나 원망하는 얼굴을 할 거란 걸 알았다면, 엄마가 언니의 빈자리를 견디지 못하고 미쳐 버릴 줄 알았다면, 거울을 볼 때마다 언니의 얼굴이 보일 줄 알았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언니의 죽음을 막았을 것이다.



* * *



“찾으시는 꽃 있으세요?”

오전 내내 엉망과도 같은 시간을 보낸 유주는 점심시간이 되자 입맛이 없다는 핑계와 함께 꽃집으로 향했다.

“수국이요. 하얀색으로요.”

“수국은 한여름에 피는 꽃이라 지금 날씨에 최상급은 없는데, 괜찮으세요?”

유주는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포장은 어떻게 해 드릴까요?”

“리본 하나면 충분해요.”

기다리는 동안 조용한 눈으로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색색의 꽃들이 하나, 둘― 그중 아주 새빨간 무엇이 눈길을 끌었다.

“예쁘죠?”

눈치 빠른 점원이 웃으며 말했다.

“작약이에요. 꽃잎이 크고 화려해서 관상용으로, 특히 부케로 많이 쓰여요.”

“아―”

예쁘다. 속으로 감탄을 했다. 언니라면 싫어했을 꽃이다. 눈이 아프도록 빨간 색도, 나풀나풀 가벼운 꽃잎도 유하의 취향으로는 다 아웃이었다.

그러나 유주의 눈에는 그것이 그것대로 예뻐서, 수국처럼 얌전하지 않은 것이 유독 예뻐서 눈이 갔다.

“키우기도 쉬워요. 햇빛을 많이 받을 필요가 없거든요.”

“그래요?”

“햇빛을 싫어하는 건 아닌데 그늘진 곳에서도 잘 자라요. 그래서 그런가, 꽃말이 재미있어요.”

“뭔데요?”

점원이 방긋 웃는 얼굴로 수국을 건넸다.

“부끄러움이요.”

그 순간, 하얗기만 한 수국이 괴물처럼 변한다. 심장이 둥, 둥, 귓가에 들릴 정도로 뛰기 시작했다. 약을 먹으면 뭐 하나. 새벽에 두 알, 아침에 두 알, 총 네 알을 먹었는데도 심장은 널뛰었고 머리는 부서질 듯 지끈거렸다.

벌을 받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을 한 점원이 제게 벌을 내리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하라고. 너는 계속 부끄러워해야 한다고.

그저 꽃말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저 그늘에서 잘 자라는 것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괜한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다.

그늘에서 피는 꽃. 그늘에서 피는 화려한 꽃.

여름 햇살 밑에서 자라는 수국과 그늘진 곳에서 자라 부끄러움이라는 꽃말을 가진 작약을 무엇과 무엇에 대입했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다.

“하…….”

유주는 깨질 듯한 두통에 앓는 소리를 냈다. 꿈에서 보았던 언니의 어여쁜 얼굴이, 붉게 물든 눈동자가 자꾸만 떠올랐다.

심장이 무겁고 빠르게 뛰었다. 떨리는 손으로 안정제를 찾았다. 오늘은 세 번을 먹어도, 아니 그 이상을 먹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

그런데 주머니 속이 비어 있었다. 아침에 엄마와 전화를 하며 손에 쥐었던 것이 떠오르고 뒤이어 식탁 위에 올려놓은 것이 생각났다. 젠장. 수국 다발을 빼앗듯 낚아채고 관자놀이를 짚었다. 사무실에 비상용으로 둔 안정제가 남았던가.

머리가 둥둥, 울리고 심장은 쿵쿵, 뛰었다. 공황이 올 신호였다. 하이힐을 신은 발이 아프든 말든 걸음을 재촉했다. 울컥, 겹겹이 쌓인 응어리가 차오르려고 할 때마다 눈을 감았다.

“하아……. 하…….”

미술관 로비에 도착한 뒤에도 숨은 거칠어지기만 할 뿐 얌전해지지 못했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을 찾아야 했다. 텅 빈 휴게실이나 탕비실, 아니면 화장실이라도. 어디든 좋으니 바들대는 몸을 구겨 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 진정할 공간이 필요했다.

“아―”

유주의 눈이 도드라지게 굳어졌다.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기획팀 사람들 때문이었다. 아직 점심시간이 한참이나 남았는데 왜.

의문을 다 끝내기도 전에 다리를 움직였다. 이대로 그들을 마주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할 자신이 없었다. 눈물을 참느라 핏발이 섰을 눈이나 안정제를 먹지 못해 떨고 있는 손과 같은 것들을.

“도망, 도망가야 해…….”

판단과 행동은 빨랐다. 유주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빠르게 비상계단을 올랐다. 1층부터 3층까지는 전시 공간이니 안 돼. 4층부터 5층은 사무 공간이니 더더욱 안 돼.

그렇게 쫓기듯 오른 곳이 6층과 7층 사이의 계단이었다. 아무도 오르지 않는, 리연에서 가장 높은 곳.

“하아, 하…….”

무너지듯 주저앉고 나서야 숨을 몰아쉬었다. 비상용 안정제를 찾을 새도 없이 도망친 터라 떨리는 손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바닥이 흔들리는 것처럼 보였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곧 무너질 것 같았다. 무릎을 끌어안고 고개를 박은 채 눈을 감았다. 지금 보이는 건 진짜가 아니야, 전부 가짜야, 중얼거리며.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비참하게나마 살겠다고 입을 뻐끔거리는데 답답한 공기는 도무지 폐를 채우지 못했다. 코가 따끔거리고 목이 조였다. 헉, 헉, 거친 숨이 쏟아졌다.

와중에 수국이 다칠까 무서워 멀리 내려놓았다. 그러다 그것이 또 서러워 울음이 터졌다. 저는 망가지고 그을리는데 홀로 핀 수국은 아름답기만 해서, 그것이 못내 서러웠다.

“흐읍, 흑…….”

입을 틀어막고 흐르는 소리를 막았더니 끅끅, 좋지 않은 소리가 샜다.

“나는……. 흐윽…….”

나는 부끄럽지 않아.

차마 나오지 못한 말이 억울했다.

“언니는 정말…….”

미워. 정말 미워.

부들대는 손으로 머리칼을 헝클이며 괴로워했다. 그러다 또 제 머리칼을 쥐던 언니 손가락이 떠올라 다시 울컥―

“아니, 아니야. 안 미워. 미안해. 내가 정말…… 내가 미안해.”

원망으로 시작했지만 미안하다는 말로 끝나는 고해는 익숙했다. 언니가 스스로 죽음을 향해 뛰어든 것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몰아간 것은 저였다. 그런 탓에 저는 언니를 미워할 수 없었다. 저는 언니 때문에 엄마와 아빠, 그림을 잃었지만 언니는 저 때문에 삶을 잃었으니.

“미안해……. 내가, 내가 미안해.”

그때였다.

“뭐가 그렇게 미안해.”

아무도 없어야 할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몸이 발작했다.

아무도 없었는데.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누, 누구…….”

고개를 돌리며 주위를 살피니 시야가 핑 돌았다. 바닥과 천장은 여전히 흔들리는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올려다본 난간에 검은 형체가 보였다.

“안녕―”

낮고 고요한 목소리. 검은색 슈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인영이 익숙한 듯 낯설게 서 있었다.

“아…….”

“여기서 뭐 해.”

낮은 목소리가 비상구 안을 울렸다. 목소리와 함께 하얀 담배 연기가 자욱하게 깔리고 석고상처럼 하얀 얼굴은 그림자 밖으로 벗어나 존재감을 드러냈다.

“……대표님?”

최도현. 리연 미술관의 젊은 주인이자 유주의 고용주. 그렇다고 익숙한 사람은 아니다. 한낱 신입 사원인 유주가 대표씩이나 되는 그와 가까이 일할 기회는 많지 않았으니까. 고작해야 면접 때 한 번, 기획 회의 때 몇 번 마주한 게 다였다.

그런데 조금 낯선 기분이 들었다. 그가 담배를 피웠던가. 아니, 그보다 안녕―이라니. 그가 저에게 반말을 한 적이 있던가. 누구에게나 존댓말을 쓰는 그는 기본적으로 어려운 사람이었다. 말 한마디 거는 것이 어렵고, 눈 한번 마주치기가 두려운.

“환각인가…….”

심장은 터질 듯이 뛰고 머리는 깨질 듯이 아픈 와중에 낯선 분위기를 풍기는 그는 울렁이는 바닥처럼 환각 같았다. 무엇보다도 홀로 단단하게 선 모양이 특히나. 땅이 뒤틀리고 천장이 흔들리는 와중에 그는 조금의 미동도 없다. 모든 것이 불안하게 뒤틀리는 곳에서 그는 꿈처럼 홀로 단단했다.

웃는 그가 보였다. 여유로워 보이는 모양새에 절로 두려운 기분이 들었다. 문득, 그의 유명세의 반은 외모 때문이라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의 특별한 외모야 면접 때부터도 감탄했던 것이지만 이런 곳에서, 이런 때에 마주하니 더욱.

회의하다 곁눈질로 훔쳐본 그는 조금 차가운 인상의 미인이었다. 임원 면접을 보기 전 그에 대한 사전 조사를 하기 위해 인터뷰가 실린 잡지를 본 적이 있었다. 잡지사 에디터는 그의 외모를 보고 ‘스트라차의 베일 쓴 조각을 떠올리게 한다’는 말로 묘사했다. 조금 과장된 것이겠거니 했지만 실제로 그를 마주하는 순간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베일 아래 웃고 있는 미인이었다. 한평생 햇빛이라고는 마주한 적 없는 사람처럼 매끈하고 하얀 피부가 특히나. 그 위에 그려진 눈은 쌍꺼풀 없이 길게 난 모양이었다. 섬세하고 고운 자태인 건 확실했지만 눈살이 워낙 날카로워 스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게 유독 서늘해질 때면 몸을 떠는 직원이 있을 정도였다.

그 긴 눈을 따라 시선을 옮기면 선명하게 자리한 눈물점이 또렷했고 그것을 감싸는 눈 주변은 매번 울기라도 한 것처럼 붉었다. 새카만 눈동자와 어우러지는 붉은 눈가를 바라보고 있다 보면 괜히 위험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어쩌다 한 번씩 웃을 때면 가늘게 접혀 부드럽고 기묘한 인상을 남겼다.

한마디로 지독하게 아름답고 관능적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눈도 비상계단의 어두운 조명 아래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그저 안광을 밴 눈동자가 선연히 돋보였다. 까맣고 또 까만.

그는 난간에 기대 느린 몸짓으로 담배를 피웠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모양이 꼭 무언가를 감상하는 것 같았다.

“나 맞는데―”

낮은 목소리와 함께 하얀 담배 연기가 쏟아진다.

“놀라야 할 쪽도 나고.”

도현이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겁이 없는 편인가 봐.”

“…….”

“여기까지 올라와 우는 걸 보면.”

“죄, 죄송해요…….”

긴장으로 빳빳해진 목소리가 거의 속삭이듯 작아졌다.

“괜찮아.”

도현 역시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정유주.”

낮은 목소리였다. 긴 다리로 한 계단, 한 계단 내려오며 그는 정확하게 저를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떨어.”

물으며.

“눈물은 또 왜―”

가까워진 그가 비딱한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