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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1. CSI 그





주말은 언제나 속절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금요일이라 쉬어서 좋다고 생각했던 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벌써 일요일 밤이었다.

‘앞으로 회사 출근 전까지 10시간 전.’

침대 위에 누워 회사 가기 정말 싫다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금요일 저녁에 마음속으로 짰던 팀장님께 예쁨 받기 프로젝트가 생각나 스마트폰을 들었다. 현대인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일이란 언제 어디서든 휴대폰만 있다면 궁금한 것을 물어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검색창에 검색어를 적어 내려갔다.



[‣ 상사에게 이쁨받는 법.]



역시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다. 모든 직장인의 관심사 중 하나인 사회생활 잘하는 법, 상사에게 이쁨 받는 법을 알고 싶어 하는 그 마음에 공감하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글을 클릭했다.



「‘회사’에서 ‘이쁨’ 받는 법」

사회인이라면 모두 공감하는 상사에게 이쁨받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직딩 10년 차 블로거 짱짱이가 오늘 알려 드립니다!




귀여운 이모티콘과 함께 시작된 블로그 글이 나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이건가? 그래, 내 인사가 문제였나? 그치! 월요병! 나도 맨날 월요병 때문에 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인사했는데, 첫 단추부터 잘못이었구나. 일단 꿀팁 하나를 얻었으니 마저 읽어 보자는 생각에 좀 더 스크롤을 내렸다.



[두 번째는 바로 커피 스킬! 우리 직딩 이웃님들 다 아실 거예요! 회사에 다니는 직장인의 필수품은 바로 아아메라는 사실! 커피가 없으면 머리가 깨질 않죠? 상사분께 커피 한잔 어떠세요? 혹은 커피 여기요! 하는 센스 한번 발휘해 보아요!]



와, 이 블로거, 진짜 엄청난 프로 직장인인데?

블로그에 쓰인 글 하나하나에 공감이 갔다. 그 외에도 여러 스킬이 있었지만 일단 한 걸음 한 걸음 해 나가자는 생각에 일단 월요일엔 이 두 가지 스킬을 써 보기로 마음먹었다. 내일 아침에 무조건 평소보다 20분 정도 일찍 일어나서 회사 1층에 있는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는 것이다.

그런데 치밀한 계획을 짜고 나니 다른 걱정이 샘솟았다. 팀장님 것만 사서 대리님이 서운해하시면 어쩌지? 안 그래도 팀장님 한 분께 찍힌 것도 머리 아픈데, 다른 분들께도 찍히면 안 되는데…….

요즘 흑현대사를 쓰며 부쩍 소심해진 건지 평소엔 신경이 잘 쓰이지 않던 김 대리님마저 신경이 쓰여 버렸다. 더불어 다른 팀원들도 하나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의 서운한 눈초리를 상상하니 그래, 팀원 열 명 것 모두 사자, 라고 결심할 수밖에 없었다. 몇만 원 지출이 나가긴 하겠지만, 그래도 그 몇만 원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데 뭐 어떠랴.

오늘은 두 발 뻗고 잠자리에 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웬걸. 자기 전에 스마트폰을 들었더니 그 다양한 기능을 더 써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영상에 쇼핑에 기사까지 보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



어젯밤 그렇게 늦게 잤으니 일이 틀어진 것도 당연했다. 20분 먼저 일찍 일어나려던 내 계획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 출근 시간을 가까스로 맞춰 나갈 수 있었다. 게다가 오늘따라 왜 이리 차가 막히는지, 버스에서 창밖을 바라보며 신호가 걸릴 때마다 괜히 재수가 없다고 욕하며 겨우겨우 회사에 다다랐다.

아침 출근길, 회사 커피숍은 엄청나게 붐볐다. 직장인의 필수품 커피를 사려는 모든 이들이 줄지어 기다리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앞서 줄 서 계시는 김 대리님이 보였다.

“김 대리님!”

나는 조금 큰 목소리로 대리님을 부르며 달려가 환한 미소와 함께 꾸벅 인사를 했다.

“아, 재원 씨 왔어? 오늘따라 힘차 보이네.”

김 대리님은 졸음이 가득한 눈으로 대답하셨고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대리님 많이 졸리세요? 먼저 올라가서 쉬세요! 제가 커피 사 갈게요. 아아메 맞으시죠?”

“오, 재원 씨 웬일? 월요일 아침부터 기분 좋네. 그럼 아아메 부탁해.”

김 대리님은 흡족한 얼굴을 하며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주셨다. 역시 우리나라는 정보 강국이다. 이렇게 바로 좋은 효과를 보리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프로 직장인의 추천답게 인사와 커피가 최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네! 다른 분들 것도 같이 사 갈게요. 혹시 커피 사러 내려오신다고 하면 말려 주세요!”

내 말에 김 대리님은 알겠다는 듯 미소를 띠며 먼저 엘리베이터 쪽으로 올라가셨다. 나는 내 차례가 되자 아이스 아메리카노 다섯 잔과 아이스 라테 다섯 잔을 주문해 양손 가득 커피 캐리어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까 커피를 들고나오며 카페에 걸린 시계를 봤을 때 8시 55분이었으니 올라가면 딱 9시가 될 터였다.

늦지도 않고 다행이라는 생각에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속으로 팀장님께 인사를 잘하자고 다짐하며 10층에 도달하자마자 가벼운 발걸음으로 우리 팀 사무실을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가장 문 가까이 앉아 있는 김 대리님이 나를 먼저 발견하시고 눈짓을 했다. 더 정확히는 내가 아닌 커피를 보시고 눈짓하신 것일 테지만 말이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나는 명랑한 목소리로 팀원분들께 인사를 하며 커피를 들어 보였다. 역시 블로그에서 말한 대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단 한 사람을 빼고 말이다.

“어머, 재원 씨. 커피 사 온다더니 잔뜩 사 왔네!”

이 주임님이 다가와 커피를 들어 주시더니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아이스 라테를 집어 가셨다 그 뒤로도 팀원분들이 하나둘 커피를 자리로 가져가시며 커피 잘 마시겠다는 감사를 표해 주셨다.

그리고 어느덧 내 손에는 커피 두 잔만이 남아 있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두 잔.

나는 나를 포함해 열 명이 맞는데 왜 커피가 남지? 하는 생각에 사무실을 눈으로 훑었다. 그러다가 최 팀장님과 눈을 마주치고 빠르게 그분 데스크를 스캔했다.

‘커피가 없으신데?’

아, 아무래도 오전부터 바쁘시니 가져다드려야 되나? 나는 발걸음을 재촉해 팀장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팀장님 커피요! 혹시 라테 좋아하세요?”

최 팀장님이 잠시 나를 물끄러미 보시다가 고개를 돌려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더니 살짝 입을 여셨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다시 숨이 막혀 오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괜찮았는데, 팀장님 앞에 서자마자 이렇게 또 숨이 짓눌려 오다니. 역시 팀장님이 문제였다.

“난, 차가운 건 마시지 않아. 빨리 일 봐.”

이어진 말에 망치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숨이 짓눌리는 느낌에 코로 공기를 최대한 들이켜며 터덜터덜 자리로 향했다.

아니, 여름에 왜 뜨거운 커피를 마시냐고. 최 팀장 진짜.

정말 이건 상상치도 못한 전개였다. 모두에게 예쁨과 칭찬을 받았는데, 그토록 유난히 바랐던 팀장님께는 정작 그 어느 것도 받지 못하다니. 내 눈앞에 놓인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개가 괜히 원망스러웠다. 책상에 엎드려 울고 싶은 마음을 꾹 참는데, 박 대리님이 의자를 조금 가까이 끌고 와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흠흠, 재원 씨. 팀장님 큰 소리로 90도 인사하는 거 싫어해. 그러니까 다음엔 가볍게, 알았지? 그리고 이거 커피 남아? 나 한 잔 더 괜찮지?”

“아니, 왜 인사하는 걸 싫어하세요?”

살다 살다 이런 인간이 있을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모든 예절의 기본은 인사거늘 인사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 이게 대체 웬 말인가!

“그, 수직적인 조직 사회 싫으시다고…… 조폭이냐고 그러시면서 별로 안 좋아하시더라고. 커피 땡큐!”

하…… 진짜 별사람 다 보겠다. 하필 저런 상사를 만나서 내 사회생활이 이렇게 피곤해질 줄이야. 사실 오늘 커피로 살살 이야기를 풀며 그때 주정 부린 것도 다 사과드리려 했는데, 한 번에 수직적인 조직 사회를 좋아하는 신입이 되어 버렸다.

“진짜 안 맞는다 안 맞아. 후…….”

나는 연신 탄식하며 눈앞에 있는 시원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막혔던 숨이 조금은 풀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직장인들이 커피를 달고 사는 모양이었다. 애써 세운 계획이 틀어져 실망한 내 마음을 아아메가 얼려 준 덕분에, 나는 더 이상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고 컴퓨터 전원을 켤 수 있었다.



**



숨 막히는 회사 생활을 한 지도 어느덧 한 달이 지났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인사 사건 이후로 나는 최 팀장님을 점점 멀리하고 있었다.

최 팀장님은 보통 분이 아니셨다. 인터넷이나 소위 사회에서 먹힐 만한 것들이 전혀 먹히지 않아 나는 팀장님께 예쁨 받기 프로젝트를 잠시 중단했다. 업무적인 질문이나 보고도 김 대리님께 하며 최 팀장님을 최대한 피했고, 인사는 최소한으로 건넸다. 그 결과, 이제는 눈치를 최대한 덜 보며 퇴근할 수 있었다.

물론 칼퇴근은 한 것은 아니었다. 역시 그건 너무 눈치가 보여서 다수가 일어나는 타이밍을 재빨리 포착해 호다닥 묻어 나가는 걸 택했다. 여전히 부딪칠 일이 많았고 이래저래 안 볼 수는 없는 분이라 종종 숨이 막히긴 했지만 전보다는 한결 나았다.

하지만 오늘 큰일이 생겼다. 사건의 발단은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