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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화



응접실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로이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는 의원을 불러와라. 부인 몸 상태가…….”

“공작님, 부인은 제가 모실 테니 그만 들어가 보시지요.”

“…….”

“예법 선생입니다. 공작님의 은혜로 덕을 보는 더부살이 자작 부인이죠. 사실 진짜 귀족도 아니고요.”

살살 웃으며 속삭이는 로이드의 말에 반박하고 싶었지만 클레르건 공작은 막상 입을 떼지 못했다.

지금은 하녀나 시종에게 명령해도 되는 일이었다. 단지 예법 선생일 뿐이니까.

더구나 귀족도 아니고, 슬럼가 여인이었다. 응접실 안에 있는 트린 영애를 챙기고, 마땅한 손님 대접을 소홀히 하면 안됐다.

“부인을 모시고 가거라. 의원을 부르고 부인의 상태가 호전되는지 내게도…….”

“공작님, 염려 마십시오. 부인을 살피려고 제가 있는 거니까요. 그럼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클레르건 공작은 르네의 가녀린 팔과 허리에서 손을 놓았다.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무게감과 온기가 왠지 허전했다. 천천히 걸어가는 르네와 하녀, 시종을 보며 클레르건 공작은 몸을 돌렸다.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응접실 손잡이를 향해 손을 뻗다가 잃어버린 온기를 잡는 것처럼 허공을 움켜쥐었다.



“마리, 의원을 불러와라.”

“네? 네. 로이드님.”

응접실 밖으로 나온 르네는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오랜 시간 앉아 있느라 굳은 근육과 예전 기억으로 엉망이 된 마음을 추슬렀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기다란 복도를 걷고 있었다.

“르네,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어디가 불편해?”

“…….”

“방으로 가는 길이니까 조금만 참아 봐.”

“로이드.”

“세르반이 시켜서 임산부에 관해 공부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의원은 아니니까 조금만 기다려. 마리가 의원을 찾으러 갔어.”

“로이드.”

“응? 많이 힘들어?”

“아직도 차 냄새가 나. 그 냄새 때문에 숨을 못 쉬겠어. 나를…… 날, 밖으로 데려가 줘.”

로이드는 멈칫했다.

물에 섞인 듯 흐릿하게 존재감을 죽이던 르네였다.

누구를 만나도, 무엇을 해도 두드러지지 않게.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티 나지 않게 굴던 여자였다. 사색이 되어 떨고 있는 모습을 보니 낯선 마음이 들었다.

“……괜찮아. 정원으로 데려가 줄게.”

걱정스러운 마음을 담아 르네를 붙들었다.

르네는 늘 앉던 아름드리나무 그늘 아래에 앉아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정원으로 나와서 시간이 제법 흘렀으니 로이드가 모두 돌려보냈겠지.’

데이나 영애는 순수한 의도였고, 자신이 아는 사촌 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차향을 맡는 순간, 원치 않는 기억과 감정이 쏟아져 감당하기 어려웠다.

문득 첫 남편이 생각났다.

‘좋은 남편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는데.’

때늦은 배신감이 몰려왔다. 아무리 후계가 중요하다지만 앞에서는 다정한 남편이 뒤에서는 사촌 누이와 그런 사이일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살아가는 게 벅차서 상처받을 시간도 없었다.

나뭇잎 사이로 쏟아지는 햇빛을 멍하니 바라봤다. 한참 동안 반짝이는 빛을 보고 있으니 복잡한 생각들이 점점 사라졌다.

두근거리던 가슴이 진정되고 한결 편안해진 르네는 눈을 감았다.

등받이 뒤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이 바람을 따라 살랑살랑 흔들렸다. 그렇게 눈을 감은 르네는 해가 저물도록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



서류를 보던 클레르건 공작은 어두워진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르네의 창백해진 얼굴이 자꾸만 생각났다.

예법이 몸에 밴 것처럼 익숙한 사람이었다. 그런 여자가 함께 자리한 사람들의 존재마저 잊어버리고, 뜨거운 찻물이 손에 튀는 줄도 모른 채 사색이 되어 앉아 있는 모습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힘들면 자리를 피하면 되는데 미련하게 앉아서…….’

점점 불러 오는 배를 볼 때마다 그녀의 가녀린 몸이 더 위태로워 보였다. 알 수 없는 초조함 때문에 클레르건 공작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 별관으로 향했다.

별관 근처에 다다르자 가느다란 선율이 들렸다.

소리를 따라 도착한 곳은 낮에 왔던 응접실이었다. 열린 문틈으로 창가에 서 있는 르네를 발견했다. 한쪽 어깨와 조그만 턱 사이에 피들을 고정시키고, 활을 들어 연주 중인 르네의 모습은 우아했다.

감탄도 잠시,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머리카락과 치맛자락이 문득 전부 바람에 휩쓸려 버릴 것 같았다. 붙잡아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문을 밀고 한 걸음을 내디뎠다. 작은 움직임을 예민하게 알아차린 르네가 고개를 돌렸다.

“공작님?”

“……여기 있었소?”

“이 시간에 어쩐 일이세요? 아, 기분 전환에 좋을 거라며 로이드가 피들을 줬어요.”

걱정과 다르게 산뜻한 목소리였다.

밝게 웃으며 말하는 르네를 보자 클레르건 공작은 머뭇거리다가 좀 더 응접실 안쪽으로 들어왔다.

“몸은 괜찮소?”

“네. 한결 좋아졌어요. 아이가 이 정도 크면 입덧은 대부분 사라진다는데 아직 증상이 남았었나 봐요. 데이나 영애가 준 차는…… 무척 향긋했지만 당분간은 마시기 어려울 것 같아요. 로이드를 시켜 감사 선물을 전하라 했으니 염려 마세요.”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르네는 평소보다 사근사근한 말투였다. 복잡한 마음을 감추려고 그랬지만 공작이 알 수는 없었다.

클레르건 공작은 트린 영애를 염려해서 방문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새삼스럽게 다시 찾아온 이유를 설명할 수 없어서 그저 입을 다물었다.

“공작님, 오랜만에 피들을 켜니 생각보다 기분이 좋아지더라고요. 혹시 한 곡 들려드릴까요? 로이드가 굉장히 좋은 피들을 가져와서 울림이 좋아요.”

“피들은 어디서 배웠소?”

“피들은…… 오라버니에게 배웠죠.”

“오라버니가 있소?”

“……있었죠.”

르네는 흐려진 인상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값비싼 악기였다. 선생을 구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클레르건 공작은 의심하는 대신 르네를 걱정했다. 아픈 곳을 건드린 것 같아 실수했다고 생각하며 황급히 자리에 앉아 연주를 부탁했다.

아름다운 선율을 구사하는 르네의 연주 실력은 놀라웠다.

피들을 고정하는 손의 소매가 흘러내려 가느다란 손목이 드러났다. 눈을 지그시 감고서 줄을 켜는 모습은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집중하느라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입술을 깨문 그녀는 누구보다 고상하고 아름다웠다.

오랜만의 여유를 느낀 클레르건 공작은 자연스럽게 눈을 감았다. 연주를 마친 르네는 감상에 젖어 여운을 느끼는 공작을 보고 다른 곡을 연주했다.

그날 밤 별관 주변에는 피들의 부드럽고 아름다운 선율만 가득했다.



***



공작저에서 지낸 지 세 달이 넘었다. 세르반은 만나 볼 수 없었지만 로이드를 통해 소식을 들었다.

사회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는지, 지골로 거리 정리와 건축을 중심으로 슬럼가를 개선하느라 바빴다.

‘어깨를 다친 줄 알고 걱정했는데…… 대체 누구 피를…….’

르네는 깊이 생각하는 일을 멈췄다.

로이드는 세르반의 지원을 마음껏 누리라고 했지만, 어딘가 의문스럽고 과한 구석이 많았다.

‘출산까지 책임진다고 하니까 조금만 쉬다가, 나중에…….’

다만 지금의 평온함을 잠시라도 누리고 싶어서 얼마간은 모르는 척하기로 했다.

로이드는 어디서 구했는지 여름에만 먹을 수 있는 베리들을 잔뜩 구해서 왔다.

르네의 배가 나올수록 가슴도 같이 부풀었는데, 음식을 먹을 때마다 가슴과 배 위에 자꾸 떨어져서 민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베리 종류를 먹고 난 후에는 늘 배 위에 베리 과즙이 떨어져, 그때마다 마리의 한숨 섞인 타박을 들었다.

그날도 다른 주인에게 그런 소리를 하면 채찍질 맞을 거라고 다시 한번 주의를 주던 찰나였다.

에드워드 클레르건과의 만남은 우연이었다.

“마리, 찻물을 조금만 식혀서 우려내면 훨씬 맛이 좋단다.”

“아! 알겠습니다. 부인.”

마리는 특유의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찻물이 식도록 기다렸다.

르네는 테이블 위에 잔뜩 오른 달콤한 먹거리를 빤히 쳐다봤다.

프레오를 통해 수도 내 유명한 디저트 가게에서 사 온 음식들로 넘쳐났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불편한 기색을 보이니 공작은 연주를 들려준 대가라고 했다.

벌써 일주일도 지난 일을 꺼내서 의아했지만, 어색한 표정으로 감사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공작에게 이까짓 디저트 문제도 아니지. 그래, 부담스러워 말고 받자.’

작은 설탕 쿠키를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입 안에서 사르르 녹는 감촉을 즐기고 있을 때, 부스럭 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렸다.

에드워드의 첫인상은 레이먼 클레르건 공작의 축소판이었다.

낮은 풀숲에서 삐죽이 내민 머리는 진회색 빛이 돌고, 공작처럼 진한 푸른빛의 눈동자였다.

“혹시 그거! 베릴루드 거리에서 파는 디저트 맞아요?”

“음…… 포장 끈에는 그렇게 적혀 있네요.”

여전히 얼굴만 내민 에드워드는 살아 있는 화초 같았다. 그 모습이 우스워 입을 꾹 다물고 있는데 아이는 침을 꿀꺽 삼키며 르네를 살폈다.

“저도 하나 먹어 봐도 되나요? 그 살구 타르트는 처음 보는데…….”

“그러지 말고 여기 앉아요.”

선뜻 자리를 내어 주자 에드워드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벌떡 일어섰다. 단정했을 옷과 머리에 지저분한 흙과 초록 잎들이 달려 있었다.

“아이참, 도련님. 이 지저분한 꼴로 다니셨어요?”

“마리.”

“이래서는 풀을 먹는지 쿠키를 먹는지 모르겠어요.”

불러도 대답 없는 마리를 보고 르네는 이마를 짚었다. 저러다 언제 큰코다치지.

마리는 호들갑을 떨며 에드워드의 옷에 묻은 것들을 털어 냈다. 에드워드는 눈앞의 디저트에 정신이 팔려 그저 침만 삼켰다.

“여기는 어떻게 오셨어요?”

“네? 워, 원래 역사 수업이 있었어요. 너무 지루하고 힘들어서…… 선생님이 오기 전에 몰래 나왔는데 달콤한 냄새가 나서…….”

“원하시면 챙겨 드릴게요. 사실 공작님이 보내 주신 거라서 공자님이 드셔도 괜찮아요.”

“우와! 정말! 흠, 흠…… 감사합니다. 아일레스 부인.”

르네는 서툰 예법을 구사하는 에드워드를 보고 웃지 않으려고 애썼다.

표정이 드러날까 봐 눈만 빼놓고 두 손으로 입을 가렸다. 예법을 잘 지키는 도련님께 감격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는 스스로 뿌듯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부끄러워 몸을 배배 꼬았다.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참았던 웃음을 터뜨렸다.

“풋.”

“부인?”

의아함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아이의 모습마저 사랑스러웠다.

“죄송해요.”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에드워드를 껴안고 등을 토닥였다.

“세상에, 예법에 맞게 너무 잘했어요. 공작님이 보시면 자랑스러워하시겠어요.”

“그, 그래요?”

“그럼요.”

에드워드는 가끔 마주치는 다른 귀부인들과 달리 고개를 한껏 젖히고 웃는 르네를 빤히 올려다봤다.

동그란 배도 신기했지만 멋진 도련님이라는 르네의 칭찬이 듣기 좋았다. 재스민 향을 풍기는 포근한 품도 마음에 들어서 슬그머니 르네의 등 뒤로 팔을 둘렀다.

엄마가 안아 주면 아마 이런 느낌일 거라고 생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