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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무슨 일이지?”

저택을 지키는 기사가 낯선 이를 보고 경계했지만 르네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저택의 위치도 그대로였지만 낯익은 기사나 사용인들을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가 셀리움 백작가인가요?”

“셀리움?”

“네. 셀리움 백작님 계시나요? 아르윈 도련님은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여기는 보르텐 백작님의 저택이다.”

“네? 하지만…….”

“네가 기웃거릴 만한 곳이 아니니 그만 물러나라.”

“아, 잠깐만요! 저희 언니가 셀리움 백작가에서 하녀로 일하고 있어요.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소식을 전하러 왔는데…….”

“쯧, 글쎄 여긴 아니라니까.”

“아뇨, 언니가 설명해 준 건물과 똑같아요. 정원에 물망초 꽃도 가득하고, 저택 뒤에 사냥터가 있는 것도 같아요. 분명히!”

“그만! 제국에 셀리움이라는 가문은 없다. 네 사정은 딱하지만 네가 잘못 알았거나, 언니가 거짓말을 했겠지.”

“하지만…… 분명히 여기가 맞는데…….”

르네는 점점 자신 없는 목소리를 냈다. 기억 속 저택의 모습과 위치는 똑같은데, 셀리움이라는 가문이 없다는 기사의 말이 거짓말 같지는 않았다. 고개를 빼고 저택 안을 보려고 하자 기사가 거칠게 밀어 냈다.

“윽.”

금세 눈물이 맺힌 르네를 보고 기사도 과한 듯싶어 한결 수그러진 목소리를 냈다.

“애초에 없는 가문을 찾고 있으니 네가 찾는 사람도 여기 없다. 계속 얼쩡거리다가 괜한 오해를 받으면 너 같은 아이 하나 사라지는 것은 일도 아니니 어서 가거라.”

무서운 말이었지만 기사 나름대로 해 주는 조언이었다. 르네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나며 몇 번이나 뒤를 돌아봤다. 후작가에 돌아와서 며칠 동안 주변에 물어봤지만 모두 한결같은 대답이었다.

“셀리움?”

“야, 수도에 그런 가문이 있었나?”

“없어. 제국에 백작 가문이 몇 개나 된다고 그걸 몰라?”

이곳에는 부모님도 아르윈도 없었다. 익숙한 거리와 제국의 정세, 모든 것이 그대로인데 르네를 아는 사람만 전부 사라진 것 같았다. 르네의 존재를 설명할 수 있는 그 무엇도 찾을 수 없었다.



도노반은 르네가 건넨 손수건을 물끄러미 보다가 뭔가 깨달은 듯 웃었다.

“물망초?”

“한눈에 알아보네요. 색실이 많지 않아 생각만큼 예쁘게 되지 않았어요.”

물망초는 셀리움 백작가의 문장이었다. 르네는 평범한 자수를 놓으면서 누구도 알지 못하는 삶의 흔적을 남기고 기억했다.

“솜씨가 좋구나. 르네, 고마워. 무척 마음에 들어.”

어느덧 후작가에서 일한 지 5년이 흘렀다.

고된 허드렛일이 익숙해지면서 르네는 예전보다 억척스러워졌다. 누가 시비를 걸면 머리채를 잡고 싸우기도 하고, 그런 날 밤에는 혼자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지만 주어진 신분과 환경에 완벽하게 적응했다.

시기하던 사용인들도 줄었다.

사실 후작 영애의 매운 손맛을 본 하녀들이 하나둘 늘어난 탓이 컸다. 르네를 향한 동정 어린 시선과 동질감이 신세가 나아지는 데 한몫했다.

“르네, 내가 네 울타리가 되어 줄게. 나와 혼인하지 않겠어?”

“도노반, 솔직히 남자를 믿기 힘들어요……. 결혼해서 함께 살아갈 자신도 없고요.”

“괜찮아.”

“네?”

“억지로 맞춰 주지 않아도 괜찮아. 마음을 주기 힘들다면 기다릴 수 있어. 평범한 부부처럼 지내지 않아도 괜찮아. 그냥 널 지킬 수 있는 위치면 좋을 것 같아.”

“도노반은 아내와 친구처럼 지낼 수 있어요?”

잠시 머뭇거리던 도노반은 다정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어차피 혼인할 생각은 없었어. 누군가와 혼인한다면 그게 너라면 좋을 것 같아. 적어도 너에게는 도움이 되겠지.”

남편에게 배신당한 기억과 정체성의 혼란 때문에 르네는 타인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어려웠다.

도노반은 늘 일정하게 선을 긋는 르네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다정했고 친절했다. 항상 혼자라는 생각으로 외로웠던 르네는 조금씩 흔들렸다.

그 해 두 사람은 혼인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임신 사실을 알았다.

“……설마 한 달 전에.”

한 달 전 후작의 생일 연회가 있었다. 사용인들도 풍성한 음식과 술을 제공받고 함께 먹고 마시며 즐겼다.

취한 줄도 모르고 마시던 르네와 도노반은 평소처럼 방에 들어가서 잠들었다.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두 사람은 알몸이었다. 르네는 기억도 나지 않아서 무척 당황했지만 남녀 관계에 무지하지 않았다. 더구나 부부 사이였으니 유난스럽게 굴지 않았다.

“세상에, 진짜 아이가 생겼어!”

담담히 받아들인 그 밤이 뜻밖의 선물로 돌아와서 너무 기뻤다. 후작 부인일 때 도통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 마음고생을 했는데, 엄마가 된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르네는 벅찬 가슴을 붙잡고 도노반을 찾아 나섰다.

“르네.”

“시녀장님? 혹시 도노반을 보셨어요?”

“여기 있었구나. 따라와라.”

“시키실 일이 있나요?”

“아니, 아가씨께서 부르신다.”

“지금요? 아…… 네.”

당장 소식을 전하지 못해 아쉬웠지만 시녀장의 뒤를 따랐다.

“아가씨, 부르셨어요?”

“문을 닫아라.”

“아가씨?”

“건방진 것! 은혜도 모르고, 분수도 모르는 것!”

“아! 아가씨, 아흑!”

갑자기 매서운 채찍질이 시작되었다.당황한 르네는 본능적으로 배를 감싸 안고 엎드렸다.

“주제도 모르고 내 약혼자를 희롱해?”

“무슨 말씀이세요? 으흑! 아가씨, 제발! 흐윽, 정말 아니에요.”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는데, 어디서 거짓말이지!”

살이 찢어지는 고통에 저절로 눈물이 흘렀다. 사실이 아닌 일로 매질을 당하니 무척 억울했지만, 혹시나 아이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르네의 입에서 변명과 사죄의 말이 쏟아졌다.

“윽! 아가씨, 오해하신 거예요! 제가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전부 오해…… 악!”

사실이 아니라고 말할수록 영애의 화를 돋우었다. 영문도 모른 채 맞던 르네는 어렴풋이 짐작 가는 일이 생각났다.

며칠 전 시중을 들다가 영애의 약혼자와 잠시 마주쳤는데, 흘깃대는 시선이 찜찜했지만 크게 염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것이 화근이었다.

“주제도 모르고 어디서 함부로 엉덩이를 흔들어!”

“아악! 아가씨! 아니에요. 정말 저는…… 으흑.”

약혼자의 시선이 르네를 향하자 영애는 자존심이 상했다. 더구나 한낱 하녀였다.

그날따라 영애의 채찍질이 험했고 얼굴을 잘못 맞아 뜨뜻한 피가 눈가를 덮었다. 땀까지 흘려 가며 채찍을 휘두르는 영애를 보자 억울함보다는 서러움이 컸다.

‘무서워. 이렇게 계속 맞으면 죽을지도 몰라. 이제 진짜 끝일까?’

이전의 삶이 너무 생생해서 늘 혼란스러웠다. 르네는 애써 가슴 속에 묻어 둔 과거가 지금 떠올라 두려웠다. 또 죽는 걸까? 또 낯선 곳에서 다시 살아나면 나는 어떻게 하지? 내 아이는?

‘살고 싶어.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그때 벌컥 문이 열렸다. 후작 영애와 시녀장의 호통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흐릿한 시야로 익숙한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도노반…… 아이가…….”

그는 피범벅이 된 르네를 보고 놀란 것 같았다.

르네는 느리게 눈을 깜박이며 전하지 못한 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울 것 같은 도노반의 표정을 보며 의식을 잃었다.



***



이전 삶을 회상하던 르네의 표정은 씁쓸했다. 오랜만에 누운 푹신한 침대도 어느새 감흥이 사라졌다.

“죽는 것도 쉽지 않구나.”

깊은 한숨을 내쉬던 르네는 동그란 배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조금씩 눈꺼풀이 내려앉던 그때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쾅! 타다닥.

‘무슨 일이지?’

단순한 소음이 아닌 것을 느낀 르네는 실내화를 벗고 단단한 가죽신을 신었다.

불안한 표정으로 숄을 걸치고 무기가 될 만한 것이 있는지 살폈다. 방 안에는 차를 마시기 위해 준비해 놓은 찻잔과 찻주전자밖에 없었다.

문밖의 소란과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르네는 찻주전자를 챙겨 문 뒤에 몸을 붙였다. 숨죽이던 찰나, 문이 열리고 낯선 남자의 뒷모습이 보이자 미처 문을 잠그지 않았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아…….”

곧 검은 머리칼의 주인을 알아보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세르……반.”

인기척을 느낀 그가 뒤를 돌아보자 르네는 얼어붙었다. 세르반의 어깨에 흥건한 피를 보는 순간 채찍질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었던 자신의 마지막 모습이 생각났다. 찻주전자를 움켜쥔 손이 덜덜 떨렸다. 세르반은 급히 재킷을 벗어 바닥에 떨어트렸다.

“르네, 아침에 온다고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왔지? 걱정 마, 이거 내 피 아니야.”

“세르반! 세르반!”

“로이드. 시끄럽게…… 아침 식사 정도는 같이 하고 싶었는데 아쉽네. 르네, 아까 챙겨 줬던 가방 잊지 않았지? 그것만 챙겨서 지금 로이드를 따라가.”

“떠나……라고요?”

밖은 점점 소란스러워졌다. 르네는 피범벅이 된 남자가 떠나라는 말까지 하자 불안했다.

“세르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그 꼴은 또…….”

로이드는 떨고 있는 르네와 떨떠름한 표정의 세르반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로이드, 르네 데리고 나가.”

“르네, 들었지? 지금 나갈 거니까 짐 챙겨……시는 게 좋겠습니다.”

로이드는 주인을 대하는 시종처럼 말투를 바꿨다. 세르반은 손을 내밀었지만 흠칫하는 르네를 보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아…… 미안.”

르네의 손에서 관절이 하얗게 되도록 움켜쥔 찻주전자를 떼어 냈다. 세르반은 겁먹은 르네의 얼굴을 붙잡았다.

“르네…… 르네, 르네.”

한숨처럼 뱉는 이름이 애절했다. 세르반은 부드러운 손길로 그녀를 그러안았다.

넓은 가슴에 파묻힌 르네의 떨림이 조금씩 줄어들었다. 여전히 코끝에는 혈향이 스쳤지만, 르네는 자신의 등을 쓰다듬는 손길에만 집중했다.

“걱정 마. 일단 로이드를 따라가면 나중에 내가 갈게.”

“다시……저를 찾아올 건가요?”

“찾는 건 항상 나였으니까, 이번에도 널 찾아갈게.”

말을 마친 세르반은 성큼성큼 문밖으로 향했다. 그 사이 로이드는 가죽 가방을 챙겨 들고 르네 곁으로 다가왔다.

르네는 혼란스러웠지만 세르반을 놓칠까 봐 서둘러 쫓아갔다. 당장 내일 죽더라도 이번 삶에서는 꼭 남편과 함께 이름을 지어 아이를 불러 주고 싶었다.

세르반은 밖에 세워 둔 검을 챙겨 들다가 르네의 기척을 느끼고 몸을 돌렸다. 자연스럽게 피 묻은 검을 가렸다.

“세르반, 아이 이름은요?”

뜻밖의 질문에 세르반의 눈썹이 꿈틀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이내 다정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르네, 아이 아버지는 내가 아니야.”

놀란 르네는 저도 모르게 자신의 배를 붙잡았다.

“아이 이름은 곧 정하게 되겠지. 불안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네가 원한다면…… 그게 무엇이든지 네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어.”

이만 가 봐야 해. 세르반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르네의 이마에 가벼운 입맞춤을 하고 곧장 계단을 내려갔다.

르네는 빠르게 사라지는 세르반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이 아버지가 아니면…….”

“가자, 일단은 남들 눈을 생각해서 구색은 맞춰야 하니까.”

뭐라고 물어볼 새도 없이 로이드는 르네를 안고 곧장 자리를 옮겼다. 몸이 번쩍 들렸지만 르네는 머릿속이 복잡해서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긴 복도를 지나고 시종들만 다니는 계단을 통해 뒷문으로 향했다.순식간에 어두워진 밖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지만 르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달리는 마차 안이었다.

그리고 낯선 남자가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