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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쨍그랑!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는 들고 있던 그릇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또 도망치다가 걸리면 가만두지 않겠어!”

르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산지기 남편은 오전에 귀족들 길 안내를 맡았는데 벌써 술에 취한 것 같았다.

“그동안 네가 도망쳤던 길에는 전부 덫을 쳐 놨으니까 마음대로 해 봐. 그 예쁜 발목이 부러지면 다신 못 도망가겠지!”

“……약속 시간에 늦겠어요.”

“젠장, 너 때문에 또 늦었잖아! 도움 안 되는 여편네 같으니라고.”

서둘러 떠나는 남편을 보며 르네는 한숨을 삼켰다. 이곳에서 눈을 뜬 지 2개월이 지났지만 적응하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지금의 상황은 더욱 예상하지 못했다.

“다시 한 번만 말씀해 주시겠어요?”

점심을 준비하다가 때 이른 인기척에 오두막 밖을 내다봤더니, 정작 돌아온 것은 남편이 아닌 낯선 남자들이었다.

“길 안내를 맡기기로 했는데 술에 취해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하더군. 받은 돈을 내놓으라고 하니까 모두 사용하고 없던데.”

“네 남편이 부당하게 금품을 취했으니 너라도 갚아야지.”

말에서 내린 두 남자는 낡은 오두막집과 르네를 살폈다. 나머지 한 남자는 뒤에서 모든 상황을 지켜보기만 했다. 질 좋은 옷, 제법 값나가는 검과 활을 봐서는 하급 귀족쯤 되어 보였다.

“지불하신 금액을 알려 주시면 전부 갚을게요.”

“하, 이런 산속에서 뭘 해서 갚으려고?”

한 남자가 실소를 흘리자 르네는 선뜻 답하지 못했다. 흐릿한 멍 자국이 남은 눈매가 미세하게 일그러졌다.

“약초를 캐거나 바느질을 하면 전부 다 갚을 수 있어요. 시간은 걸리겠지만 꼭 전부 갚을게요.”

낡고 초라한 옷을 입었지만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녀는 오히려 도도한 인상이었다. 평민답지 않게 매끄러운 피부와 머릿결은 묘한 배덕감마저 불러일으켰다.

세 남자는 잠시 감상에 젖었고, 르네는 그들의 호기심 어린 눈빛에서 익숙한 꺼림칙함을 느꼈다.

“당신 남편은 돈 대신 당신을 데려가라고 하더군. 우리가 왜 여기까지 왔을 것 같아?”

“큭, 하녀로 써먹을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곱네.”

서로 눈빛을 교환하는 남자들을 보며 르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두 남자와 다르게 뒤로 물러서 있던 남자가 그들을 제지했다.

“장난은 이쯤에서 그만두지. 많이 놀란 것 같은데.”

“뭐야, 루션. 이제 와서 착한 척이야?”

“그래, 자네도 이리 와서 자세히 봐. 막상 보니까 재밌을 것 같은데? 겁에 질린 얼굴 좀 봐.”

루션 역시 르네의 첫인상에 놀랐다.

귀족을 대하는 능숙한 태도와 자연스럽게 예를 갖추는 모습은 고위 귀족의 전속 시녀라 해도 손색없었다.

‘몰락 귀족인가? 설마…… 아무리 그래도 이런 산속에서 살지는 않겠지.’

루션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 몸을 돌렸다.

“난 먼저 가 보겠네. 흥이 깨지기 전에 자네들도 그만 돌아가지.”

“뭐? 돈값은 챙겨야지. 그냥 가면 어쩌려고?”

“어차피 적은 돈이었어.”

루션은 르네를 힐끔 쳐다보고 일행에게 얼굴을 돌렸다.

눈가의 멍과 허름한 옷에도 불구하고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시선을 끄는 미모였다. 하지만 그는 귀족이었고, 사람들의 눈이 있는 곳에서는 자신의 고귀함을 버릴 생각이 없었다.

“시종이 다른 길잡이를 데려오는 길이니 서두르지.”

먼저 말에 올라탄 루션은 잠시 르네에게 눈길을 주었다가 곧장 말머리를 돌렸다. 시선을 교환하던 두 남자가 르네를 흘깃거리며 망설이던 그때였다.

“어! 멈춰!”

“이봐! 거기 서!”

르네는 한눈을 파는 남자들을 피해 무작정 달려 나갔다. 머리 위로 높이 자란 풀숲에 몸을 숨기려 했지만, 오히려 사냥하러 온 그들의 가학심을 자극했다.

“쉿.”

최대한 숨죽인 르네도 흔들리는 잎줄기는 어쩔 수 없었다. 미세하게 흔들리는 풀숲을 가리키자 다른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활을 든 남자가 풀숲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푹.

“흐윽!”

르네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뚫고 나온 화살촉을 매만졌다. 처음 겪는 통증에 피가 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괜찮아. 여길 벗어날 수 있어, 괜찮아.’

돈 대신 팔려 간 하녀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 너무 잘 알았다. 나뭇가지에 스친 뺨의 생채기가 쓰리고 몸이 떨렸다. 하지만 도망치기 위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아악!”

얼마 가지 못해 주저앉은 르네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흐느꼈다. 허벅지에 깊이 꽂힌 화살 주변이 순식간에 뜨거워졌다.

‘이렇게 죽으면…… 이제는 끝일까.’

이를 악물고 한쪽 팔꿈치를 세워 옆으로 기어갔다. 자신을 쫓는 남자들에게 발견되는 것보다, 지독한 통증과 출혈보다, 다시 살아나는 일이 두려웠다.

붉게 물들어 가는 드레스와 축축한 어깨를 보다가 근처 나무에 몸을 기댔다. 울음이 터지려는 눈을 꼭 감고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괜찮아, 괜찮아…….’

하녀로 데려갈 생각이라고 했으니 고분고분 말을 들었다면 아무 일 없었을까. 남자들의 거북한 눈빛이 익숙해서 순간적으로 도망친 일이 잘못된 판단이었을까.

점점 가까워지는 인기척을 느끼고 서둘러 눈물을 닦았다. 그때 풀숲에서 장신의 남자가 툭 튀어나오자 놀란 르네의 입이 작게 벌어졌다.

“하아…… 찾았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는 걸음으로 다가온 남자는 흑발에 금안을 가진 독특한 인상이었다.

르네는 조금 전에 봤던 남자들에게 일행이 더 있었나 생각하다가, 남자의 손에 들린 피 묻은 검을 보고 움찔했다. 시선을 느낀 남자는 들고 있던 검을 아무렇게나 뒤로 던졌다.

르네의 피에 젖은 어깨와 허벅지를 보고 얼굴을 굳히더니 곧 다정한 목소리를 냈다.

“르네, 돌아가자.”

새로운 삶을 시작할 때마다 낯선 사람들을 대하는 처세술은 늘었지만 여전히 껄끄럽고 어려웠다. 입을 꾹 다물고 쳐다보자 그는 한쪽 무릎을 굽혀 몸을 숙였다.

“가자. 네가 있어야 할 곳으로.”

르네는 눈앞에 내밀어진 손과 맞은편의 남자를 살폈다. 남자는 그저 손을 내민 채 기다리고 있었다.

처연한 그 눈빛이 낯설지 않아 머뭇거리며 손을 내밀었다. 그는 다른 손으로 르네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르네, 괜찮아.”

머리를 다독거리는 손길은 제법 다정했고, 붙잡은 손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간단한 응급 처치를 하는 남자를 보며 르네는 쉽게 갈피를 잡지 못했다. 말에 오른 후에는 맞닿는 몸이 신경 쓰여 뻣뻣하게 굴었지만 마음과 다르게 자꾸 힘이 빠졌다.

시간이 흐를수록 묵묵히 말을 모는 남자와 일정한 말발굽 소리가 익숙해졌다. 조금씩 긴장이 풀린 르네는 애써 눈을 부릅뜨다가 어느 순간 스르륵 잠들었다.





1. 새로운 시작



“헉! 제발 때리지 마세요. 배, 배가…… 내 아이! 아이가!”

다시 눈을 뜬 르네는 서둘러 배를 붙잡았다. 동그란 배를 느끼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아직, 아직 살아 있어.’

두 손으로 배를 감싸며 지난 기억을 떠올렸다. 마지막 기억은……

‘건방진 것! 은혜도 모르고, 분수도 모르는 것!’

그때의 생각을 하자 저절로 손이 떨렸다. 후작 영애가 내려치는 채찍질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했다. 죽지 않았다는 안도감과 동시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여기서도 내가 일하던 후작가는 찾을 수 없겠지.’

“바르게 걸어라.”

낯선 중저음의 목소리를 듣고 움찔했다.

긴장으로 굳은 얼굴을 들자 제복을 입은 남자가 르네의 한쪽 팔을 붙잡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이 험상궂게 느껴져 침을 꿀꺽 삼켰다. 누구지.

“이런, 르네. 이제 정신 차렸나?”

뒤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깜짝 놀라 중심을 잃었다. 반사적으로 배를 붙잡았지만 당황한 르네의 걸음이 주춤거렸다. 함께 걷던 남자의 얼굴 위로 못마땅한 기색이 스쳤다.

“메니플은 진통 효과가 있지만 중독성이 있어 좋지 않다. 더구나 아이에게는.”

안절부절못하던 르네의 미간이 구겨지자 팔을 움켜쥔 남자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르네는 눈치껏 남자의 보폭에 맞춰 걸음을 서둘렀다.

“르네, 이곳은 그만 드나들어. 이번에도 로이드를 따라 나왔나?”

친근한 말투에 슬그머니 뒤를 돌아봤다. 웃는 인상과 다르게 귀찮은 기색이라 어깨를 움츠렸다.

‘이 남자들은 누구지. 제복을 봐서는 근위대인데.’

“르네, 오늘은 운이 좋아서 직접 데리고 가지만 우리도 더 이상 간섭 못해.”

“…….”

“세르반이 통제하는 1구역과 여긴 달라. 가뜩이나 항상 부딪치는데 네게 시비를 거는 녀석들을 세르반이 험하게 다루니까 3구역에서도 불만이 많아.”

뒤따라오는 남자는 쉬지 않고 말을 걸었지만 르네는 돌아보지 않았다. 미묘한 표정으로 자신의 배만 쳐다봤다.

‘……내 아이.’

작고 동그란 배를 매만졌다. 분명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날 죽었는데 어느새 아이가 자랐는지 볼록했다. 드레스에 가려졌지만 변화를 알아차리기는 충분했다.

‘이상하다…… 시간이 안 맞아. 설마 그동안 죽음과 삶을 반복한 기억이 그저 내 꿈일까? 이렇게 생생한데 전부 꿈이라니…….’

“3구역이 정리되면 우리 입장에서는 나쁠 것 없지만, 홑몸도 아닌데 앞으로 조용히 지내는 게 어때?”

르네는 최대한 의연하게 굴었지만 심리적으로 많이 지친 상태였다. 눈치를 보느라 별다른 대꾸 없이 순순히 끌려갔지만, 불편한 자세를 참지 못하고 슬그머니 어깨를 비틀었다. 남자의 손이 한결 더 느슨해졌다.

“남편이 있는 곳으로 가는 길이니 그렇게 경계할 것 없다.”

‘남편?’

조심스럽게 남자의 안색을 살폈다. 표정은 없지만 시선이 가끔 배를 향하는 것을 보면 그나마 산모라서 배려하는 것 같았다.

르네는 뒤늦게 주변을 살피고 놀랐다. 고아였던 첫 번째 삶을 살 때 지내던 거리와 비슷했다.

허름한 나무 의자에 앉아 메니플을 태우는 여자들, 다닥다닥 붙은 낡은 건물과 햇빛이 들어도 어두운 길. 낯설지 않은 풍경을 볼수록 자신의 위치가 걱정됐다.

‘다시 살아날 때마다 점점 내 처지가 나빠지는 것 같아. 하녀보다 못한 상황이면 이번에는 대체…….’

신발 밑에서 뭉개지는 느낌이 불쾌했다. 고개를 숙이자 오물로 질척이는 땅이 보였다. 아까부터 코를 찌르는 지독한 냄새의 원인을 찾고 애써 구겨진 미간을 폈다.

골목길에는 지저분한 아이들과 술에 취한 남자들이 넘쳐 났다.

“휘익, 르네. 벌써 가는 거야? 오늘은 새로운 놈들이네.”

“우리는 언제쯤 놀아 보는 거야? 난 언제든 준비되어 있는데, 큭큭.”

희롱이 계속되자 르네의 곁에 선 남자가 매섭게 노려봤다. 소리치던 이들은 모르는 척 입을 다물었지만, 멀리서 부르는 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뒤쪽에서 걷던 남자, 알버트는 넉살 좋게 말을 건네며 르네를 살폈다.

“르네, 아직도 취했어? 대체 오늘은 메니플을 얼마나 태운 거야?”

주변을 흘깃거리는 르네는 언제나처럼 지저분하고 흐릿한 눈빛이었다.

‘이제 정신이 들었나 보군.’

한숨을 내쉰 알버트는 르네의 흐릿한 눈빛이 조금씩 선명해지는 것을 보고 더는 말을 걸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