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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화



기억을 더듬던 엽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이긴 한데 영 가물가물하구나. 한데, 그자가 왜? 무슨 사건에라도 얽혔더냐?”

“아, 아니요. 확실하지는 아니하고…… 저도 어디서 들은 이름 같아서 여쭤본 거였어요.”

“그래.”

다행히 엽은 희가 둘러댄 말을 더 추궁하지 않았다. 희는 살짝 안심하며 때마침 나타난 갈림길을 살폈다.

두 사람이 맡은 사건은 단순했다. 요절한 남편을 따라 자결한 부인이라는, 희로서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미담에 해당되는 일로 종결된 것이다. 어쨌건 덕분에 엽과 가벼운 점심을 들고도 시간이 남아 양해를 구하고 빠져나올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그 점에서는 감사할 일이었다. 여의치 않은 일이 있어 한 번만 살짝 눈감아 주시라는 그녀의 말에 엽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이런 경우 재겸이라면 아무리 양민이라도 다모는 다모, 규정을 철저히 준수해야 한다고 단칼에 잘랐겠지만 엽은 관비도 아닌데 가세에 도움이 되고자 험한 꼴 보고 다닌다며 희를 안쓰럽게 여기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녀로서는 이 일을 할 수 있는 것을 천운으로 생각할 만큼 적성에 맞았지만.

“아니, 어찌 이리 일찍 들어오누?”

“일 때문에 옷 갈아입으려고요.”

일이라는 말로 모친의 호기심을 단번에 접게 한 희는 애용하는 낡은 무명옷을 꺼냈다. 무릎 바로 아래와 발목을 동여매고 제법 그럴듯하게 상투를 튼 머리는 이마에서부터 잘 접은 무명 수건으로 매어 초립을 썼다. 부엌에서 긁어 온 그을음을 손에 묻혀 단장을 끝내자 영락없는 심부름꾼이었다.

이제 그녀의 그런 차림이 익숙한 모친과 찬열의 무심한 눈배웅을 받으며 뒷문으로 나온 희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품 안에는 밤사이 장 속 깊은 곳에 숨겨 뒀던 장도가 헝겊에 싸인 그대로 간직되어 있었다. 낮에 살펴본 그것은 그저 목장도가 아니라, 귀하고 귀하다는 침향沈香장도였다. 향이 희미했기에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일단 확인하고 나자 그녀는 간이 떨려 향이 닳을까 봐 두 번은 더 맡아 보지 못하고 얼른 갈무리했었다.

이걸 돌려줘야 하기 때문이야. 또, 어쩌면 일에 도움이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라고.

희는 아무도 묻지 않은 질문의 대답을 혼자 속으로 웅얼거리며 향월루로 향했다.

느지막한 오후라 기방은 한산했다. 혹여 걸리기라도 하면 정말로 일러 준 이름을 대 버리자고 각오하고 있었건만, 처마 밑 풍경이 보일 때까지 그녀를 이상하게 보거나 불러 세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오히려 맥이 빠졌다.

한가로이 흔들리는 풍경이 있는 별채는 풍경 아래에 청廳이 있고 그와 면한 방이 두어 개 보이는 소박한 곳이었다. 그 오른편 방이라고 했겠다. 그녀는 기억을 되살리며 다가가다가 바로 그 방에서 뜰로 향하는 큰 창이 활짝 열린 것을 보고 멈춰 섰다.

한 사내가 서궤에 기대어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시선을 허공에 두고 있었다.

희는 저도 모르게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얼굴도, 망건에 바지저고리뿐인 느긋한 차림새도 이명원이라 이름을 들었던 간밤 그대로였다. 그러나 생각에 잠긴 눈은 달랐다. 아직은 동장군이 머물러 다소 날카로운 바람임에도 아무렇지 않게 허술한 차림으로 그 바람 다 맞고 있으면서도, 명료한 눈빛만은 한겨울을 보고 있는 것처럼 시리고 서늘했다.

딱 한 번 만났지만 몹시도 낯선 분위기에 자신이 훼방꾼처럼 느껴진 희는 어쩐지 쉽사리 말을 걸지 못했다. 그녀가 망설이는 참에, 그가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득 괴고 있던 손에서 턱을 들고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명원이 불현듯 정색했다. 희를 빤히 바라보던 그는 갑작스럽게 웃음을 터뜨렸고, 덕분에 그를 둘러싼 공기가 일순간에 느긋하고 활달해졌다. 마치 어젯밤처럼. 희는 눈을 깜박거렸다. 당황스러울 만큼 빠른 변모였다.

“대체 그게 무슨 꼴이냐?”

……어?

어색한가? 희는 설마 하고 옷매무새를 다시 한번 살폈다. 고개 숙인 그 위로 그의 웃음 어린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제법 그럴듯하구나. 한두 번 변복해 본 솜씨가 아닌 듯한데, 어미 속 꽤나 썩였겠다. 확실히 부엌데기보다는 위험도 덜하고 삯도 더 받겠다만.”

희의 입이 딱 벌어졌다.

“저가 지금 품 팔러 나온 줄 아셔요? 나리께서 어제 무작정 움직이기 편한 옷 입고 오라 하셔 놓고선!”

“아, 그랬던가?”

아, 그랬던가아? 그녀는 어이가 없어져 눈을 굴렸다. 고개를 옆으로 돌렸는데도 용케 보았는지 그가 다시 웃었다.

“뭐, 좋겠지. 하면 잠시 기다리거라.”

소매가 펄럭이는가 싶더니 창이 탁 닫혔다. 희는 입을 삐죽거리며 보이지도 않는 그를 흘겼다. 다 기억하면서 부러 저러는 거 맞지? 혹 미시에 오라 했을 때도 실은 아무 생각 없었던 거 아니야?

이윽고 마루와 면한 방문이 열리고 명원이 나타났다. 갓과 중치막까지 제대로 갖춘 성장 차림이었다. 저러고 보니 그저 준수한 사내일 뿐 한량 같지는 않으니, 역시 사람은 옷이 날개로다. 희는 속으로 혀를 내두르며 일단 그가 걸어가는 대로 따랐다. 기방 뒷문을 나서면서 흘끔 돌아본 그는 희가 따라오는 것을 확인하고 다시 느긋한 걸음을 내디뎠다.

명원은 마치 한양 모든 길을 다 꿰고 있는 듯 희조차 처음 보는 골목 몇도 이어 가며 거침없이 걸어갔다. 더는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쫓기에 알맞은 걸음이라 그녀는 그가 어느 주막에 들어설 때까지 내내 따라붙을 수 있었다.

“어서 오셔요, 나리.”

밥때가 지나 한가로이 평상에 앉아 있던 주모가 냉큼 반색하며 다가오자 그는 한 손을 들어 점잖게 저지하고 안쪽 방으로 향했다. 비단으로 몸을 감쌌던 간밤과는 달리 평범한 차림이었기에 혹여 사람들 틈에 섞여 조사를 하려나, 기대 섞인 짐작을 했던 희는 실망과 한심한 기분을 애써 숨겼다.

“날세. 들어가겠네.”

명원은 신을 벗으며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물씬 끼쳐 오는 술 냄새에 희는 순간 멈칫했지만 그는 주저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갔다. 따라 들어오라는 듯 문은 열려 있었으나 그녀는 망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머뭇대고 있자니 두런거리는 말소리가 딱 끊기면서 명원이 얼굴을 내밀었다.

“아니 들어오고 멀뚱히 서서 무얼 하느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저어, 그것이…….”

“사람 참, 처자가 불안하지 아니하도록 안심부터 시켜 주어야지. 윽박지르면 쓰나?”

희는 고개를 퍼뜩 들었다.

명원의 어깨 너머, 방 안쪽에서 그녀를 내다보고 있던 큰 체구의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한낮이거늘 퍽 편안해 보이는 망건에 바지저고리 차림을 보니 과연 벗이구나 싶다. 얼굴에 술기운이 불콰해져 있었지만 그녀를 보는 눈빛만은 또렷했다.

“내가 언제? 윽박지른다는 말 뜻이 무언지 모르는가?”

“어, 어찌 아셨습니까?”

명원의 투덜거림이 희의 놀란 목소리에 묻혔다. 구면도 아닌 초면에 이리 쉽게 들키다니. 낭패감에 젖은 그녀에게 사내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 놀랄 건 없다. 고운 처자는 알아보기 쉬우니까.”

“고주망태가 된 줄 알았더니 아직은 상태가 나쁘지 아니하군.”

“몰랐나? 되레 술이 들어가야 상태가 좋아지는 몸인데.”

“내 말은 화원 연담이 아니라 술꾼 김명국 말이네.”

연담!

생각도 못한 칭찬에 부끄러워해야 하나 남복을 너그럽게 넘겨 주는 것에 안심해야 하나 생각하며 두 사내의 한담을 듣고 있던 희는 하마터면 경악을 그대로 드러낼 뻔했다.

연담 김명국, 술에 ‘적당히’ 취해야만 그림이 나온다는 기벽 탓에 이단으로 취급받는다는 화원. 그리고…… 김익현 살인 사건에 얽힌 <설경산수도>를 그린 이.

희는 간신히 표정을 고치고 적당히 조심스럽게 그를 살폈다. 명국이 스스럼없이 손짓했다.

“개의치 말고 들어오너라. 진우眞羽가 손대려 하거든 내가 막아 줄 터이니.”

“……그러하겠다는구나.”

명국의 호쾌한 단언과 사이를 두고 덧붙여진 명원의 떨떠름한 말에 희는 무심코 웃어 버렸다. 빈몸으로 나다닌 적은 없고 남복할 때는 더욱 그러하니 만에 하나라도 몸을 지킬 방도는 충분하지만, 이곳저곳에 숨겨 둔 것들이 필요치 않겠다는 건 그저 기분 탓이려나.

하긴 여기까지 왔는데 이대로 서서 어쩌자고. 희는 안으로 들어가며 머릿속 한구석으로 이명원의 다른 이름이 ‘진우’라는 것을 일단 적어 두었다.

술상을 앞에 둔 두 사람 사이에 희가 적당히 자리 잡자 명원이 운을 떼었다.

“자네가 그리는 그림들, 진짜와 가짜를 구분할 수 있는 점이 있나?”

희는 명원의 생각을 알아차렸다. 그 역시 종묘령과 살인 사건을 연결시켜 본 것이 분명했다. 그녀도 그와 함께 대답을 기다렸지만, 명국은 멀뚱히 되물었다.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가?”

“답답하긴. 가짜가 있다니까 묻는 게 아니겠어.”

술잔을 다시 채우던 명국이 눈을 크게 떴다. 그는 이내 잔을 한 번에 비운 다음 대견하다는 듯 웃었다.

“거참, 신기할 노릇일세. 그게 가능하다던가? 암만 내 그림이라도 같은 건 두 번 못 그리는데.”

“내 이럴 줄 알았지. 감탄만 할 일인가?”

“제법 재주 있는 자인 모양인데 비난만 할 일도 아니지. 한데 어떤 그림을?”

“설경산수도.”

명국이 밤사이 수염이 자라 까칠해진 턱을 쓸었다.

“행방이 묘연하다는 그것 말이군. 정랑이 가지고 있는 동안 베껴 둔 거라도 있었나? 아, 이젠 전 정랑이지만.”

인생 참 무상하지, 명국의 중얼거림을 무심히 넘기며 명원이 대답했다.

“그것까진 몰라. 일단 확실한 건 세 가지일세. 첫째, 주인은 살해당하고 그림은 없어졌다. 둘째, 위작을 구했다는 자가 있다. 셋째, 그자는 주인과 앙숙이었다.”

“여전히 요략을 잘하는군. 자네 눈에 보이는 상황까지 알려 주니 일석이조일세그려.”

명국의 말에 희도 놀람을 감추며 동의했다. 어제 함께 들었던 내용은 간략했고 그녀가 던져 준 미끼 또한 자세하지 않았는데, 이 사람은 이미 그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새 따로 알아본 걸까?

“무슨 생각인지도 알겠고. 가짜가 진짜일 수도 있다는 건가?”

“정녕 그러하다면 단순하게 끝난 살인 사건이 실상 단순하지 아니하다는 뜻도 되고.”

명원은 덧붙임으로 벗의 의문에 수긍했다. 명국이 다시 잔을 채우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살인까지 저지를 위인은 아닌 듯싶었는데, 이거 참. 그리 좋게 봐 주니 고맙다 해야 하나.”

“짚이는 자가 있나 보군.”

“언제던가, 종묘령이 찾아왔었지. 설경산수도를 똑같이 하나 더 그려 내라더군. 흥에 취해 휘두른 붓질이라 똑같을 수는 없다고 거절했더니 버럭 하던데.”

듣고 있던 희는 종묘령을 의심할 연유가 하나 더 생겼음을 새겨 두었다. 그때, 명국이 갑자기 술상을 탕 내리치는 바람에 그녀는 깜짝 놀랐다.

“아! 한 가지가 생각났네.”

술병과 접시가 흔들릴 정도였으나 명원은 담담하게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낙관은 어떤가. 그림은 몰라도, 그걸 베껴 그리지는 아니하겠지?”

“그야…… 이름을 똑같이 새겨서 찍어 넣겠지.”

의아해하는 얼굴로 대답한 명원이 바로 물었다.

“그 그림에 낙관을 찍었단 말인가? 어쩐 일로?”

“그게, 그 양반 생각이었다네. 먼 훗날에라도 내 그림이란 걸 확인할 수 있도록 넣어 두라더군. 딱히 필요하겠냐 하였더니 나 죽으면 뉘 그걸 인정하겠냐고 하기에 할 말이 없었지.”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