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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그리 매도하다간 훗날 큰코다칠 것이네. 위작이나마 가진 것이 부러울 거야. 언젠가는 빛을 볼 재능이니까.”

말도 안 된다느니, 선이 너무 거칠다느니 하는 대꾸가 줄을 이었다. 그러나 그자, 청전 채형은 그 이상 자신과 화원을 변호하지 않고 술을 권하기만 했다.

희는 놀람을 감추며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종묘령이 그 그림을 가지고 있다고 제 입으로 말했겠다! 위작이라고는 하나 과연 그러할까. 진품인지 확인할 수 있다면 다른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었다. 희는 그 점을 머릿속에 단단히 새겨 두었다.

……그건 그렇고, 이 사람은 왜 이리 심각한 거야?

희가 묵직한 침묵을 지키는 그를 다시 흘끔대는 사이, 귀가 번쩍 뜨이는 물음이 들렸다.

“한데…… 정녕 위작인가?”

은근한 암시를 품은 말에 방 안 활기가 확연하게 사그라졌다. 희는 침도 제대로 못 삼킨 채 대답을 기다렸다. 종묘령이 태연하게 대꾸했다.

“아쉽게도 그러하네. 그자가 죽고 진품이 암시장에 흘러갔다지. 찾아보고는 있네만 도무지 나오지 않는군.”

“어험, 흠! 포청이 죄 뒤집어 놨어도 허탕이었잖은가. 무리도 아니지.”

“암, 그렇고말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돌리려는 듯 옆 사람들이 앞을 다퉈 종묘령의 말을 인정하는 발언을 했고, 희의 물음을 대신 던져 준 이는 더 반박하지 않았다. 그것을 계기로 화제는 다른 방향으로 틀어져 금번 향월루에 새로 온 기녀가 절색이라는 둥 송도에서는 명월明月의 재래라 불렸다는 둥, 느긋한 얘기들이 오갔다.

더는 들을 것이 없다는 판단이 선 희는 여전히 자신의 입을 막고 있는 손을 툭툭 두드렸다. 퍼뜩 내려다본 그는 바로 손을 놓으려 하다 창을 살피고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그녀는 별수 없이 보폭을 맞춰 따라갔다.

그는 인적 없는 작은 뜰에 들어서고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미안했다. 방금 들은 말들은 그저 흘려버리고 이만 가 보거라.”

“예에…….”

다른 생각에 빠진 듯 어딘가 모르게 건성으로 말한 그는 인사도 듣는 둥 마는 둥 돌아섰다. 영 미심쩍었지만, 붙들고 말을 섞을 일도 아니어서 희는 조금씩 멀어지는 그를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손에 쥐고 있던 목장도를 발견하고 아차 싶어 쫓아갔다. 외쳐 부를 수도 없는 노릇이라 지척까지 다가가는 동안 그는 돌아보지도 않았다. 그녀가 입을 막 열려던 차, 그의 혼잣말이 그녀를 붙들었다.

“하, 연담 이 사람, 알고는 있는 겐지. 하긴 알아도 그저 태평할 위인이니.”

뭐?

희는 깜짝 놀라 저도 모르게 멈춰 섰다. 방금 그 허물없는 말은, 그러니까, 연담과 잘 아는 사이라는 건가? 벗의 그림이 베껴져 나돈다는 사실에 분개했다면 조금 전 이상한 언행들도 이해가 됐다. 희가 주춤한 그때, 뒤늦게 기척을 알아챈 그가 그녀를 발견했다.

“뭐 하는 거냐? 잊고 그만 가 보라니까.”

“……아니, 저어. 저가 궁금증은 영 못 참아서요.”

희는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나리께선 설경산수도라는 그 그림을 아십니까? 그것이 혹 눈 덮인 계곡을 뒤로 두른 초가집이 있는 그림인지요?”

그는 그녀를 빤히 응시했다. 느슨하던 조금 전까지가 거짓말인 듯 날카로워진 눈빛에 그녀는 속으로 찔끔하면서도 크게 뜬 눈을 천연덕스레 깜박였다.

“그래. 본 적이라도 있는 게냐?”

“아니오, 그저 들은풍월입지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리.”

“잠깐.”

아니나 다를까, 인사하고 돌아서는 희를 그가 잡았다. 못 이긴 척 쳐다보자 그가 물었다.

“그걸 알게 되었으니, 이제 무얼 하려고?”

“무어, 할 것이야 없지요. 어느 대감님께서 비명횡사하신 자리에 없어진 게 고작 그림 하나라니, 대관절 어떤 건지 알고 싶었던 것뿐입니다. 행방은 묘연한데 얘기가 분분하더라고요. 참말 그 사노가 손을 댔든 다른 도적이 들었든, 아무튼 그게 참 이상하지요.”

“…….”

“그리고 아까 대감님들은 낮잡아 보셨지만, 연담이라면 작년 세자 저하 가례嘉禮 도화에 함께하셨다고 들었는데요. 그런 분이 그린 그림인데 냉큼 따라 그린다는 게 쉬울 것 같지도 않으니 그 또한 이상한걸요.”

“……방 안의 자들은 종묘령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니 높아 봐야 오품이고, 죽은 자는 전前 공조정랑이니 역시 오품이라. 대감이 아니라 나리라 해야 맞다.”

묵묵히 듣고 있던 그가 차분하게 바로잡았다. 비웃거나 의기양양 가르침을 내리는 게 아니라 조곤조곤 알려 주는 태도가 퍽 인상적이었다. 어수룩하게 보이려고 부러 틀려 준 호칭인데도 희는 무심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그런 그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한데 너는 그 얘기들을 어찌 다 아는 게냐. 연담이란 화원이 무얼 했는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사건의 내막은 불문에 부쳤을 터인즉슨.”

“쉬쉬해도 다들 귀도 있고 입도 있는데요, 무어. 소녀의 어미가 장터에서 밥집을 합니다. 일손이 모자랄 때 돕곤 하는데 그러다 보니 이것저것 주워듣게 되더구만요.”

“그렇군.”

다행히 그는 더 캐물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은근히 만만찮은 느낌이라 조금 걱정했던 그녀는 안심하다 말고 이채를 띤 그의 눈빛에 당황했다.

“제법이구나. 눈치도 빠르고. 입은 좀 더 무거워야 하겠다만.”

입?

의아했던 희는 그에게 대놓고 물었던 것을 지적당했다는 걸 깨닫고 저도 모르게 반박했다.

“나리께서 남 일 같지 아니한 듯 그리 진지한 얼굴이시니, 여쭤도 좋겠다 싶어 그런 것이어요. 계집은 으레 방정맞게 입 놀리기 좋아한다 여기지 마십시오.”

“글쎄, 적어도 네가 지기 싫어한다는 건 알겠구나.”

체. 희는 튀어나오는 입을 넣지 않고 이제 진짜 가 보겠다고 말을 돌렸다.

“그리 해라. 뒷문은 제대로 찾아갈 수 있겠느냐?”

“예.”

놀리는 말투에 희는 뚱하게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태도가 무례하다고 꾸짖기는커녕, 몇 걸음 가지 않아 그녀의 등을 두드린 목소리에는 웃음이 배어 있었다.

“나가는 길 잘 익혔다가 내일 미시가 되기 전에 그대로 되짚어 오너라.”

“예?”

그는 손을 뻗었다. 손끝을 좇은 그녀의 시선이 길게 이어진 돌담에 가닿았다.

“돌담 따라 저쪽으로 죽 들어가서 나오는 별채, 처마 밑 풍경 바로 오른편이다. 움직이기 편한 차림이 좋겠지. 혹 누가 막거든 이명원李明願이 심부름이라 하면 별 탈 없을 게다.”

“……예?”

희가 재차 물었지만 그는 제 할 말을 마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휘적휘적 걸어갔다. 이내 뜰에는 그녀만 달랑 남아 홀로 서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마치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이다. 희는 도리도리 고개를 저으며 뒷문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들키지 않게 조심스러운 몸짓과는 달리 머릿속은 시끄러웠다.

이명원이라.

필시 저 사내의 이름이렷다. 당당하게 이름을 밝힌 걸로 봐선 켕기는 구석이 전혀 없거나, 믿는 구석이 아주 많거나 둘 중 하나일 것 같았다. 어떤 자인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의 끝은 다시 찾아오라던 말로 이어졌다.

과연 무엇 때문인지, 그 이유는 짐작도 가지 않았다. 실제로 연담과 친한 사이이고 그 위작 얘기로 저러는 거라면 한 번쯤 모른 척 어울려 줄 가치는 충분하지만, 미시라면 한낮인데 좌포청에서 빠져나오는 위험을 무릅쓸 만큼은 될지가 또 마음에 걸렸다.

어찌해야 하나?

생각을 거듭하는 동안 문간을 넘은 희는 거리로 나서다 말고 우뚝 멈춰 섰다.

“……이런, 젠장.”

고민할 필요가 없었네.

미련하기는. 희는 스스로 한심해지는 기분으로 목장도를 꼭 쥐고 있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고개를 젓고 다시 걸어가는 그녀의 머릿속에는 내일 어떻게 빠져나올지에 대한 궁리만이 남았다.






“냉큼 일어나지 못해!”

귀청을 때리는 고함에 이어 갑작스러운 싸늘함이 밀어닥쳤다. 희는 얼른 몸을 웅크리며 인상을 썼다.

“아이고 어머니, 하나뿐인 딸년 얼어 죽것소.”

“포청에서 쫓겨나 이 손에 맞아 죽으나, 얼어 죽으나 매한가지지.”

실눈을 뜬 희는 이불을 뺏어 들고 기세등등하게 받아친 모친을 흘겼다.

“쫓겨나긴요? 아침부터 덕담 한번 모지시네.”

“하면 한낮에도 이리 처박혀 쿨쿨 퍼질러 자고 있는 년 무에 어여쁘다고 공밥 먹여 줘?”

“헤, 어머니가 몰라 그렇지. 내가 얼마나…….”

꿍얼거리곤 돌아눕던 희는 다음 순간 벌떡 일어났다. 모친은 굴러가듯 허둥지둥 방 밖으로 뛰쳐나가는 그녀를 보며 혀를 찼다.

“어머니!”

희는 아무렇게나 신을 꿰다 채 어둠이 가시지 않은 주변을 깨닫고 소리를 빽 질렀다. 뒤따라 나오던 모친은 태연하게 대꾸했다.

“어미 아직 귀 안 먹었다.”

“한낮은 무슨, 아직 해도 안 떴구만! 좀 더 자게 내버려 두면 뉘 잡으러 와요?”

“요런 게을러터진 년, 무얼 더 자? 어제 그만치나 일찌감치 자빠져 잤으면 되었지!”

“내가 언제,”

발끈하던 희가 입을 딱 다물자 모친이 혀를 끌끌 찼다.

“대관절 종사관 나리는 조것 어디가 쓸 만하다고 해 주시는지 원. 부처가 따로 없지.”

희는 찍소리도 못하고 소셋물 핑계 김에 부엌으로 도망쳤다.

잠은 확 깼네. 툴툴대며 가마솥을 열고 대야에 뜨거운 물을 붓고 있자니 땔감을 한 아름 안고 들어오던 찬열贊悅이 히죽거렸다. 어릴 적부터 희네 주막에서 중노미로 한솥밥을 먹어 온 그는 그녀의 형제이자 둘도 없는 벗이었다.

“넌 뭐가 좋아서 웃어?”

“그럼 울까? 확실히 아니 들켰으니 약조 지켜라.”

“웬 약조?”

희는 시침 떼며 대야를 들고 마당가의 우물로 걸어갔다. 애가 단 찬열이 황급히 땔감을 내려놓고 뒤를 쫓았다.

“야, 너, 지금 부러 그러는 거지?”

“약조라……. 무슨 말이려나?”

“희야! 너 또 이럴래? 자꾸 이런 식이면,”

“순임아!”

희는 모른 척 대야를 내리면서 목청도 낭랑하게 뒷집을 향해 외쳐 불렀다. 찬열이 움찔하는 때, 연기 나는 부뚜막 아래에서 부엌 밖으로 고운 얼굴 하나가 빠끔히 내밀어졌다.

“일어났니? 어쩐 일로 불렀어?”

“어, 그게…….”

희는 의미심장한 눈길로 얼굴이 벌게지는 찬열을 흘끔 돌아본 다음 씩 웃었다.

“아무것도 아냐. 오늘도 애쓰라고.”

“계집애, 싱겁기는. 너나 조심하렴. 나야 너한테는 댈 것도 아니니.”

웃음을 머금은 선한 눈매가 옆으로 움직였다. 희는 보지 않고도 찬열이 바짝 긴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찬열이도 고생하고.”

“아…… 응. 너, 너도.”

순임은 빙긋 웃으며 다시 안으로 들어갔고, 희는 의기양양하게 물었다.

“자꾸 이런 식이면, 무어?”

“……고맙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