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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지 않아(19금)(삽화본)




1화



프롤로그



모든 것이 참 느리게 보였다.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사람들의 모습도, 하늘에서 무섭게 쏟아져 내리는 비도 참으로 느릿하게 흘러 지나갔다. 가늘게 이어지고 있는 거친 자신의 숨소리만이 유난히 귓가에 크게 들렸다.

헉. 하아. 헉.

나 죽어 가고 있구나.

서연은 제 의지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을 느끼면서, 더욱 거친 숨을 내쉬었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숨결에서 더욱 짙은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진서연! 서연아!”

그때 다급하게 저를 부르는 승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고개를 돌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아 서연은 느릿하게 눈을 깜박이며 그 목소리를 듣고만 있었다.

그 목소리가 슬프게 느껴지는 건 착각이겠지. 그녀가 이 세상에서 사라지면 가장 좋아할 사람인데.

좋겠다, 차승혁. 그토록 끔찍해 마지않았던 진서연이 세상을 떠나게 되어서.

숨 쉬는 게 점점 힘들어지는 것을 느끼며 서연은 힘겹게 입술을 달싹였다.

“……당……신.”

겨우 이 두 글자를 내뱉는 게 이토록 힘이 들다니. 진짜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나 보다. 서연의 부름에 승혁이 몸을 숙여 귀를 그녀의 입술 가까이로 가져다 댔다.

“……좋……지?”

그의 고개가 들렸다. 잘생긴 얼굴이 일그러졌다. 속내를 들켜 버려 짜증이 난 걸까. 어쩐지 통쾌하단 생각이 들었다. 서연은 마지막 남은 힘을 모두 쥐어짜 그를 향해 미소를 지었다. 죽는 순간까지 진서연답게 죽고 싶었다. 그가 항상 말하던 독한 여자처럼 죽어 가는 순간에도 찬란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 역시 차라리 이렇게 세상을 떠나는 게 좋다고. 당신을 사랑했던 모든 순간을 후회한다고. 그러기에 이 삶에 아무런 미련이 없다는 듯 찬란하게 웃었다.

그게 죽어 가는 진서연이 차승혁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복수였다.



**



이건 아주 구질구질하고 처량맞은 이야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이 여자처럼은 절대 살지 마세요, 라는 삶의 지침서랄까.

사람이 죽는 순간에 주마등처럼 과거의 일이 스쳐 지나간다더니 그게 사실인가 보다. 빠르게 흘러가는 옛 기억들에 서연은 차라리 생각이란 걸 멈춰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의지대로 되지 않았다.



여섯 살, 자신의 집 정원에서 승혁을 처음 만났던 그날의 기억부터 떠올랐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육중한 대문이 열렸다. 주방을 맡고 있는 이 씨 할머니가 처음 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정원으로 들어왔다.

정원에 있는 테이블에서 비싼 도자기 찻잔으로 소꿉놀이를 하고 있던 서연은 남자아이를 보자마자 벌떡 몸을 일으켰다. 입고 있던 공주풍 드레스의 레이스가 햇빛을 받아 찰랑거렸다.

서연은 반짝이는 걸 참으로 좋아했다. 예쁜 걸 보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그녀가 가지고 있는 그 어떤 물건들보다 반짝이는 존재가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햇빛을 받아 유난히 더 반짝거리는 갈색 머릿결과 반들반들한 유리구슬 같은 연한 갈색 눈동자. 유독 빛나던 눈빛 때문일까?

상상하던 왕자님처럼 새하얀 피부를 가진 건 아니었지만, 살짝 그을린 남자아이의 피부조차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할머니! 누구야?”

치마를 팔락거리며 이 씨 할머니에게 다가간 서연은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응. 할머니 손자. 이름은 승혁이고, 너보다 한 살 많아. 이제부터 이 집에서 같이 살 거야.”

“정말? 할머니 방에서?”

“응. 잘 부탁해, 서연아.”

할머니의 당부에 서연은 환하게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 매일 그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좋았다.

“난 서연이야. 여섯 살. 앞으로 친하게 지내자, 오빠.”

서연은 해맑게 웃으면서 승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승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연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승혁이가 낯을 많이 가려. 서연이가 좀 이해해 줘.”

이 씨 할머니 말에 서연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 뒤로도 승혁과 쉽사리 친해지지 못했다.

이렇게 서연을 냉정하게 대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서연은 항상 사랑을 받는 것에 익숙한 사람이었다. 몸이 원체 약한 서연의 엄마는 그녀가 세 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서연은 아예 엄마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엄마의 사랑을 대신해서 아빠와 오빠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불면 날아갈까, 쥐면 터질까. 가족들 모두 서연을 애지중지하며 어여삐 여겼다.

그런 사랑에 익숙한 서연이였기에 승혁의 냉대에 적응을 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했다. 승혁이 그토록 차갑게 구는데도 불구하고 그가 싫지 않았다.

왜 그런지 이유도 알 수 없었다. 이상하게 그냥 승혁이 좋았다. 어린 서연이 보기에도 슬퍼 보이는 그 눈 때문인 걸까. 승혁이 웃는 걸 보고 싶었다. 그가 자신을 향해 미소 지어 주면 마냥 행복할 것 같았다.

그래서 늘 승혁의 뒤를 쫓았다. 그가 자신을 귀찮아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서연은 지치지 않고 승혁을 향해 다가갔다.

뭐든지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게 그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이라는 걸 얼마 못 가 알게 되었다.

“오빠 이거 가져.”

“필요 없어.”

승혁에게 용기를 내어 몇 번 선물을 건넸지만, 늘 냉정하게 거절당했다.

그때부터 서연은 방법을 바꿨다. 승혁에게 선물하고 싶은 걸 먼저 사서 쓰다가, 지겨워진 척하며 이 씨 할머니에게 그 물건들을 떠넘겼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그 물건들이 승혁에게 전달되었다. 가방도, 오락기도, 책도 그런 식으로 하나씩 승혁에게 줄 수 있었다.

책을 좋아하는 승혁이 자신이 보낸 책을 읽고 있는 걸 볼 때면 서연은 마냥 기분이 좋았다. 하지만 승혁은 그런 서연을 별로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오빠 책 읽어?”

나무 밑에서 책을 읽고 있는 승혁을 향해 서연이 웃으면서 다가가자, 그는 인상을 쓰며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그 책 재미있어? 나도 조금 읽어 봤는데 지루하던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연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승혁에게 말을 걸었다.

“그렇겠지. 넌 뭐든 쉽게 질려 하니까.”

퉁명스러운 승혁의 말에 서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나 그런 사람 아니다, 뭐.”

입을 삐죽 내밀며 대꾸해 보았지만, 승혁은 별다른 말 없이 몸을 일으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멀어지는 승혁을 보며 서연은 고개를 푹 숙였다.

“뭐든 쉽게 질려 하는 사람이면 오빠를 이렇게 오랫동안 좋아할 리가 없잖아.”

승혁이 이 집에 들어온 지 벌써 5년이 넘었지만, 서연의 마음은 항상 같았다. 여전히 승혁이 좋았다. 자신에게 그가 늘 못되게 구는 걸 알면서도 미워지지가 않았다.

서연은 우울한 얼굴로 땅바닥을 힘껏 발로 찼다. 미처 바닥이 놓인 돌멩이를 보지 못한 채.

“아!”

돌멩이의 뾰족한 부분에 발이 부딪치는 순간 고통스러운 신음이 입에서 터져 나왔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한참 앞서 걸음을 옮기던 승혁이 몸을 돌려 서연을 향해 달려왔다.

“왜 그래?”

“바, 발을 돌멩이에 찧었어.”

여름이라 맨발에 샌들만 신고 있어서 통증이 더욱 강했다. 승혁은 한숨을 쉬며 쪼그리고 앉아 서연의 퉁퉁 부은 발을 살폈다.

“많이 부었네. 걸을 수 있겠어?”

승혁의 물음에 서연은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돌멩이에 뼈가 다친 건지 찌르르한 강한 통증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그런 서연을 보며 승혁은 그녀의 앞에 등을 보이며 쪼그리고 앉았다.

“업혀.”

예상하지 못한 그의 말에 서연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서.”

재촉하는 승혁의 말에 서연은 조심스레 팔을 뻗어 그의 등에 업혔다.

“오빠 안 힘들어?”

“힘들어.”

퉁명스럽게 답하면서도 승혁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비록 발은 너무 아팠지만, 마음은 너무나 행복했다. 그의 등에 맞닿아 있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뚝뚝하고 냉정한 승혁이였지만, 가끔 보여 주는 이런 다정함이 좋았다. 천 번에 한 번 보여 줄까, 말까 하는 다정함이었지만 어쩌다 한 번 보여 주는 다정한 모습에 마음이 마냥 흘러들어 갔다.

이런 감정은 서연이 나이를 먹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사랑으로 발전했다. 하지만 여전히 승혁은 그녀를 철저히 무시했다.

그러던 중 서연이 열일곱 살이 되던 해에 승혁의 외할머니인 이 씨 할머니가 병으로 주방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승혁 역시 할머니를 따라 그녀의 집으로 나가게 되었다.

이 씨 할머니와 승혁이 집을 떠난 충격으로 서연은 한동안 방에 콕 박혀 울기만 했다. 하나 뿐인 딸이 잘못될까 봐 걱정이 된 아빠는 끝내 백기를 들었다. 이 씨 할머니의 치료비를 전액 지원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할머니의 치료비를 서연의 아빠인 진 회장이 지원해 주는 대신, 매번 전교 1등을 놓치지 않는 승혁이 그녀의 과외를 해 주기로 했다. 그 덕분에 승혁과의 인연은 계속해서 이어질 수 있었다.

“있잖아, 오빠. 내가 반에서 1등 하면 내 소원 하나 들어줄래?”

승혁을 향해 문제집을 건넨 서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네가?”

피식. 순간 그의 잘생긴 얼굴에 비웃음이 번졌다. 반칙인 건 그런 비웃음조차 너무 멋있다는 사실이었다. 승혁이 다니는 남고 정문 앞에 옆 학교 여자아이들이 진을 치고 기다리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그 여자애들을 생각하면 짜증이 났지만, 다행히 그녀를 대하는 것만큼이나 그 여자아이들에게도 승혁은 차가웠다. 그래서 더 그가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건지도 모르겠다.

“응. 오빠가 소원 들어준다고 하면 열심히 해 볼게.”

“그러든가. 어차피 소원 들어줄 일은 없을 것 같지만.”

서연이 건넨 문제집에 채점을 하면서 승혁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아니라 다를까. 그녀의 문제집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그것도 가랑비가 아닌 장대비가. 가뭄에 콩 나듯 보이는 동그라미 표시에 서연의 얼굴은 금세 붉어졌다.

“치. 그건 내가 공부에 취미가 없어서다, 뭐. 노력하면 나도 잘할 수 있어.”

반에서 성적이 거의 바닥을 기고 있는 서연은 정말 공부에 취미가 없었다. 공부를 하는 것보다 그림을 그리거나, 옷을 디자인하는 일이 훨씬 더 즐거웠다. 세상에 이렇게 재미있는 일이 있는데 왜 꼭 공부를 해야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승혁이 가르쳐 주는 건 달랐다. 재미없는 공부도 즐거웠다. 물론 아직 잘하지는 못했지만, 노력하면 금방 좋아질 거라고 믿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어릴 때 아빠가 해 준 그 말을 서연은 굳게 믿고 있었다. 언젠가 승혁도 그녀의 마음을 알아줄 날이 올 거라는 걸. 포기하지 않고 노력하면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믿고 또 믿었다.

하지만 그동안 게으름을 피운 탓인지 성적은 쉽사리 팍팍 오르지 않았다. 반에서 중간까지 끌어올리는 건 성공했지만, 그 이상은 기초가 부족하니 쉽지 않았다.

그 좋아하는 잠을 줄이고, 또 줄여서 공부에 매진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코피도 흘려 보았다. 덕분에 문제집엔 하얀 눈송이 같은 동그라미가 훨씬 더 많아졌다. 두 번의 시험에선 실패했지만, 이번 기말고사는 왠지 느낌이 좋았다.

하지만 그 기말고사를 보기도 전에 승혁의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서연은 검은 정장을 갖춰 입고 아버지를 따라 장례식장에 갔다. 승혁의 연한 갈색 눈에 묻어나오는 깊은 슬픔과 마주한 서연은 엉엉 울어 버리고 말았다. 그 눈을 보니 너무 슬퍼져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더는 승혁이 과외를 해 주러 오지 않았지만, 서연은 1등을 목표로 계속 노력했다. 1등을 하게 되면 당당하게 성적표를 들고 승혁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험 결과는 안타깝게도 2등이었다.

가족들은 모두 잘했다며 서연을 칭찬해 주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1등을 해서 꼭 승혁과의 데이트를 소원으로 말하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속상했다.

그런데 다음 날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그녀의 학교 정문 앞에서 승혁이 기다리고 서 있었다. 꿈이라도 꾸는 걸까. 쉽사리 믿기지가 않아 서연은 눈을 느릿하게 깜박이며 승혁을 향해 다가갔다.

“정말 오빠 맞아?”

“그래.”

퉁명스럽고 차가운 그의 목소리를 들으니 승혁이 앞에 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어쩐 일이야?”

“시험 잘 봤다며? 소원 들어주려고.”

“……1등 못 했는데.”

머뭇거리며 답하는 서연을 승혁이 무심한 갈색 눈으로 바라보았다.

“싫으면 가고.”

서연은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안 싫어! 싫을 리가 없잖아. 오빠 무르기 없기다. 내 소원 꼭 들어주는 거다!”

서연은 방방 뛰며 그를 향해 해맑게 웃었다. 그리고 거침없이 데이트를 외쳤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승혁이 걸음을 옮겼다.

“따라와.”

무뚝뚝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건네면서.

서연은 폴짝거리며 그를 뒤쫓아 걸음을 내디뎠다. 그 뒤로 정말 꿈같은 하루가 펼쳐졌다. 승혁과 함께 영화도 보고, 햄버거도 먹고, 공원에도 왔다.

“이거 꿈 아니지? 나 진짜 꿈꾸는 거 같아.”

승혁과 함께 공원을 거닐면서 서연이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꿈 아니야. 그런데 진서연.”

승혁이 차분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응?”

“착각하지 마. 네가 좋아서 소원 들어준 건 아니니까.”

“오빠?”

“난 너 좋아하지 않아.”

매서운 겨울바람보다 더욱 차가운 그의 목소리에 서연은 순간 눈빛이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차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아. 그래도 상관없어. 내가 오빠 좋아하니까.”

감정을 표현하는 데 거침이 없었다. 누구를 좋아하는 마음이 결코 죄가 아님을 알기에.

“그래. 그것도 네 감정이니까. 하지만 앞으로도 내가 널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을 거야, 영원히.”

사형선고 같은 말이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너 같은 사람 난 딱 질색이거든.”

아무리 강심장인 서연이였지만, 연이은 타격엔 휘청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식의 억지 데이트도 더는 하는 일 없을 거야. 잘 살아라, 진서연.”

지독한 말을 쏟아 내 놓고 승혁은 태연한 얼굴로 뒤돌아섰다. 홀로 공원에 남겨진 서연은 주먹을 불끈 쥔 채 그의 뒷모습을 노려보았다.

“난 포기 안 해! 오빠가 뭐라 하든 끝까지 좋아할 거야!”

승혁의 등을 향해 소리쳤지만, 그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이때 서연은 미처 몰랐었다. 이 만남을 끝으로 길고 긴 이별을 하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었다. 예상하지 못한 그 데이트가 그가 준 이별 선물이었다는 걸 며칠이 지나서야 알게 되었다.

아빠를 통해 승혁이 장학생으로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됐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서연이 승혁의 집에 찾아갔을 땐 이미 그 집은 텅 비워져 있었다.

아빠를 붙잡고 자신도 미국에 가겠다고 서연이 몇 날 며칠을 울며불며 난리를 쳤다. 하지만 처음으로 아빠는 그녀의 청을 들어주지 않았다.



시간이 흐르고 서연은 드디어 스무 살이 되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 의상학과에 합격을 한 서연은 본격적으로 디자인 공부를 시작했다. 그 핑계로 뉴욕으로 유학을 가야 한다며 아빠를 조르고 또 졸랐다.

장학금을 타 오면 허락을 한다는 아빠의 말에 또다시 코피가 나도록 열심히 공부에 몰두했다. 덕분에 당당히 장학금을 타는 데 성공했다. 오랜 염원이었던 미국 유학의 꿈을 서연은 드디어 이루어 냈다.

서연은 승혁이 있는 미국에 갈 수 있다는 사실에 그저 신이 났다. 미국에 간 이후로 연락이 한 번도 온 적은 없었지만, 서연은 승혁을 잊은 적이 없었다. 아쉬워하는 가족들의 배웅도 만류하며 서연은 신난 얼굴로 공항에 갔다.

공항 카트에 엄청난 짐을 싣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걸어가는데, 제일 위에 올려 둔 가방이 하나 떨어졌다. 가방을 줍기 위해 몸을 숙이는 순간, 가방을 집어 드는 커다란 손이 보였다.

천천히 고개를 들자, 편안한 캐주얼 차림을 한 승혁이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예전보다 훨씬 더 세련되고 멋있어진 모습으로.

“오빠? 승혁 오빠 맞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