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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젤(Giselle) 2화

1. 유년기 (2)


좁은 별궁에 적은 인원의 시중인을 배정하여 어린 지젤을 가둬 두다시피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법사가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집단 암시를 거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최대한 좁은 공간 안에 강력한 마법을 부여해야만 했다. 또한, 동시에 많은 이가 오갈수록 암시의 강도가 약해지니 별궁의 인원도 극단적으로 감축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러니 이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지내는 공주 지젤이 사람의 정에 목마른 아이로 자라난 것 또한 별도리 없는 일이었다.

아이는 충분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라야 하는 법이다. 충실한 유모와 부지런한 시중인 따위는 썩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들은 마법사의 암시에 현혹된 이들이라, 지젤에게 완전히 마음을 쏟지 못했다.

결국, 온 왕국에 통틀어 지젤의 진짜 정체를 아는 이는 국왕 부부와 마법사, 단 세 명뿐이었으니 지젤이 본능적으로 달에 얼굴 몇 번 보기도 어려운 부모와 마법사에게 집착하는 것은 영 이상한 일만은 아니었다.

‘지젤…….’

마법사는 어린 지젤의 반짝거리는 금발과 연둣빛 눈동자를 떠올렸다. 미추에 무감한 그가 느끼기에도 제법 사랑스러운 외견이었다. 본디 성별은 남자아이지만 머리를 기르고 치마를 입은 모습이 무척 잘 어울렸다.

여자아이가 아니라 남자아이의 모습이었어도 어여뻤을 테다. 만약 쌍둥이가 아닌 평범한 둘째 왕자로 태어날 수 있었더라면 온 왕국의 관심과 애정을 받을 천사 같은 왕자로 자랐겠지. 혹은, 여자아이로 태어났더라면 역시 사랑받는 공주님이 되었으리라.

‘안타까운 일이군.’

마법사는 가끔 사랑스러운 지젤의 얼굴에 어린아이답지 않은 우울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발견할 때마다 성별을 바꾸는 마법의 성공 확률을 셈했다. 아무런 대가 없이 마법을 베푼 적 없는 마법사에게 있어서는 난생처음 품어 본 깊은 호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혹은 다행스럽게도 성별 전환 마법은 생각에 그쳤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완전히 이루어진 적 없는 위험한 마법이었기 때문이다.

마법사는 이런저런 상념에 빠진 채 별궁 곳곳의 마법을 보수했다.

몇 시간 후, 약속대로 지젤의 공부방에 들어서자 작은 몸집의 아이가 발딱 일어섰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흩날렸다.

“오셨어요? 마법사님, 지젤을 위해 책을 읽어 주시면 안 되나요?”

지젤은 자기가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듯 손에 쥔 동화책을 펄럭거렸다. 금박 은박이 아낌없이 들어가 어지간한 집 한 채 가격은 될 법한 값비싼 종이책이었다. 그러나 이도 공주 지젤의 손안에서는 그저 종잇장 묶음일 뿐이었다.

마법사는 지젤의 손에서 동화책을 빼낸 후 적당한 의자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이리 앉아요.”

그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미 지젤은 마법사의 곁에 딱 붙어 앉아 있었다. 그러면서 잔뜩 신난 얼굴로 요구했다.

“생생하게 읽어 주세요.”

마법사는 입을 열었다.

“노력해 보도록 하지요.”

그러나 마법사의 동화 읽기 실력이란 무척 형편없었다. 흥미진진한 기사의 모험이 적힌 동화책은 마법사의 목소리를 통해 듣자 법전이 된 것처럼 지루해져 버렸다. 이에 읽어 주는 마법사조차 지젤의 눈치를 살폈지만, 지젤은…….

“너무 재미있어요!”

……하며 얼굴에 홍조를 띠었다.

이미 유모에게서 수십 번이나 듣고 들어 내용을 외울 정도였어도 마법사가 들려주는 동화책이란 무척 새롭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지젤은 마법사의 고저 없는 담백한 목소리를 좋아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마법사가 마지막 문장을 읽었을 때에는 사뭇 아쉬운 표정까지 지을 정도였다. 그래서 지젤은 ‘한 번 더 읽어 주시면 안 돼요?’ 하며 졸랐으나 마법사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젤, 한 번 읽은 책을 또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크기가 지젤만 한 책을 매일같이 읽으며 외는 마법사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요청이었다. 한 번 보고 들으면 외울 수 있는데 왜 두 번이나 들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 탓이었다.

“하지만 이 책은 재미있으니까 두 번 들어도 여전히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마법사의 단호한 답변에도 지젤은 지치지 않고 종알종알 말을 이었다. 눈이 에메랄드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마법사는 고개를 기울여 물었다.

“재미있었습니까?”

“그럼요! 유모가 읽어 주는 것도 재미있지만, 마법사님께서 읽어 주시니까 더 새롭게 들려서 좋아요.”

애초에 공주에게 이토록 재미없게 글을 읽어 주는 무엄한 이가 있을 리 없었으나, 마법사는 지젤의 감상을 색다르게 해석했다.

“그렇겠군요. 읽어 주는 주체가 다르다면 동일한 내용이더라도 해석이 달라지니 자연히 지젤, 그대가 느끼는 감상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겠군요.”

“그래서 그런가?”

지젤은 마법사의 말은 하나도 이해하지 못한 채, 그저 좋아 방긋방긋 웃었다.

“저는요, 제가 왜 이게 재미있냐면요.”

“예. 듣고 있습니다.”

“여기 마법사님이 공주님을 데려가는 장면이 나오잖아요.”

“열세 번째 페이지에 나오는…… 사악한 마법사가 공주를 납치하는 구절을 말씀하신다면, 그렇죠.”

“저는 그 장면이 너무 좋아요.”

“그렇습니까?”

“네에.”

공주가 손을 꽉 부여잡고 몽롱한 눈빛을 했다.

“나도 마법사님이 나를 데려가 주면 좋겠다. 동화책 속 공주님이 부러웠어요.”

그러면서 마법사의 곁에 찰싹 달라붙었다. 킁킁, 마법사의 소맷자락에서 나는 오래된 종이 냄새를 맡으며 웅얼거렸다.

“근데 마법사님은 용 같은 건 없어요? 유모가 읽어 주는 책 속에선 마법사님이 용을 시켜서 공주를 납치하시던데.”

“미안하지만 동화에 등장하는 용은 상상 속의 동물일 뿐, 실존하지 않습니다, 지젤.”

“그렇지만……. 마탑의 마법사님들은 못 만드는 게 없다고 하는걸요.”

“사실이 아닙니다.”

“용도 못 만들어요?”

“글쎄요. 나는 키메라에는 관심이 없어서…… 마물 조련이나 수집, 연구 따위에 관심이 있는 마법사는 있지만, 그 또한 용은 만들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충격적인 답변에 지젤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럼 나는 누가 납치해 줘요?”

“지젤, 그대가 읽은 동화는 허구입니다. 이성적인 마법사는 공주를 납치하는 비이성적인 행위 따위 하지 않지요.”

“어…… 비이성적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요?”

“이성적이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이성적이라는 말은요?”

“사리에 맞게 판단하는 능력입니다.”

지젤은 그조차도 이해가 안 되어 끙끙거리다 금세 다른 주제로 빠졌다.

“으음, 그럼 마법사님들은 용을 안 만들면 무엇을 만드나요?”

“글쎄요, 앞서 이야기했던 그자는 최근엔 희귀 종족 번식에 관심이 많아져 한동안 괴수 합성에서는 손을 뗄 것 같더군요.”

“희귀 종족이요? 인어 같은 건가요? 동화 속에 나오는 거 같은!”

“그렇습니다. 인어도 희귀 종족에 속하지요. 수가 적어 발견하기 어렵지만요.”

마법사는 지젤이 툭툭 던지는 별것 아닌 질문에도 하나하나 진중하게 대답해 주었다. 천성이 그러했다. 매사가 진지했으며, 농담하는 법도 없었다. 어린아이의 수준을 벗어나는 어려운 어휘를 곧잘 사용했으므로 다정다감한 화법이라 하기에는 무척 불친절했다. 그러나 지젤은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박수까지 쳐 가며 까르르 웃었다.



2. 소년기 (1)


시간은 화살처럼 빨랐고, 지젤은 그보다 더 빨리 자랐다. 어릴 적 자그마했던 지젤의 체구는 성장기를 맞아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랐다. 불행 중 다행으로, 예쁘장한 외양 덕에 지젤은 언뜻 보면 키 크고 늘씬한 여자아이로 보였다. 그러나 아무리 예쁘다 하여도 결국은 사내아이였다. 몇 년 안에 남성의 흔적이 비칠 게 분명했다.

지젤이 성장기에 이르자 마법사는 부쩍 바빠졌다. 달에 한두 번 별궁에 방문해 마법을 보완하기만 해도 되었던 일이 두 배, 세 배로 복잡해졌다. 지젤의 외견은 매일같이 바뀌었고 무럭무럭 자라는 지젤의 빠른 성장에 맞추어 마법을 확장시키기 위해 마법사는 별궁에 붙어살다시피 해야만 했다. 골치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지젤은 그저 신이 난 기색으로 종알거렸다.

“마법사님이랑 매일 보니까 너무 좋아요. 앞으로도 내가 쑥쑥 자라면 좋겠어요.”

“이대로 계속 자라다가는 왕국에서 제일 키 큰 여자가 될지도 모르겠군요.”

“그럼요, 나는 왕국에서 제일 큰 사람이 되어도 좋아요. 윌리엄 오라버니보다 키가 더 크고 싶은데. 쌍둥이인데 왜 나는 오라버니보다 작을까요?”

발랄한 목소리와 달리 배 속으로 꾹 삼킨 나머지 말은 제법 쓰디썼다.

‘나는 사실 진짜 여자도 아니고…… 같은 남자 형제인데 말예요.’



어릴 적 쓸쓸한 별궁을 뭣도 모른 채 즐겁게 뛰어놀던 것도 옛말이었다.

지젤이 어느 정도 사리 분별이 가능한 나이가 된 후, 국왕 부부는 지젤에게 그의 출생에 얽힌 비화를 알려 주었다. 마음 약한 왕비는 지젤의 손을 꼭 잡고 연신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 누르며 미안하다, 하고 훌쩍였다.

지젤은 공부하기를 좋아하진 않았으나 멍청한 아이는 아니었다. 눈치가 빠르고 영민했다. 그는 왕과 왕비가 어떤 위험을 무릅쓰면서까지 저를 살렸는지 단박에 알아챘다. 그런 부모를 원망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엄밀히 말해 지젤의 성별을 숨긴 것은 비난 정도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왕가의 위엄이 무너지고, 왕권에 치명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비밀이었다. 지젤의 본 성별이 드러나게 된다면 국왕 부처가 져야 할 책임은 어마어마했다.

주변 상황을 생각해 보면 감사해야 할 것들 투성이었다. 비록 쌍둥이 둘째 왕자로 태어났지만 좋은 부모를 만난 덕에 구명할 수 있었다. 별궁 안에 유폐되어 지내긴 했으나, 무엇 하나 부족함 없이 부유하고 풍족하게 자랐다.

하지만 이런 제 처지가 가끔 울적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당장 성장기가 찾아오자 지젤에게 나타나는 신체적 변화를 감추기 위해 마법사가 고전하고 있지 않은가. 지금도 이럴진대 완전한 성인 남성이 된다면 그를 어찌 감출지, 평생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니 또 이 일은 어찌해야 할지…… 모든 게 막막했다.

하고 싶은 일도, 되고 싶은 것도 많을 시기였다. 그렇지만 지젤은 저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당장 몇 년 후의 미래조차 불명확했다.

지젤의 사춘기는 무거운 비밀과 함께 찾아왔다.



***



눈앞이 어두컴컴했다. 마치 안개가 낀 것처럼 흐렸다. 하늘과 땅이 구분이 안 갔다. 시야가 모호했다. 지젤은 그 희끄무레한 공간을 헤매고 있었다. 마치 물속을 헤엄치는 것 같은 기분에 손을 이리저리 휘젓는데, 눈앞에 태양처럼 환한 무언가가 나타났다.

-마법사님?

환한 빛 사이에서 나타난 이는 마법사였다. 그는 늘상 그래 왔듯 무뚝뚝한 얼굴로 지젤을 내려다보았다.

-저 여기 있답니다, 지젤이 여기 있어요!

그는 손을 흔드는 지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매사 한 몸인 것처럼 입고 다니는 쥐색 로브를 벗어 내렸다.

스르륵, 몸을 둘러싸고 있던 커다란 천은 어깨를 타고 떨어지더니 어딘가로 날아가 사라졌다.

-아, 세상에!

그리고 순간, 지젤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마법사가 로브 아래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나신이 된 마법사는 한 걸음씩, 지젤에게 가까워졌다.

지젤은 그 광경에 무척 놀랐지만, 차마 눈을 돌릴 생각도 하지 못했다. 제 시선이 무척 무례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마법사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마침내 지젤의 코앞까지 다가온 마법사는 놀라 입술만 빠끔거리고 있는 그를 향해 웃음 지었다.

-아, 마법사님……!

지젤은 난생처음 보는 마법사의 만면 가득한 웃음에 멍하니 있기만 했다. 그런 지젤을 향해 마법사는 고개를 내려 입술을…….

입술을…….

…….



“아……!”

몸이 발작하듯 튕겨 올랐다. 번쩍 눈이 뜨였고 이윽고 익숙한 천장이 보였다.

“뭐, 뭐야?”

아직 몽롱한 꿈 자락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지젤은 시선을 이리저리 굴렸다.

‘방금까지 뜨겁게 맞닿던 그 감촉은 어디로 간 거지? 마법사, 마법사님이 있다 가신 것 같았는데. 어디를 가셨지? 아니, 진짜 마법사님이 맞기는 했나?’

시간이 한참 흐르고, 한참을 횡설수설하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다.

“꿈이었구나…….”

지젤은 푹신한 침대 안에 몸을 묻으며 웅얼거렸다.

그랬다. 사실일 리가 없었다. 꿈일 수밖에 없었다. 진짜라기에는 마법사가 무척이나 다정했고, 거기다…….

‘마법사님의 알몸이라니!’

꿈속의 장면을 떠올린 지젤의 귓불이 달아올랐다.

“아, 아으, 아, 부끄러워!”

길고 풍성해 마치 금실 같은 머리카락을 이리저리 헝클어뜨리고 온몸을 배배 꼬았다. 몸단장을 해 주러 올 유모가 엉망으로 엉킨 머리카락을 보며 골머리를 앓을 것이 뻔했지만, 지젤은 그런 사소한 문제 따위는 신경 쓸 겨를이 안 되었다.

“이게 대체 무슨 꿈이지?”

또래 아이들에 비해 조숙했지만 특별한 성장 환경 탓에 성적인 지식이 부족했던 지젤로서는 이것이 대체 무슨 꿈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참을 부끄러움에 얼굴을 붉히던 지젤은 몸을 일으키다 평소와 다른 점을 또 하나 눈치챘다.

“어라?”

지젤의 침의는 사랑스러운 레이스가 달린 부드러운 치마였는데, 허벅지에 닿는 치맛자락이 축축했다. 지젤은 대경하여 치맛자락을 훌렁 뒤집어 아랫도리를 확인했다.

“아, 세상에나! 이건 뭐람.”

속옷까지 폭삭 젖어 있었다. 밤새 실례라도 했나, 깜짝 놀라 손끝으로 속옷 안쪽을 확인해 보았지만, 무척 진하고 강렬한 냄새가 코를 찔렀을 뿐 지린내 따위는 나지 않았다. 대신 희고 끈적한 것이 아랫도리에 엉망으로 엉켜 있는 게 아닌가.

이 해괴한 모양새에 지젤이 울상을 했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야?”



***



어린 공주의 질문에 마법사가 답했다.

“몽정이군요.”

침대 시트를 몸에 둘둘 감은 지젤이 물었다.

“몽정이요?”

“예, 그렇습니다. 지젤. 몽정.”

“몽정…….”

지젤이 뒤따라 중얼거렸다.

이 괴상하고 부끄러운 생리 현상에 지젤이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마법사뿐이었다. 국왕과 왕비를 찾아가려면 궁을 몇 개나 더 지나야 했고, 유모에게 물어보기에는 그의 아랫도리에 일어난 일이라 차마 밝힐 수가 없었다. 이미 지젤이 남자란 사실을 감추기 위해 마법사가 수십 가지의 마법을 걸어 주었는데, 부끄럼도 모르고 유모 앞에서 아랫도리를 홀랑 까 버릴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지젤은 바로 옆방에 머물며 그에게 걸 새 마법을 궁리하고 있는 마법사를 찾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몽정은 지젤, 당신이 생식 활동이 가능한 성인 남성이 되어 간다는 증거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요.”

“성인 남성…….”

어두운 불빛에도 탐스럽게 빛나는 꿀빛 머리카락, 에메랄드 같은 눈동자를 지닌 사랑스러운 지젤과는 썩 어울리는 단어는 아니었지만, 그랬다.

지젤은 조금씩 어른이 되어 가고 있었다. 발랄한 유년기는 이미 끝이 났다. 이제는 ‘자란다’보다 ‘어른이 되어 간다’는 표현에 더 가까울 시기였다.

“마법사님, 그럼 꿈에 나오는 사람은 무슨 의미가 있어요?”

어른이 되고 있다는 말을 곱씹던 지젤이 홀린 듯 물었다.

“누군가가 나왔습니까?”

“네에.”

차마 알몸의 마법사님께서 내게 뽀뽀를 해 주셨어요, 하는 말은 꺼내지 못했다. 아무리 천진한 지젤이라 해도 이런 이야기를 본인 앞에서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쯤은 잘 알고 있었다.

“글쎄요.”

마법사는 그의 속도 모르고 평소처럼 무감한 표정으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그건 지젤만이 알겠지요. 꿈은 무의식을 암시한다고도 합니다만, 언제나 그런 건 아니니까요.”

“히이잉.”

지젤은 울상을 지었다. 어린 그에게는 너무, 어려운 대답이었다.

‘대체 왜 마법사님이 옷을 벗고 나온 걸까?’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