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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죽었으니 저도 멀쩡하지는 않겠지. 쯧. 내가 고아라고 회사에서 입 씻는 거 아냐? 아니지……. 내 큰아버지가 이런 건수를 놓칠 사람이 아니야.”

수연의 큰아버지는 지독한 사람이었다. 중학생 때 부모님과 남동생을 잃고 슬퍼하는 수연을 살살 달래어 부모님 명의의 집을 빼앗고, 고아원으로 집어넣은 이가 바로 큰아버지였다.

그런 큰아버지니, 유가족 입장에서 회사에 돈을 뜯어낼 건수를 절대 놓칠 리 없었다. 수연이 제법 이름 있는 회사의 인턴으로 들어가자, 마치 전의 일이 없었던 것마냥 연락해 온 큰아버지가 아닌가.

‘쓰레기들끼리 잘들 해 보라지. 어린 조카 내다 버린 쓰레기나, 그딴 개부장 직원이라고 감싸고돌던 회사나.’

이미 죽음을 맞이한 그녀에게는 손에 잡히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였다.

그건 그렇다 치고, 뜬금없이 웹 소설에 빙의된 건 뭐란 말인가?

‘밀레디아는 2층 발코니에서 뛰어내렸다가 죽는 거였는데…….’

밀레디아의 영혼은 사라졌을지 몰라도 밀레디아의 육체는 죽지 않았다. 그녀는 명목상의 황비였을지 몰라도 황비이긴 했으므로 줄거리에 큰 문제가 생긴다.

남주인공인 라일은 어린 시절 선대 황제의 후궁들에게 시달리고, 커서는 밀레디아에게 시달려 약간의 여성 혐오증을 가진 캐릭터로 묘사되었다.

그는 새로운 여자를 만나는 것 자체를 꺼려했으므로 가능하면 밀레디아에게 후사를 보고, 아이가 생기는 대로 발길을 끊으려 했다.

‘설마 나한테 애 낳으라고 하는 건가? 난 그런 거 못 하는데.’

모태 솔로인 수연은 사실상 연애 무식자였다. 로맨스 소설이야 줄기차게 읽어 댔지만 연애할 마음은 없다. 그녀의 연애에 대한 열망은 모든 웹 소설과 로맨스 소설이 이뤄 주었으므로 현실에 기댈 이유가 없었던 탓이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야 짝사랑도 해 보고 썸도 타 봤지만 다 어릴 때 얘기였다. 세상에 홀로 툭 떨어진 이후에는 연애에 대한 꿈은 버렸다. 학자금 대출과 생활비, 월세로 생긴 빚빚빚 때문에. 연애는 사치로 여겨졌다.

‘여기서도 연애는 글렀네. 이럴 거면 아기부터 시작하는 웹 소설 주인공으로 태어나든가……. 아니다. 거지나 노예부터 시작하지 않은 것만도 천만다행이구나.’

거지나 노예로 시작되는 웹 소설도 꽤 읽었다. 그녀들은 엄청난 학대를 당하고 한참 고생을 한 이후에 남주인공을 만나거나, 혹은 스스로의 힘으로 삶을 펼쳐 나갔다.

‘난 그런 에너지 없다고.’

폭신한 침대는 참으로 안락했다. 그 위에 길게 늘어진 채로 밀레디아는 그래도 황비로 빙의한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더 비참하거나 불우할 수도 있었다.

남주인공 라일은 밀레디아를 끔찍하게 싫어했지만 그래도 황비로 대해 주었다. 단순히 밀레디아가 정치적으로 필요한 존재라서가 아니다.

라일 자체도 그리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밀레디아에게 시달려 그녀를 싫어해서 그렇지.

수연은 그래도 라일보다는 밀레디아에게 끌렸었다.

케이아드 공작가의 장녀로 태어난 밀레디아는 어려서부터 어머니의 학대를 받았다.

밀레디아의 엄마는 황비가 되고 싶다는 야망에 불타던 여자였다. 호색한인 황제는 그 야망이 거슬렸는지 케이아드 공작에게 상으로 그녀를 내려 주었다.

그녀는 절망하지 않고 밀레디아를 통해 꿈을 이루려 했다. 그러나 그 방식은 잔혹했다.

말을 배우는 순간부터 황실의 예법을 배우고 식사 조절을 해야 했다.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하지 않는 일이 없었다.

공작 부인은 밀레디아가 실수할 때마다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 유모를 채찍질했다. 체중이 늘거나 화법에 실수하거나 춤을 망쳤을 때도 유모는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질을 당했다. 밀레디아가 울며 빌어도 소용없었다.

유모는 그 와중에도 밀레디아를 감싸며 위로해 줬다. 뚱뚱하고 못생겼으며 몸가짐이 바르지 않다고 꾸짖음을 당해 우는 밀레디아를 안고,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위로했다.

그러나 밀레디아가 라일과 결혼하여 황비가 되는 날, 공작 부인은 실수로 유모를 죽여 버린다.

밀레디아는 이를 알고 망가져 버렸다. 유일하게 자신에게 애정 비슷한 관심을 보였던 라일에게 집착하며 이상 행동을 보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유모가 죽던 장면은 아직도 기억한다.

유모는 공작 부인에게 저를 밀레디아에게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제가 가지 않으면 밀레디아가 불안해한다고. 공작 부인은 그런 유모를 거슬려했다.

밀레디아에게 한 줌의 애정도 보인 적 없으면서, 밀레디아가 유모를 더 따르고 사랑하는 걸 못마땅하게 여기던 그녀였다. 자신이 없으면 안 된다는 말에 발끈하여 채찍질을 하고 몽둥이로 때리다가 죽였다.

그러고는 밀레디아가 그 사실을 추궁하자 밀레디아 탓을 했다.

‘불쌍한 여자였지.’

그래서 밀레디아가 기억에 남았다. 그 유모도.

제국 최고의 미녀라 칭송받아도 스스로를 아름답다 여긴 적 없으며, 내내 불행했던 여자.

아름다운 용모에 능력과 재력, 전부를 갖춘 황제 라일의 아내가 되었어도 밀레디아는 계속 불행해했다.

‘둘 다 너무 어렸던 거지. 거기다 라일은 권력도 잡아야 했고.’

이렇게 길게 풀어서 떠올리지만 실제 밀레디아에 대한 설명은 짧은 편이었다.

<황제의 아름다운 검>의 주인공은 기사였다. 아버지 역할을 하던 오빠가 죽고 자신과 어린 남동생만이 남자, 영지를 지키기 위해 오빠 이안의 행세를 하며 기사가 되는 백작가의 영애였다.

처음에는 동생이 백작가의 작위를 받을 때까지만 이안 행세를 하려고 하지만 라일과 얽히면서 그 계획이 틀어지게 된다.

‘밀레디아가 살아 있으니 두 사람은 어떻게 되는 걸까?’

주인공 세이라는 당차고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황제도 그래서 세이라를 마음에 들어 하고 곁에 두게 된다.

세이라의 백작가 영지 사람들도 세이라의 비밀을 감춰 주기 위해 노력한다. 소소하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었다. 중간에 세이라의 비밀을 알고 협박하는 놈팡이 하나 발암이었지만 뭐……

‘그거 하나만 도와줄까? 아아―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살아 있을 때는 그저 악착같이 버텨서 회사에 남는다는 게 목적이었다. 그 뒤로 집을 사고, 돈을 벌어서 노후 자금을 만들고, 그 노후 자금으로……

‘죽을 때까지 매일매일 웹 소설 읽으면서 행복하게 살려고 했는데……. 흑……. 두두리안 님 소설은 결말까지 이제 조금이었는데……. 엉엉…….’

침울하게 머리를 늘어트리던 밀레디아는 고민했다.

회귀물을 보면 주인공은 반드시 주인공이 빙의된 상대에게 냉대했던 남주인공에게 이별을 요구하여 그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밀레디아도 이혼하고 싶었으나 이런 시대에 어떻게 살까 싶었다.

‘제대로 살 수는 있는 시대야, 여기?’

전기도 안 들어오고 전자 제품도 없다. 그 흔한 세탁기, 가스레인지도 없는 세상이란 무지막지하게 불편하고 어려울 터였다.

지금 그녀가 황비에게 빙의되어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지만, 여기서 쫓겨나면 어떻게 될까? 공작가는 과연 그녀를 받아 줄 것인가?

‘제1안. 신전으로 쫓겨나서 평생 수녀로 산다.’

여기는 수녀가 아닌 신녀였지만 비슷하긴 할 거다.

‘제2안. 공작가에서도 받아 주지 않아서 평민이 된다. 음. 나쁘려나……. 여기 상황을 좀 보고 나서 생각해 봐야겠어.’

방도 나쁘지 않고, 일단 오늘 본 시녀들은 밀레디아에게 헌신적이었다. 황제의 아이를 낳아야 하는 상황만 아니라면 평생 빌붙고 싶었다.

‘연애는 어차피 글렀고……. 웹 소설이 없으니 한평생 연애 소설이나 보면서 살고 싶긴 한데……. 여기 소설이 내 취향일지 모르겠어. 어흐흑……. 내 작가님들. 정말 많이 많이 사랑했어요. 님들 덕분에 제 팍팍한 회사 생활이 잠깐이나마 정말 행복했답니다…….’

하는 생각을 하다가 밀레디아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



밀레디아는 매일 밤 의식처럼 기사들을 이끌고 와서 라일의 침실을 수색했다. 시종들의 상의를 모두 벗겨서 정말 남자인지 확인하는 짓까지 했다.

덕분에 라일의 침실에 암살자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지만, 라일로서는 매일 밤 두세 시간씩 걸리는 수색을 지켜보느라 그만큼 잠을 빼앗겨야만 했다.

‘……정말 안 오는군.’

침대에 벌렁 드러누운 채로 라일은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평온한 밤은 밀레디아와 결혼한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침대를 같이 쓸 때 그녀는 늘 울거나 짜증을 냈고, 각방을 쓸 때에도 라일에게 여자가 있다면서 트집을 잡아 댔다.

뭐가 문제였을까?

약혼 기간 중 그녀는 절제된 모습만 보였다. 어딘가 위태로운 구석이 없잖아 있었어도 그뿐이었다.

그녀가 정말로 이상해진 것은 결혼 이후 공작저를 다녀온 직후였다.

그때부터였다. 밀레디아가 라일에게 집착하기 시작했던 건.

당시는 그도 숙부에 대항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오래 신경을 써 줄 수 없었다. 그 점은 약간 미안하게 생각하지만…….

‘기억을 잃었다면…… 그녀는…….’

초조한 듯 제 손등만 내려다보고 있다가 라일의 질문에 딸꾹질을 하던 소녀. 그 모습이 돌아오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달라질 건 없지.’

기억이 없다고 해도 그녀가 했던 모든 짓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다른 이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것처럼.

그녀는 계속 황비일 테지만 라일은 그녀에게 마음을 주는 일 같은 건 없을 것이다.



***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에도 밀레디아는 라일의 방에 찾아오지 않았다.

시녀장이 입단속을 시키기는 했으나 황성의 궁인들에게는 황비가 기억을 잃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성격도 확 달라졌는지, 황비의 처소에서 뺨을 맞거나 차를 뒤집어쓰고 방에서 쫓겨나는 시녀나 시종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진짜 기억 상실인 건가?’

찾아가 봐야 합니다~ 하고 압박을 주는 시드를 무시하고 라일은 언짢은 기색으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케이아드 공작이 밀레디아에게 무심한 태도를 보이고 있으나 제 딸의 안위에 완전히 관심이 없지는 않았다. 황제의 총애가 곧 권력이나 마찬가지였기에, 황제가 황비에게 보여야 할 최소한의 관심도 보이지 않는다면 공작은 정치적으로 황제를 압박해 올 작자였다.

그로 인해 라일이 밀레디아를 더 싫어하게 된대도.

“화, 황비 전하!”

울음을 터트릴 듯한 시녀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라일은 ‘황비’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얼굴부터 구겼다.

아프다더니 벌써 방을 나온 건가 싶었다. 고작 3일 전의 일이라 해도 뇌진탕까지 왔던 큰 부상이었다. 보통 귀부인이라면 최소 일주일은 침대에 드러누웠을 중상이다.

“황비 전하! 뛰시면 안 됩니다! 신발도 벗으시면 안 된다고요!”

‘뭐?’

헉헉거리며 시녀들이 하는 말에 라일은 고개를 돌렸다.

밀레디아는 완벽한 예법의 표준이자 화신 같은 여자였다. 손끝 하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황실 예법에 어긋남이 없던 그녀였기에 라일은 언뜻 보이는 광경을 믿지 못했다.

“시끄러워, 이 스토커들아! 난 혼자 있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