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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1장. 새로운 세계에서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아찔할 만큼 고혹적인 미인의 외양을 갖추고 있었다.



잠시 숨을 찬찬히 들이쉬며 나는 거울 표면에 비추어진 사람의 형상을 매만졌다. 손가락 끝에 다가오는 차가운 유리의 촉감이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이 결코 환상이나 하룻밤의 꿈이 아님을 알려 주었다. 재차 호흡을 가다듬으며 거울에 반사된 모습에서 필사적으로 내가 알던 스무 살 한유리의 형태를 찾고자 애를 썼다. 분명히 기본적인 바탕은 온전한 나 자신의 것일진대, 그 위를 덮고 있는 보드라운 살점이나 머리카락, 속눈썹의 형태는 무척 이질적이었다.

끝없는 밤하늘의 빛을 녹여낸 듯한 고운 머릿결,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는 이마와 그 아래 자리한 눈썹, 길고 풍성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자 그 아래로 반짝임을 더하는 검은 눈동자와 오밀조밀한 콧대와 코끝, 연한 장밋빛으로 물든 입술까지…….

권태롭고 우울하기 짝이 없는 인생에 몸부림치는 걸 가엾게 여긴 조물주께서 마지막으로 내려 주신 선물이기라도 한 건가. 나는 피식 웃으며 눈을 한 번 감았다가 떴다.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눈앞의 풍경은 새로이 바뀐 한유리의 모습을 여전히 드러내 보여 주고 있을 뿐이었다.



* * *



내가 다시 정신을 차린 건 그로부터 사흘 정도가 지난 후였다. 누구나 다시금 뒤를 돌아볼 만한 미인으로 모습이 뒤바뀐 날, 스스로는 눈치채지 못했지만 몸뚱이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던 건지 그저 거울 앞에서 한참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다시 비틀거리며 쓰러졌던 거라고, 눈을 뜬 나에게 허겁지겁 다가온 하녀는 그렇게 설명해 주었다.

실은 정신없이 거울 앞에만 서 있던 날에도 아가씨께서는 벼랑 끝에서의 실족 사고로 의식을 잃은 지 일주일 만에 깨어나신 거였다며, 그 후 또다시 정신을 잃는 걸 보고 이번에야말로 이대로 영영 눈을 못 뜨시는 건 아닐까 모두들 걱정을 했었다고.

그제야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이질적인 공간이 서서히 눈에 들어왔다. 고풍스러운 가구들과 장식으로 꾸며진 방은 확실히 중세 유럽 귀족 가문의 여식이 쓸 법한 꾸밈새를 갖추고 있었지만, 내가 있던 원래 세계의 것과는 굉장히 거리가 멀었다.

“으음…….”

나는 내 입에서 어떤 말이라도 나오길 바라는 간절한 하녀의 시선을 뒤로한 채 애써 건조한 목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이나마 이곳에 머무르며 알게 된 나름의 정보들을 조합해 보고자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스스로의 자유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곳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 그것도 주변 사람들이 바뀐 외양에 대해 딱히 놀라거나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원래 주인의 곱디고운 겉껍데기를 도둑질하듯 뒤집어쓰고 깨어났을 확률이 높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것치고는……. 지금 바뀐 내 모습은 원래의 스무 살 ‘한유리’가 지니고 있던 외양과 묘하게 많이 닮아 있었다. 더욱이 흰 피부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한 미인상이긴 했지만, 이곳 사람들처럼 온전한 서양인의 외양은 아니었다. 서구적인 미인상을 꼭 빼어 박은 한국 여배우들이나, 아니면 팔분의 일 정도는 외국의 혈통이 섞였구나 싶은 그런 얼굴이었다.

무엇보다도 어떻게 나 혼자만 이곳에서 이렇게 이질적인 외모를 갖고 있는 것인지……. 나는 여전히 불안한 눈빛으로 내 손을 꼭 붙잡고 있는 가련한 하녀의 얼굴을 못 본 체하며 나머지 한쪽 손으로 내 새로운 얼굴을 꼼꼼히 만져 보았다.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부서질 듯 방문이 열리고 그 사이로 한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드디어 일어나셨네.”

비죽이는 남자의 잇새로 흘러나온 소리는 상대에 대한 노골적인 적의를 품고 있어 나는 당황했다. 그는 방으로 거침없이 들어와 내 머리채를 쥐어 잡듯이 들어 올려 내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죽일 듯이 나를 노려보는 한 쌍의 갈색 동공 너머로 불쾌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일렁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이 당황스러운 첫 만남 덕에, 나는 그가 어지간한 귀족 영애들은 물론이고 집안의 잡부 계집, 나이 어린 하녀들까지 몸을 배배 꼬아 댈 정도로 잘생긴 미남이라는 것을 한참 뒤에야 깨닫고 말았다.

결 좋은 짙은 갈색 고수머리가 흩날리고, 그 아래 자리 잡은 반듯한 콧대와 매끄러운 턱선까지. 내 앞의 남자는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막 지난 듯한 외양이었다. 나는 수치스러운 줄도 모르고 홀린 듯이 그 모습에 빠져 잠시 숨을 멈췄다.

“미친년. 이젠 대놓고 길거리의 얼빠진 계집처럼 구는군.”

“도련님, 아가씨께서는 아직 안정이 필요한 상태이십니다. 그러니…….”

대뜸 욕설을 내뱉는 남자의 목소리에 그의 곁에 서 있던 나이 많은 하녀가 그를 타일렀다. 그러나 그녀의 뒷말은 남자가 여전히 내 머리채를 휘어잡은 채 그녀를 쥐 잡을 듯이 노려보는 바람에 미처 입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남자는 다시 내 얼굴을 거칠게 끌어당기며 이를 악물듯 내뱉었다.

“이제 와서 왜 되지도 않는 병신 짓이야, 응? 대체 왜. 골골대면서 매일 방구석에나 처박혀 있는 이 집 할아범 상태 보니까 네가 이렇게 미친 척이라도 해 대면, 그러면 얼마 안 되는 유산이라도 더 떨어질까 싶어서 그러는 거야? 응? 그래? 어쭙잖은 콩고물이나 더 핥아먹어 보려고 허구한 날 자해해 대고 그걸로 모자라 이제는 높은 데서 뛰어내리기까지. 별 지랄을 다 하는 거냐고.”

한눈에 봐도 높은 신분인 듯 보이는 남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투는 그러나 몹시 거칠었다. 그는 이제 한 손으로 내 목을 옥죄고 있었다. 남자의 유려한 얼굴에 멍하니 있던 나는, 그제야 그의 눈빛이 나에 대한 단순한 적의를 넘어 증오, 살기에 가까운 것을 담고 있음을 깨달았다. 목과 얼굴에 와 닿는 그의 숨결로 인해 내 피부에 오소소 소름이 올라왔다.

“그래, 그 허튼수작 다시 한 번 더 부려 봐. 이번엔 안타깝게 자살 미수로만 끝나지 않도록 내가 직접 네 마지막 숨통을 끊어 놔 줄 테니까, 에스델 누이.”

그의 입술에서 나온 이질적인 호칭에 그제야 나는 나와 조금도 닮지 않은 그 남자가 내 남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내게서 어떤 대답도 흘러나오지 않자 그는 내게, 네 천한 어미의 추잡스러웠던 최후를 언젠가 똑같이 겪게 해 주겠다고 윽박지른 후에야 나를 내던지듯 놓고 나갔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거칠게 남자에게 잡혀 있던 두피의 통증이 그제야 느껴졌다. 그가 나가자마자 주변에 있던 하녀들은 급히 달려와 내 상태를 살폈다.

나는 급작스레 온몸을 휘감는 당혹스러움에 눈을 감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 건지……. 갑자기 들이닥친 그 남자처럼 내게 휘몰아쳐 온 일련의 사실들은 나를 괴로울 정도로 끔찍한 기분이 들게 만들었다. 나는 그에게 붙잡혔던 통증을 잊으려 인상을 찌푸렸다.



* * *



에스델 모르데카이 그로에스.

그로에스 백작 가문의 외동딸. 20세.



나는 새로이 내가 입게 된 정체성을 나타내는 몇몇 단어들을 되씹으며 고민에 빠졌다. 야멸차기 짝이 없던 그 남자의 방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가 이 집안에서 그리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임을 깨닫게 되었다.

백작 가문의 외동딸이라 일견 귀한 귀족 아가씨로 자라 왔을 것 같지만, 실은 가주(家主) 그로에스 3세가 외국 노예 출신의 창녀와 하룻밤 방탕한 유희를 즐긴 결과로 집에 들인 혼외 자식이라는 것, 그래서 이 집안의 사용인들마저 다들 겉으로 내색하지 않으려 애쓴다 뿐이지 나를 이 집의 식객마냥 데면데면하게 굴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정신을 차린 날 나를 찾아왔던 그 미남자의 냉정한 태도도 이해가 되었다. 미하엘 로트 그로에스. 그는 치매에 마비까지 겹쳐 오늘내일하고 있는 백작이 눈을 감으면 곧바로 그 뒤를 이을 이 집안의 유일무이한 적통 후계자였다.

내내 내 곁을 지키던 하녀 에이미가, 백작 부인이 정략결혼으로 이 집안에 시집와 불행하게 이어지던 삶을 짧게 마무리한 이후 미하엘은 줄곧 정식 후계자로서 대우받아 왔다고 귀띔해 주었다. 특히 그로에스 백작이 뒤늦게 나를 자신의 친딸임이 분명하다며 막무가내로 이 집에 끌어들인 후부터 그와 그 측근들은 나에 대한 경계 태세 또한 늦추지 않고 있는 눈치였다.

나는 이제 내 비천한 출신 성분의 숨길 수 없는 증표임이 드러난 이곳에서의 내 이국적인 외모를 살피며 또 한 번 자조했다. 일각에서는 지독히 흰 피부색 외에 눈곱만큼도 백작을 닮지 않은 나를 두고 정말 친딸은 맞느냐, 혹시 한때 끼고 놀던 외국인 창녀의 태생 모를 딸을 데려와 키운답시고, 실은 애첩처럼 내킬 때마다 붙어먹는 용도로 데리고 있는 것은 아니냐 하는 말까지 도는 모양이었다. 나는 이곳에서의 내가 반편이 귀족만큼도 되지 못하는 신세임을 곧 깨달았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전생에서 차라리 이 인생을 조용히 끝내게 해 달라고……. 그렇게 신에게 빌기를 수차례, 마치 이 지긋지긋한 불행 속에 나를 처박아 놓은 세상에 화풀이라도 하겠다는 양 지난 어느 날 서울의 아파트 한편에 구겨져서 집어삼킨 수면제가 잘못되기라도 한 걸까. 이전 생에서의 내 처절했던 기도와 자살 시도는 아무래도 나를 잘못된, 어딘가의 이세계(異世界)로 끌고 와 버린 모양이었다.

이게 결코 꿈이 아니란 것은 지난 며칠간 스스로 현실임을 확인해 보고자 꼬집고 비틀어 팔 부근에 남은 보랏빛 멍 자국을 보면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몹시 혼란스러웠다.



“아가씨.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응. 고마워.”

외출 준비가 다 되었다며 나를 데리러 온 시종의 말에 무거운 상념에서 비로소 깨어났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곤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이날 마차를 타고 내가 향한 곳은 저택에서 멀지 않은 중심가의 상점 골목이었다. 연고 없는 이세계(異世界)에 홀로 떨어진 이후, 나는 근 한 달간을 미하엘이란 이름의, 나와 피가 섞이기는 한 건지조차 불투명한 남동생의 날카로운 신경을 거스르고 싶지 않아 방 안에서만 쥐 죽은 듯이 보냈다. 갑작스레 내던져진 이곳의 현실에 나는 아연실색했고, 매일 조금씩 생명력을 잃고 말라비틀어져 가는 꽃처럼 버석거렸다.

내내 그런 내 눈치를 살피던 하녀들이, ‘이러다 정말 아가씨가 또 반쯤 미쳐서 죽어 버리겠다고 구는 건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숨 쉴 구멍이라도 마련해 주는 게 좋지 않을까.’ 따위의 말을 속닥거리는 게 들렸다. 그들은 곧 아무 작당도 없었다는 양 내게 바깥바람이라도 좀 쐬고 오시는 게 어떻겠냐며 권했고, 나는 그들의 속내를 알고 있다는 티를 내기도, 뭐라 거절의 말을 꺼내기도 피곤할 것 같아 그러겠노라 고개를 끄덕인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