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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화









우여곡절 끝에 근처로 오긴 했으나 눈에 띄는 편의점만 해도 일곱 개는 되는 것 같았다.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거야?”

슬슬 짜증이 나기 시작한 승재가 중얼거리자 차창 밖으로 거북이처럼 목을 쭉 빼고 정신없이 두리번거리던 석주가 갑자기 한 곳을 가리키면서 소리쳤다.

“엇! 저기! 저거 한정원 아니냐? 청바지에 흰 티! 맞네! 한정원!”

석주가 가리키는 곳에는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은 여자가 테이블에 엎드려 있었다. 매일 비슷한 옷을 입고 다니니 찾기는 쉬웠다.

테이블 위에는 맥주 캔 여러 개가 정원의 머리카락과 함께 어지럽게 뒹굴고 있었다.

“빈틈없는 앤 줄 알았는데 저런 면도 있었네. 보면 볼수록 매력이쒀! 한정원.”

석주가 클클 웃으며 말했지만 승재는 여기에 온 것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뭔가 꼬여 가고 있었다.

온갖 짜증을 얼굴로 표현하며 차를 세우려는데 남자 세 명이 정원이 엎드려 있는 테이블 앞에 멈췄다.

“어? 뭐지?”

석주가 남자들을 보며 중얼거리자 승재의 눈썹이 사납게 올라갔다. 딱 봐도 술 취한 여자를 어찌해 보려는 한심한 패거리인 것 같았다.

“완전 뻗었는데?”

“업어 가도 모르겠어. 흔들어 볼까?”

모자를 쓴 남자가 엎드려 있는 정원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걷어 올렸다.

안경이 벗겨진 채 잠든 정원의 모습은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다웠다. 발그레 상기된 볼과 열이 올라 붉게 물든 입술은 티 하나 없는 흰 피부와 더 대비되어 보였다.

“대박. 진짜 예쁜데?”

“어디 어디?”

“이렇게 예쁜 아가씨를 길가에서 자게 만들면 안 되겠지?”

한 명이 큰 선심 쓰듯 말하자 나머지 두 명이 축 늘어진 정원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위험을 감지한 승재와 석주가 급히 차를 세우고 막아서려는데 그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정원이 양옆에 서 있는 남자들을 사납게 노려봤다.

“니들 뭐야?”

의식이 없을 거라 예상했던 여자의 화난 목소리에 남자들은 깜짝 놀라더니 이내 느물거리는 미소로

“집에 데려다주려고 그러지. 이것 봐 걷지도 못하잖아.”

하고 정원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더 이상 참지 못한 승재가 차에서 내려 그들 앞을 막아섰다.

“그 손!”

하지만 승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정원의 양옆에 있던 남자들이 차례차례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아으으으으!”

“아악!”

정원은 중심을 잃고 잠시 비틀거리다 바닥에 주저앉아 중요 부위를 감싸 쥔 남자들의 엉덩이를 한 대씩 더 걷어찼다.

“이 새끼들이 어디서 쪼다 같은 짓을 하고 자빠졌어! 꺼져!”

정원은 몸이 심하게 기우뚱거렸지만 운동신경이 좋은지 절대 넘어지지 않았다.

천사 같은 얼굴로 살벌하게 쏘아 대는 언어 폭탄을 마주한 두 사람은 뜨악 하는 표정을 지었다.

“난, 한정원이 처음부터 연약한 여자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어.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대박!”

석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박수를 쳤다.

“우리가 도와줄 필요도 없겠는데?”

승재는 비틀거리다 의자를 찾아 앉는 정원 앞에 섰다. 정원은 엎드려 있다 인기척을 느끼고 눈썹을 치켜올렸다.

“넌 또 뭐야? 걔들 친구야?”

“아니, 네 친구.”

승재의 입에서 나온 말에 석주가 커다랗게 눈을 치켜뜨며 물었다.

“언제부터 친했다고 친구래?”

하지만 놀란 건 석주만은 아니었는지 눈을 게슴츠레 뜬 정원의 입술 끝이 삐뚜름하게 올라갔다.

“누가? 네가?”

“아마도?”

“니들이 친구는 아니지……. 친구가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

승재는 정원의 말을 들으며 그녀가 가지고 있는 맹목적인 편견이 어떤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던 편견도.

“개……새끼들, 별것도 아닌 것들이…….”

승재는 혀 꼬부라진 소리로 욕지거리를 뱉는 정원을 무거운 눈으로 바라보다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태현아, 난데……. 혹시 동석이 번호 있지? 좀 보내 줄래?”

“동석이는 또 누구야?”

약간은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한 발자국 떨어져 있던 석주가 물었다.

잠시 후, 그들 앞에 멈추어 선 하얀색 승용차 안에서 동석과 중년 여성이 허겁지겁 내렸다.

“어마! 이게 무슨 일이야? 정원아! 얘가 왜 이래?”

이모는 정원이 떡이 된 까닭이 멀뚱멀뚱 서 있는 승재와 석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는지 도끼눈을 뜨며 조카를 살폈다. 동석도 놀랐는지 승재 곁으로 슬그머니 다가왔다.

“어떻게 된 거야?”

승재는 설명하기 번거로웠지만 괜한 오해로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으므로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했다.

“아……. 정원이가 너네랑 같은 조구나. 어쨌든 정말 고맙다. 니들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진짜 고마워.”

동석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 다음 정원을 향해 등을 내밀었다.

“업혀. 집에 가자. 엄마, 일단 집으로 가야겠죠?”

“어. 그래야지. 총각들 고마워요. 아까는 내가 오해를 해서. 진짜 고마워. 얘가 생전 이런 적이 없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언니 기일도 아직 멀었는데…….”

그러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뜻인가. 승재는 축 처져 있는 정원의 얼굴을 보며 착잡해졌다.

동석이 끙 소리를 내며 정원을 들쳐 업었을 때였다. 정원이 이모를 발견하곤 아기처럼 환하게 웃으면서 두 팔을 벌렸다.

“이모…….”

“어휴. 이모는 알아보겠어? 왜 이렇게 마셨어? 술도 잘 못 마시면서. 술 마시고 싶으면 이모 집에 오든가 하지.”

“헤헤헤. 그냥 마시고 싶었어. 그냥…….”

정원은 눈을 뜨려고 눈썹을 위로 올렸다. 하지만 천근만근인 눈꺼풀의 무게를 이기기엔 역부족이었다.

그사이 정원을 업은 동석이 정원을 차에 태우려는데,

“내 빵! 내 빵 가져가야 해.”

정원이 테이블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또 빵 샀어? 승재야 저기 빵 좀 우리 엄마한테 줄래?”

“아니, 내가 들고 가야지. 내 건데…….”

석주는 극과 극을 오가는 정원의 모습에 정신을 못 차리다가 의자 위에 널브러져 있던 빵 봉지를 얼른 정원의 손에 쥐여 주었다.

“양아치 시키들…….”

정원은 만족한 듯 씨익 웃으며 승재와 석주에게 빵 하나씩을 억지로 쥐여 주었다. 그리고 더는 못 견디겠던지 빵 봉지를 툭 떨어뜨렸다.

“아이고! 얘는 왜 취하면 맨날 이렇게 빵을 사? 많이도 샀네.”

이모가 떨어진 빵 봉지를 주우며 투덜댔다. 그사이 동석은 정원을 차 뒷좌석에 태우고 왔던 것처럼 황급히 사라졌다.

“…….”

“…….”

승재와 석주는 짧은 시간에 너무 많은 일을 겪은 탓인지 이틀 밤을 샌 것처럼 몽롱했다.

“쟤 뭐지?”

석주가 정적을 깨며 승재를 향해 묻자 멍한 표정을 짓고 있던 승재가 픽 웃으며 대답했다.

“뭐긴 뭐야. 또라이지.”

“근데 넌 무슨 빵이야? 난 당근 빵이야.”

승재는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가 손에 쥐어진 빵 봉지를 보고 또 한 번 피식 웃고 말았다.

“피카추 빵.”



*



“으으으아. 머리야.”

정원은 한참 동안 고개도 들지 못하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여기까지 어떻게 온 거야.”

정확히 어디서부터 끊긴지도 모를 기억을 더듬느라 정원이 한참을 머리를 긁고 있는데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 똑!

문을 열고 고개를 빼꼼 내민 동석의 동그란 얼굴엔 미소가 빙긋 걸려 있었다.

“일어났어? 속은 좀 어때?”

“죽을 것 같아.”

정원이 목소리를 쥐어짜며 대답하자 동석의 눈가가 아래로 둥글게 더 휘었다.

“엄마가 아침부터 해장국 끓이고 난리가 났다. 아빠가 술 드시고 오면 욕만 하는데. 어서 나와서 먹어.”

정원은 또 수선을 피웠을 이모를 상상하며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이모부는?”

“출장. 너 어제 시루떡 된 건 못 보셨어.”

“다행이네.”

헤실헤실 웃는 정원의 얼굴에서 어린 시절이 보이는 것 같아 동석은 마음이 한결 좋아졌다. 저런 애를 왜 어려워하는 거야.

“빨리 나와.”

방문을 열자마자 시원한 콩나물국 냄새가 났다. 동석은 앞장서서 걸어가다 정원을 향해 속닥였다.

“좀 짜더라도 맛있는 척하고 먹어. 짜다 그러면 엄마 삐진다. 요새 엄마 갱년긴지 무슨 말만 하면 토라져서……. 사춘기 딸을 키우는 기분이다. 내가.”

동석은 세상 풍파에 해탈한 노인처럼 고개를 흔들면서 코를 찡긋했다.

정원은 콩나물국에 밥을 말아 먹으며 부대끼는 속을 달랬다. 동석의 말대로 좀 짜긴 했지만 못 먹을 정도는 아니었다.

“학교로 바로 갈 거야?”

“집에 가서 옷 좀 갈아입고.”

“데려다줄게. 가자.”

“됐어. 수업 있다며. 나는 오후라서 여유가 좀 있어. 그냥 지하철 타는 데까지만 데려다줘.”

차에 올라탄 정원이 말하자 동석은 시간을 확인한 후 차를 출발시켰다.

“너 데려다주지도 않으면서 차 쓰면 엄마한테 혼나.”

“아무 말 안 할게.”

“진짜? 그럼 이야기가 좀 달라지지. 흐흐흐. 너, 나중에 말 바꾸기 없기다.”

물론 정원이를 데려다주지도 않으면서 하루 종일 차를 썼다고 하면 혼날 게 뻔했지만 정원이가 지하철을 타고 갔다는 말을 꼭 할 필요는 없겠지. 기분이 좋아진 동석이 노래를 흥얼거리자 듣고 있던 정원이 혀를 끌끌 찼다.

“오빠는 예나 지금이나 노래는 진짜 못해. 음정 박자 다 틀리잖아.”

“사돈 남 말 하시네. 그래도 내가 너보다 낫거든.”

“헐,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당연하지. 너처럼 노래 못하는 애는 태어나서 한 번도 못 봤어.”

“에이, 그 정도는 아니야.”

“응. 그 정도 맞아.”

망설임 없는 동석의 대답에 정원이 얄미운 듯 눈을 흘겼다.

“아 참, 언주는 잘 지내? 여전히 콩만 하냐?”

“언주야 뭐. 매일 똑같지. 남자 친구랑도 잘 지내고.”

“이번에는 그래도 꽤 오래가네? 1년 전 그 친구 맞지?”

“무슨? 벌써 두 번이나 바뀐 건데…….”

“대단하다. 대단해. 넌 뭐 하냐? 그 얼굴로. 남친 하나 못 만들고.”

“귀찮아.”

정원이다운 대답이었다.

“그런데 나 어떻게 이모 집에 온 거야?”

정원이 잠시 잊고 있던 질문을 하자 동석은 놀랐다는 듯 눈썹을 치켜올렸다.

“기억 안 나? 승재랑 같이 있던데?”

“뭐?”

정원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동석의 대답에 저절로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내가 왜?

“진짜 기억이 안 나나 보네. 어제 자려고 누웠는데 승재한테 전화가 왔더라고. 너 좀 데리러 오라고.”

“걔가 내가 거기 있는지 어떻게 알고?”

정원은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네가 데리러 와 달라고 전화했다던데?”

“내가? 누구한테?”

“석주한테.”

“설마…….”

“석주 말로는 네가 전화해서 언주를 찾았다고 하더라. 잘못 걸었나 봐. 그래도 다행이지. 걔들이라도 가 줘서. 나중에 걔네들 보면 고맙다고 말해.”

동석이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는지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원은 믿을 수 없어 얼른 휴대폰을 꺼내 통화 내역을 살피기 시작했다.

“아닐 거야. 아니겠지. 설마…….”

하지만 사실이었다. 정원은 차창에 머리를 쥐어박고 싶었다.

“미쳤구나, 내가. 미쳤어.”

“아, 맞다. 너 걔들한테 빵도 하나씩 줬어. 욕도 하고. 큭큭큭. 아마 걔네들한테 욕할 수 있는 사람 별로 없을 거다. 내 동생이지만 존경한다. 정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