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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청바지에 흰 티셔츠를 입은 정원은 긴 머리카락을 질끈 묶어 올리고 까만 야구 모자를 눌러썼다. 화장대는커녕 가구도 몇 개 없는 정원의 원룸은 심플하다 못해 건조한 느낌까지 들었다.

Rrrrrrrr.

운동화에 발을 욱여넣고 있던 정원은 발신자도 확인하지 않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가고 있어. 조금만 기다려. 버스 타고 가면 30분 내로 도착할 거야. 징징거리지 마. 듣기 싫어.”

― 야아! 넌 왜 말을 그렇게 하냐? 하여튼 못됐어. 아, 몰라! 빨리 와!

정원은 언주의 애교 가득한 콧소리에 피식 웃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붙어 다녔는데 대학마저 같은 곳으로 온 언주는 정원의 하나밖에 없는 친구였다.

무뚝뚝한 정원과 애교가 넘치는 언주는 완전 다른 성격이었지만 싸운 적이 거의 없을 정도로 서로 잘 통했다.

“끊어.”

먼저 전화를 끊어 버린 정원은 문을 열고 나서려다 책상 위에 놓여 있던 뿔테 안경을 집어 들었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옷차림이었다.



*



“하여튼 못됐어. 근데 또 청바지에 흰 티 아니야? 안경이라도 벗고 와야 하는데!”

언주는 초조한 듯 중얼거리다 마침 카페 안으로 들어서는 남자 둘을 발견하고 손을 흔들었다.

“여기! 여기!”

언주를 발견한 두 사람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생글생글 잘 웃는 언주는 누가 봐도 귀여운 아가씨였다.

“우와! 완전 귀엽다. 완전 내 스탈!”

경민이 민수의 어깨를 툭 치며 만족스러운 듯 말하자 민수가 웃음기를 단번에 걷어 냈다.

“꿈 깨. 내 여친이시다.”

“에이, 좋다 말았네.”

“먼저 와 있었네?”

“응, 정원이는 좀 늦는대. 시간 약속 잘 지키는 앤데……. 오늘은 일이 좀 있었나 봐요.”

시작은 민수를 향해 한 말이었지만 끝은 경민을 향하고 있었다.

오늘은 언주가 소개팅을 주선한 날이었다. 남자에 관심도, 의욕도 없는 정원을 위해 특별히 마련한 자리였건만 당사자인 정원은 차일피일 미루다 절교를 하겠다는 언주의 협박에 마지못해 나오고 있는 중이었다.

언주는 정원이 이러는 이유를 알고 있었지만, 이 세상엔 좋은 사람들도 많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정원은 중학교 때도 무뚝뚝했지만 지금은 더 심해져서 먼저 말을 걸어오는 이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원을 어려워하는 더 큰 이유는 정원의 뛰어난 외모 때문이었다.

정원의 엄마는 평범한 외모였지만, 과거 뭇 여성을 수백 명씩 울렸던 정원의 아버지는 속된 말로 얼굴 천재, 최고 미남 배우였다. 이런 아버지의 외모를 그대로 물려받은 정원은 어렸을 때부터 사람들의 입에 늘 오르내렸다.

“우리 정원이가 좀 무뚝뚝해도 속은 누구보다 더 깊은 아이예요. 생긴 거랑은 다르게 모태 솔로라 연애 고자예요. 그러니까 경민 씨가 우리 정원이 좀 잘 봐줘요. 네?”

유리 벽 바깥을 흘끔거리던 언주가 정원이 도착할 시간이 다가오자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솔직히 경민이 좋아하는 스타일은 언주 같은 여자였다.

“어! 저기 온다. 정원아! 여기야 여기!”

친구의 여자 친구에게 잠시 마음을 뺏겼던 경민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여자를 보며 저도 모르게 눈썹을 찡그리고 말았다.

대충 입은 옷차림에 운동화, 그리고 모자와 얼핏 봐도 화장기 없는 얼굴. 상대방에 대한 예의라고는 전혀 없는 옷차림이었다.

“버스가 늦게 와서. 미안. 많이 기다렸어요?”

하지만 전혀 미안함이 느껴지지 않는 말투였다. 경민은 실망감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가 마지못해 얼굴을 들었다.

하지만 정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헉!”

대충 봤을 때는 몰랐지만 예뻐도 너무 예쁜 얼굴. 틴트 하나 바르지 않아도 잔뜩 꾸민 어떤 여자보다 더 아름다웠다.

두꺼운 뿔테 안경과 모자로 얼굴의 반은 가리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가려질 외모가 아니었다.

“아, 아닙니다. 별로 안 기다렸어요. 밖이 많이 덥죠? 하하하!”

“네. 덥네요.”

경민의 질문에 간단히 대답한 정원은 여전히 무미건조한 얼굴이었다.

“뭐 마실래? 오늘 내가 쏜다. 경민 씨는 뭐 마실래요? 정원이 너는? 자기는? 나는 초코라떼 마실래.”

경민의 표정을 본 언주가 안심이 되는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아이스티. 더워.”

정원은 한마디 툭 뱉고 등받이에 기대며 눈앞의 남자를 무심한 얼굴로 쳐다봤다.

붉게 상기된 얼굴의 그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아픈가 궁금했지만 어차피 다시 볼 얼굴도 아니고, 관심도 없어서 모른 척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언주가 몇 달간 공을 들인 소개팅은 잔뜩 긴장한 경민과 소개팅 내내 단답형으로 대답하는 정원으로 인해 한 시간도 안 돼 끝났다.

정원의 외모에 마음을 빼앗겼던 경민은 자신에게 털끝만큼도 관심 없는 정원 때문에 마음이 상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갑자기 약속이 생겼다며 나가 버렸다.

“야이! 미친! 내가 너한테 경고했잖아! 민수 씨 친구니까 좀 잘 대해 달라고. 그런데 이게 뭐야! 이러면 내가 뭐가 되냐?”

언주가 참새처럼 땍땍거려도 정원은 남아 있는 아이스티를 시원하게 들이켰다. 당분간은 소개팅이니 뭐니 하는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갑갑했던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나 약속 있어.”

“몰라! 나 이제 너하고 절교야 절교! 히잉. 민수 씨한테 미안해서 어떡해! 야, 그리고 그 안경은 뭐냐? 시력도 겁나 좋은 년이 안경이 웬 말이니? 얼굴 그렇게 쓰려면 나 주든가! 맨날 왜 그 예쁜 얼굴은 가리고 다니는데?”

끊임없는 언주의 잔소리에 끄떡도 하지 않던 정원이 차를 다 마셨는지 벌떡 일어서며 싱겁게 웃었다.

“모르긴 뭘 몰라. 다 알면서. 어쨌든 나는 내 할 일 끝! 나중에 보자!”

자기 할 말만 하고 나가 버리는 정원을 원망스럽게 보던 언주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주 꼴 보기 싫어 죽겠어. 그래도 더럽게 예쁘네. 어휴…… 못된 지지배.”

욕을 퍼부었지만 언주의 얼굴은 근심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렇게 아무한테도 마음을 안 열면 어떡하지.”

정원은 미루던 숙제를 한 것처럼 속이 다 후련했다. 언주를 실망시키는 일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지만 남자 문제라면 달랐다.

차라리 돈 문제라면 아르바이트로 번 돈을 몇 달 치 다 털어서라도 줄 텐데.

“몇 시지?”

잠시 넋 놓고 있던 정원이 시간을 확인하고 버스 정류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에이씨, 늦겠네!”



*



장학금이 걸린 조별 과제라 마음이 다급해졌다. 운 좋게 바로 버스를 잡아타고 학교에 도착했지만 강의동까지 가려면 또 한참 뛰어야 했다.

막 시작된 초여름 날씨는 콘크리트 바닥을 뜨겁게 달구었고, 아래위에서 쏟아지는 따끈한 열기는 숨이 턱턱 막힐 만큼 지독했다.

한참 달리던 정원이 멈춰 서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데 옆으로 잘빠진 승용차 한 대가 쌩 지나갔다. 그와 함께 커다란 음악 소리와 깔깔거리는 웃음소리도 같은 속도로 사라졌다.

“에이씨, 팔자 좋은 것들.”

아쉬운 것도, 급할 것도 없는 저들은 죽어라 뛰어다니지 않아도,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아도 되니 성적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출발선부터 달랐기에 새삼 비교하며 비참해지지 말자 생각하고 정원은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운 날씨 탓에 강의동은 더 멀게 느껴졌다.

“에잇! 개같네.”

욕 한마디 뱉고 나니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스스로에게 주는 일종의 탈출구랄까?

시간은 어느덧 5시 5분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음이 급해진 정원은 강의실로 뛰어가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자신의 이름에 우뚝 멈추어 섰다.

“……정원이라며?”

응? 내 이름인데. 누구지?

정원은 누가 자신의 이름을 들먹이나 싶어 소리가 나는 쪽을 살폈다. 모이기로 한 강의실 안에서 나는 소리였다.

문을 열어 놓았는지 안에서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소리가 복도로 적나라하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응. 한정원. 너 잘 알아?”

“나야 모르지. 강의실에서도 맨 앞자리만 앉아서 뒤통수밖에 안 보이던데.”

“여자앤가?”

이야기를 나누는 목소리가 각각 달랐다. 정원은 들어갈까 하다 자신을 가십 삼아 나누는 이야기가 궁금해 잠시 귀를 기울였다. 들어서는 안 될 비밀 이야기를 엿듣는 것처럼 좀 긴장됐다.

“머리 긴 거 보니까 여자애 맞겠지.”

“야, 근데 그거 알아? 걔 맨날 옷이 똑같아. 청바지에 흰 티. 교복인 줄. 크크큭.”

“잘 모른다며 관심이 많네. 그런데 그 애는 왜 우리 조가 된 거야?”

“몰라. 조교가 그냥 짰겠지. 짜증 나. 우리끼리 하면 딱 좋은데. 안 그래 승재야?”

코맹맹이 소리로 찡얼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정원은 강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도 쑥덕대던 그들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기본적인 양심은 있는 모양이었다.

정원은 아무 데나 앉아 그들을 쓱 훑었다. 얼핏 봐도 비싼 것들만 몸에 걸친 애들이었다. 아무래도 좀 전에 빨간색 차를 타고 지나갔던 패거리들인 것 같았다.

‘유치한 것들.’

안에는 여학생 두 명과 남학생 두 명이 있었는데 향수를 얼마나 뿌려 댔던지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이것들하고 어떻게 매주 두 번씩 만나서 조별 과제를 하지?’

정원은 벌써부터 피곤했지만 과제는 해야 하니 좋으나 싫으나 그들에게 인사했다.

“한정원이에요. 여기에 끼어서 미안한데 나도 별수 없으니까 이해해 주길 바라요.”

정원은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는 사실을 은근슬쩍 흘렸다. 그러자 새침한 표정을 하고 있던 여학생 중 한 명이 얼른 표정을 바꾸며 다가왔다.

“아, 아니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열심히 해 보자. 너 성적이 되게 좋다던데…….”

다가왔던 지혜가 멍한 얼굴로 정원의 얼굴을 쳐다보다 점점 말끝을 흐렸다.

정원은 자신을 보는 익숙한 눈빛에 고개를 숙이고 안경을 고쳐 썼다.

“오늘은 뭘 하죠?”

정원의 질문에 형제인 줄 착각할 정도로 분위기가 비슷한 남학생 둘이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껑충하게 긴 다리와 새카만 머리카락, 햇볕이라곤 쬐어 본 일이 없는 사람처럼 하얀 피부. 그리고 다른 사람을 얕잡아 보는 듯한 거만한 눈빛.

어찌나 둘 다 싸가지가 없게 생겼던지 정원은 밥맛이 다 떨어질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제일 싫어하는 부류의 사람들이 이 조에 다 모인 것이 분명했다. 정원은 앞으로의 한 달이 정말 고되고 힘든 시간이 될 거라 확신했다.

“아직 정하지 않았으면 네 가지 주제 중에서 한 가지 정하는 것부터 하죠.”

정원의 말에 나머지 여학생 하나가 또각또각 다가오더니 두꺼운 종이 뭉치 하나를 턱 내려놓았다.

“우리가 자료 뽑는 건 했으니까 정리는 네가 하면 좋겠어.”

정원은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났다.

‘얼핏 보기에도 400페이지는 넘어갈 것 같은 자료를 혼자서 정리하라고? 이런 꼴뚜기 같은 것들을 봤나.’

정원은 대답 대신 종이 꾸러미를 풀어 다섯 등분으로 나눈 후 그들 앞에 한 뭉텅이씩 내려놓았다.

“정리는 같이 해야지. 누가 먼저 뽑아 놓으라고 그랬어? 주제 선택권도 나한테 안 줬으면서 이러는 건 아니지.”

정원의 말투는 꼬박꼬박 존대하던 것과 달리 차분하고 단호했다.

“너 우리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짙은 향수의 발원지인 여학생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앙칼지게 물었다. 하지만 이깟 거에 휘둘릴 정원이 아니었다.

“너는 내가 누군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