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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화

1. 거트루드의 밤(8)


“까악!”

포피는 저녁이 다 되어 가도록 오지 않는 샬롯을 생각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솜털이 보송한 회색 까마귀는 주인의 부재에 가장 높은 찬장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녀는 찬장을 타고 올라가 사냥에 성공하려는 치즈 고양이를 손뼉 하나로 품 안으로 날아오게 만들었다.

“냐아아아아아!”

“깍!”

죽었나?

아직 수명이 적어도 10년이나 남았는데 설마. 포피는 대수롭지 않게 발광하는 고양이를 끌어안고 저녁을 차렸다. 식탁에는 포피의 몫만 차려졌다.

마녀는 현재를 살았다. 그들은 죽은 자를 추억하지도, 없는 자를 그리워하지도 않았다. 포피는 샬롯을 아꼈다. 그녀와 있는 것을 즐거워했다. 그러나 포피는 샬롯이 없는 걸 걱정하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이대로 다시는 샬롯을 볼 수 없게 되더라도, 포피는 샬롯이 보고 싶다고는 끝내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샬롯이 온다면 기쁘겠지만, 오지 않는 게 그녀를 슬프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아마 마녀들이 으레 그러하듯, 포피는 샬롯이 죽어도 슬퍼하지 않을 것이다. 눈앞에서 그녀가 아프다면, 포피는 슬퍼하겠지만 말이다.

마녀는 과거와 미래를 그리지 않았다. 그들은 오로지 지금만을 살았다.

회색 까마귀가 창문 틈으로 빠져나갔다. 포피는 당연하게 문을 걸어 잠갔다. 그녀는 좋아하는 의자에 앉아 노래를 흥얼거리며 고양이를 쓰다듬었다. 어제 샬롯은 그녀의 발치에 앉아 재잘댔다. 오늘 포피는 그녀의 부재에 허전함을 느끼지 않았다.

추억 속에 사는 인간은 그래서 마녀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과거에 상처 받지도 미래를 걱정하지도 않는 존재를 어떻게 이해할까?



글로브 1번 골목에 위치한 에드워드 맥퀸의 저택 앞에 마차가 섰다. 저택의 집사는 마차에서 내리는 사람을 보고 아무도 모르게 입가를 파르르 떨었고, 레슬리는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성큼 걸어 들어가는 레슬리의 품에 안겨 있던 샬롯은 눈을 깜빡였다. 상황이 계속 휙휙 바뀌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레슬리!”

화난 기색이 명백한 에드워드의 부름에 레슬리는 눈썹을 추켜올렸다. 샬롯은 머리에 붕대를 돌돌 감은 채 뒤에서 나타난 남자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집주인인가?

“기운도 넘치지. 에드워드, 배고프지는 않아?”

“열흘이야! 거의 열흘을 나를 가둬 놔? 내 머리를 깨고!”

구겨진 옷에 창백한 얼굴,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남자는 레슬리에게 고래고래 소리쳤다. 레슬리는 귀찮다는 듯 그의 말을 흘려 넘기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벨벳 조끼와 흰 셔츠는 먼지로 회색빛을 띠고 있었고, 구겨져 있는 프록코트는 팽개쳐지듯 하인의 손에 던져졌다.

“난 폐하의 명을 받았어! 레슬리, 네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내 개가 다른 사람의 명령을 받았다니 슬프네.”

레슬리는 대수롭지 않게 비꼬면서 계단을 올라갔다. 반동으로 흔들리는 몸에 샬롯은 알록달록한 무늬가 그려진 와토 가운을 잘 여몄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걸까.

밀레나를 만나러 코와르 살롱에 갔고, 그리고 레슬리를 만나고, 밀레나가 떠나고, 레슬리가 샬롯을 들어다가…… 음. 저 남자 집에 왔다. 샬롯은 레슬리를 따라오며 소리치는 남자를 슬쩍 확인했다.

“가만히 있어.”

그녀의 움직임에 레슬리가 그녀를 품에 더 깊게 끌어안으면서 명령했다. 샬롯은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렸다.

샬롯은 도무지 레슬리가 왜 그녀를 여기로 데려왔는지 알 수가 없었다. 자고 싶어서? 그건 밀레나의 방에서도 가능했잖아?

“나라면 지금이라도 폐하께 가서 빌겠어!”

2층 복도를 쓸고 있던 갈색 머리의 하녀 하나가 그들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빗자루를 놓쳤다. 샬롯은 기껏 쓸었던 먼지들이 다시 흩날리는 것을 보고 안타깝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보다 정체를 숨길 생각이 없는 걸까. 아니면 그것도 생각하지 못할 만큼 화가 난 걸까.

“네가 아들이었다면 좀 더 좋았겠군.”

“레슬리! 제발, 네가 왕자라는 단 일말의 자각이나 책임 의식을 가질 수는 없어?”

3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의 난간에 기댄 채 레슬리가 처음으로 걸음을 멈췄다. 그는 몇 계단 아래에 서 있는 에드워드를 내려다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없어도 상관없잖아. 어차피 나밖에 없는데.”

샬롯은 위튼에 대한 애국심 따위는 아우디의 빠지는 솜털만큼이나 가지고 있지 않았고, 상식이란 것도 그리 멀쩡하게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아무튼 다음 대 위튼의 왕이 될 사람이 할 말이 아니란 것 정도는 깨달았다.

저런. 불쌍한 위튼.

레슬리의 얇은 입술이 기분 좋게 올라갔다. 그는 에드워드를 향해 조롱하듯 웃었다.

“왜? 날 죽이고 알리시아를 여왕으로 만들고 싶어?”

“아주 열렬히.”

짓씹듯이 단어들을 내뱉은 에드워드의 진저리 치는 얼굴에 레슬리는 안타까운 척 길게 한숨을 내뱉었다.

“너무하군. 친구.”

에드워드는 그 말에 완전히 폭발했다. 그는 붕대를 감은 이마를 붙잡으면서 몸이 떨릴 만큼 분노를 토해 냈다. 샬롯은 격렬하게 타오르는 에드워드의 눈을 볼 수 있었다.

“레슬리! 깨진 내 머리는 내가 네 친구라서 그랬나? 그 여자는 또 뭐야? 제발! 내가 수습할 수 있는 범위에서 미친 짓을 하면 안 되는 건가? 미쳐도 곱게 미치면 안 돼? 네가 쓰레기란 걸 증명하지 않고는 못 살겠어?”

레슬리는 짜증난 얼굴을 한 채로 분노한 에드워드를 향해 툭 내뱉었다.

“시끄러워. 에드워드.”

“레슬리!!!”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화가 난 에드워드를 뒤로 한 채 레슬리는 샬롯을 고쳐 안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3층 복도 왼쪽에 있는 방 안으로 들어선 레슬리는 발로 문을 닫고 샬롯을 소파 위에 앉혔다.

등받이가 없이 길고, 팔걸이까지 부드러운 천으로 씌워진 소파에 앉아서 샬롯은 방금까지 봤던 남자를 떠올렸다. 아무리 감정에 무딘 샬롯이라도 에드워드가 화났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아마 지나가던 개미가 봐도 알 수 있었을 만큼 분명했다.

“당신 친구가 화가 났어요.”

샬롯의 속삭임에 레슬리가 가만히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샬롯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건 샬롯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어떻게 하는 게 옳을지 고민했다.

그러나 그런 샬롯의 태도를 얌전하게 그의 뜻대로 굴겠다는 것으로 받아들였는지, 레슬리는 마침내 침묵 끝에 만족스럽게 입을 열었다.

“상관없어. 늘 예민한 상태라.”

나름 부드러워진 목소리였다. 레슬리는 파란 눈동자를 멍하니 굴려 대는 여자를 보고 그가 왜 그렇게 화가 나고 짜증이 났는지 잠시 잊어버렸다. 왜 도망쳤냐고 추궁을 할까 했었지만, 가만히 앉아 있는 그녀를 보니 별로 묻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늘 기분이 안 좋았다. 하지만 지금은 좀…… 괜찮았다. 레슬리는 좋다는 수식어를 굳이 붙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샬롯은 레슬리에게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또한 레슬리와 자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는 결론적으로, 레슬리와 함께 있지 않는 게 좋다는 생각에 빠르게 도달할 수 있었다.

“전, 그러니까…… 집에 가야 할 것 같아요.”

레슬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샬롯은 눈을 깜빡였다. 레슬리의 눈이 그녀의 얼룩덜룩한 화장부터 푸른 눈동자까지 훑어 내렸다.

“왜?”

“그러는 레슬리야말로, 왜 저를 여기로 데려왔어요?”

샬롯의 물음에 레슬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한참을 대꾸하지 않다가, 결국 길어지는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짜증스럽게 중얼거렸다.

“내가 널 살 거니까.”

“전 저를 팔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요.”

그녀가 판 것은 하루 동안의 시간이었다. 샬롯은 그녀 자신을 좌판에 올린 적이 없었다. 팔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사겠다는 건 뭐란 말인가? 아무튼 인간은 이상했다. 레슬리가 이상한 걸 수도 있었다.

“그럼 지금부터 팔아. 로테. 얼마를 줄까?”

아니 일단 팔고 싶지 않다니까. 돈은 샬롯도 많았다. 레슬리의 손이 그녀의 턱을 감쌌다. 샬롯은 그를 올려다보면서 눈을 찡그렸다. 레슬리의 차가운 눈과 달리 그린 것처럼 아름다운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샬롯은 자신이 제법 분명하게 말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슬리는 못 들은 것처럼 그녀의 뺨을 손가락으로 쓸며 부드럽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는 점점 굳어 가는 얼굴을 숨기지는 못했다.

“왜?”

너라서. 샬롯은 스치는 생각을 좀 더 곱게 포장하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레슬리의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갔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샬롯은 그가 그녀의 머리통을 토마토처럼 쥐어짜 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긴 제 집이 아니니까요.”

그냥 레슬리 웨이필드라는 남자와 엮이고 싶지 않은데. 음. 서로 그냥 평생 존재를 모르고 지내면 좋을 것 같았다. 그가 위튼의 왕자인 이상 그건 좀 힘들 수도 있겠지만.

레슬리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샬롯은 가만히 그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몇 번이고 눈을 깜빡일 동안 레슬리는 한 번도 눈을 깜빡이지 않았다. 그의 목을 긁고 낮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여기가 이제부터 네 집이야. 적응해.”

젠장. 아무래도 레슬리는 머리가 멍청한 모양이었다. 혹은 귀가 먹었던가. 여기가 어떻게 그녀의 집이 된단 말인가?



* * *



에드워드 맥퀸 공의 저택에서 일하는 하녀, 캐서린은 눈 밑의 점이 매력적인 여자였다. 그녀는 저택의 요리사인 한스 사이에서 이미 딸 둘을 둔 엄마이자, 저택의 하녀들을 총괄하는 하녀장이기도 했다.

“주인님.”

저택 주인인 에드워드가 화가 났을 때 접근할 수 있는 하녀는 그녀가 유일했다. 그녀는 에드워드의 유모인 체어 부인의 딸이었고, 에드워드도 내심 속으로는 누이처럼 여기고 있는 여자였기 때문이었다.

“레슬리가 데려온 여자한테 가 봐. 레슬리가 왜 데려왔는지 알아내.”

그녀의 목소리에 양 손에 얼굴을 파묻은 에드워드가 피곤과 분노가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솔직히 명령보다는 애원에 가까운 어조였다. 캐서린은 동생과도 같은 주인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주원인인 왕자를 속으로 원망하면서 방으로 향했다.

원래라면 에드워드의 저택에서 레슬리의 방문을 위해 준비해 둔 방으로 사용되고 있었지만, 이제는 웬 여자가 들어오게 된 그 방으로 말이다.

“안녕하세요.”

캐서린은 놀란 기색을 내보이지 않기 위해 황급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숙인 그녀의 시야에는 부풀린 치마 밑에 깔린 페티코트의 레이스 겹이 화려하게 자리했다. 캐서린은 그제야 극단의 배우들인 것처럼 칠한 얼굴뿐만 아니라 도무지 평상시에 입을 수 없을 것 같은 샬롯의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깨달을 수 있었다.

샬롯의 기준에서 그나마 얌전하다고 여겼던 드레스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캐서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순진하게 흘러나왔던 인사말처럼 여자는 가만히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알록달록한 옷과 형형색색의 화장을 칠한 얼굴 중에서도 선명하게 제 색깔을 뽐내는 푸른 눈동자가 캐서린의 움직임에 따라 굴러갔다.

“안녕하세요. 아가씨. 캐서린 테일러입니다.”

캐서린은 무난한 호칭을 골랐다. 그녀는 에드워드를 모시면서, 귀족들이 흔히 갖는 정부나 애인 따위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대개는 예민한 이들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호칭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이 마음에 안 든다고 매질을 할지도 몰랐다. 물론 에드워드가 그 꼴을 보고 있지는 않겠지만.

“혹시 제가 봉사할 일이 있을까요?”

캐서린의 저자세에 여자는 가만히 눈을 깜빡이다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앉아 있느라 잠깐 구겨졌던 치마를 대수롭지 않게 탁탁 쳐서 펴냈다.

“아뇨.”

샬롯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갑자기 자기 멋대로 떠들어 대더니 나가 버린 레슬리를 지금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정말 미쳤나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