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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동안 말 그대로 일 중독자 서준은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에만 파묻혀 살았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지만, 몇 달 동안 이렇게 둘이 말을 놓고 깨방정을 떤 적 없었다.

오늘 오후도 날씨가 괜찮았더라면 서울에 올라가 참석해야 할 회의가 다섯 개나 되었다. 스케줄 미루는 전화를 하면서 태우는 한편으로는 다행이다 싶었다. 서준도 좀 쉬어야 했다.

태우의 아버지는 서준 아버지의 운전기사였다. 태우는 서준이 살던 평창동 대저택 안에 딸린 집에 살았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집이었다. 태우 아버지는 서준에게 아버지 같은 역할을 했다.

‘그 사건’이 있었을 때, 기절한 서준을 업고 맨발로 뛰어 병원에 데려간 것도 태우 아버지였다.

‘그 사건’이 있기 전, 지금의 모습과 달리 서준은 유난히 겁이 많았다. 천둥 번개만 치면 서준은 베개를 들고 태우네 집 초인종을 눌러 대곤 했다.

태우는 아빠와 단둘이 살았다. 아빠와 태우가 한방에서 자고 있는데 서준이 들어와 아빠와 태우 사이에서 잠들곤 했다. 그럴 때면 아빠가 서준 등을 다독여 주었다.

아주 어릴 때 태우는 그런 서준을 질투하고 미워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질투는 차차 연민으로 변해 갔다.

그렇게 여리고 겁 많던 서준이 ‘그 사건’ 이후 저렇게 갑각류처럼 딱딱하게 변해 버린 게 안타까웠다.

태우는 서준과 동갑이었지만 태우는 서준을 터울 있는 남동생을 보듯, 서준을 돌보아 왔다.

서준이 회사의 크고 작은 일을 잘 해낼 수 있도록 기꺼이 서준의 팔다리가 되어 주었다.



* * *



조금 전, 태우와 서준이 메주 방에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간지럼을 태우고, 하늘에서는 우르르 쾅쾅 하고 ‘후 천둥 번개가 쳤던 그 시각이었다.

“무, 물…….”

번개 소리에 놀란 모양인지, 모처럼 정신이 돌아온 할머니가 물을 찾았다. 도미는 할머니 다리를 주무르다 벌떡 일어났다.

“할머니! 일어났어? 물?”

거실에서 물을 떠 오는데, 요란하게 내리는 천둥 번개의 굉음 사이로 메주 방에서 이런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를 뒤에서 이렇게 꼭 안았잖아?”

‘어? 이게 무슨 소리지?’

그녀는 귀를 쫑긋거렸다.

천둥 번개가 또다시 번쩍! 우르르 쾅쾅 쳐서 다음 대화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 말은 또렷하게 들렸다.

“나랑 같이 자자”

‘뭐라고?’

다시 번개가 쳐서 중간 말은 못 듣고 들려온 소리가 또 은밀하게 그녀의 귀에 들어왔다.

“지금도 해 봐. 내가 자 줄게.”

이게 무슨 소리야? 놀란 표정을 귀를 기울이는 도미에게 결정적인 말이 들렸다.

“나 이번에는 안 참아. 각오해!”

“헉.”

도미는 이 사이로 흘러나오는 비명 소리를 잽싸게 손으로 막았다. 그리고 들려오는 소리를 조합해 조용히 두 글자를 떠올렸다.

바로…… ‘게이’.

어쩐지. 너무 비현실적으로 숨 막히게 잘생긴 두 사람이다 했다. 두 사람은 아직은 세상이 허락하지 않는 사랑을 위해 이곳으로 밀월여행을 왔다가 뜻하지 않게 발이 묶였을 것이다.

‘그랬구나. 세상 사람들 눈을 피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구나.’

이 사랑도 연모봉에는 망부석이 있었다. 그곳에서 연인들이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전설이 있었다. 아마도 이 연인도 그 소원을 빌러 온 것이려니 싶었다.

도미는 고개를 흔들며 할머니 방으로 갔다.



* * *



서준은 눈부신 햇살에 눈을 떴다. 푸른 물감을 개어 놓은 듯한 가을 하늘이 창밖으로 보였다.

정말 오랜만에 불면증과 악몽 없이 푹 잤다. 늘 딱따구리가 사는 듯했던 머릿속에서 두통이 싹 사라졌다. 어제 저녁을 든든히 먹어서 그런지 빈혈과 어지럼증도 가셨다.

태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사장님, 잘 주무셨습니까? 하도 곤히 주무시기에 차마 못 깨웠습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지? 8시? 9시?”

“오후 12시입니다.”

“뭐? 12시? 어제 미룬 회의도 다섯 개인데, 오늘도 회의 스케줄이 아마 여섯 개 있지 않나?”

태우가 한 손에 핸드폰을 들고 빙긋 웃었다.

“일정 차질 없게 다 조정해 두었습니다.”

“근데 이건 무슨 냄새지?”

방문을 열고 나가자, 매캐한 연기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메주 냄새에 무감각해진 서준의 코 점막을 강하게 후려치는 냄새였다.

접시를 들고 거실에 들어오던 도미가 두 남자를 보고 말했다.

“식사하고 가세요. 뭐 예뻐서 차려 주는 건 아니고요. 울 할머니가 어릴 때부터 항상 지나가는 손님들에게는 정성을 다하라고 하셨어요. 그래야 복이 온대요.”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준다고, 도미는 전어를 부지런히 구웠다.

생각해 보면 저들은 어려운 사랑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도미는 세상 모든 사랑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특히 저 싸가지는 말하는 모양새로 봐서 사회생활도 못 하게 생겼다.

안 그래도 사회생활이 힘들어 보이는 사람이 성적 취향 때문에 사람들의 편견에까지 시달린다고 생각하니, 그가 가여워졌다.

그래서 밥 한 끼라도 제대로 먹여서 보내고 싶었다.

도미는 밥상을 차렸다. 밥상에는 흰 김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홍합탕에 파가 송송 들어가 있었다. 노릇노릇 탄 듯 안 탄 듯 구워진 전어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이윽고 그녀는 냉면 그릇을 들고 왔다. 탱탱하고 뽀얀 면발 위로 잘 익은 열무김치, 반숙 계란 반 개, 김 가루가 보기 좋게 놓여 있었고, 참기름이 흩뿌려져 있었다.

“열무국수예요. 요 앞 텃밭 열무를 솎아서 만들었어요.”

국수를 비비며 말했다.

“차린 건 없지만 많이 드세요.”

서준은 새콤달콤한 냄새에 군침을 꿀꺽 삼켰다. 태우도 흘러내리는 침을 닦으며 국수를 비볐다. 서준이 국수를 비비며 말했다.

“정말 차린 게 없긴 하군.”

“와, 그러면서 젓가락은 왜 들었어요? 당장 놔요.”

도미가 손에 든 젓가락으로 서준의 젓가락을 쳤다. 태우가 둘을 말리려는 듯 말했다.

“잘 먹겠습니다. 와, 가을 전어! 집 나간 며느리도 돌아오게 한다는 그 전어!”

태우는 그렇게 말하며 서준을 쳐다보았다. 태우는 오늘도 서준이 밥상에 넙죽 앉는 것을 보고 감격에 찬 표정을 지었다.

도미가 냉면 그릇을 들고 열무국수 국물을 쭉 들이켰다.

‘경박하긴!’

하지만 서준은 저도 모르게 도미 행동을 따라 하고 있었다.

“캬!”

열무국수 국물은 사이다처럼 입 안을 톡 쏘았다. 그동안 쌓여 있던 모든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듯했다.

이번에는 면과 열무김치를 건져 먹어 보았다. 입 안에서 새콤달콤 매콤화끈 아삭아삭하게 밀밭과 열무밭의 전통 축제가 벌어진 듯했다.

‘이 열무국수 이번 홈 쇼핑 아이템으로 만들어 봐야지.’

호로록호로록 쩝쩝. 자기가 이런 소리를 내는 줄도 모르고, 서준은 비빔국수를 폭풍 흡입했다.

이번에는 홍합탕을 크게 한 숟갈 떴다. 호로록 국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자, 피곤에 절어 있던 모든 오장육부들이 일제히 피로 회복을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도 숙취가 해소되는 느낌이었다.

그는 도미처럼 사발째 들고 국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집에 과외 선생님까지 불러 식사 에티켓을 배웠던 그로서는 처음 해 보는 동작이었지만,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지도 못했다.

국물이 사라진 국그릇에는 커다란 홍합이 열 개 정도 남았다.

홍합 하나를 껍질에서 떼어 입어 넣자, 진하고 깊은 바다 향기와 함께 짭조름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입 안에서 톡톡 터지는 홍합 알을 미처 다 씹기 전에 다음 홍합 알을 까서 먹었다.

태우가 세상에서 가장 배부른 표정으로 두 눈을 반달처럼 휘었다.

지난 23년간 서준이 저렇게 식탐을 부린 적 없었다.

그저 흐뭇한 마음에 전어 살을 발라 서준의 앞접시에 올려 주었다.

전어는 닭 가슴살보다 담백한 식감에 적절히 짠맛이 나 맛있었고, 탄 냄새가 맛을 돋우었다.

서준은 태우가 발라 주는 전어를 두 마리나 꼭꼭 씹어 삼켰다.

“꼭 개 같아요.”

도미가 먹는 데 정신이 팔린 서준을 턱짓하며, 태우에게 말했다.

“네?”

“예전에 저희 집에서 진돗개 한 마리를 키웠어요. 그 개한테 생선 주면 저렇게 넙죽넙죽 잘 받아먹었거든요.”

도미는 정말로 어릴 때 키우던 진돗개를 떠올리게 하는 서준의 식성을 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뭐든 자신이 해 주는 음식을 잘 먹어 주면 기분이 좋아지는 법이었다.

서준은 둘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줄도 모르고 맛있게 전어를 마저 먹었다. 기분 좋은 포만감이 온몸을 감쌌다.

식탁 위의 음식을 싹 쓸어 먹고 나서야, 두 사람 다 젓가락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민망함에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제는 밥을 안 먹을 거라고 해 놓고, 그녀가 차린 세 가지 음식을 제일 열심히 먹었으니까 말이다.

그녀에게 괜히 트집을 잡고 싶었다. 서준이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전어 살을 바르며 말했다.

“이 생선은 왜 이리 가시가 많지? 지금 나 골탕 먹이는 거야? 일부러 이거 구웠지?”

도미가 뭐라고 쏘아붙이려는데 태우가 말을 걸었다.

“아가씨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렇게 두 끼나 신세를 졌는데, 아가씨 이름이라도 알고 싶습니다.”

“됐어요. 우리가 언제 다시 보겠어요? 그냥 사랑도 예쁜 섬 처녀 해녀라고만 기억해 두세요. 헤헤헤.”

서준이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이 섬에 다른 섬 처녀도 사나? 난 아직까지 이 섬에서 예쁜 처녀는 못 봐서.”

도미의 표정이 험악해졌다. 저 싸가지는 다시는 상종을 안 하고 싶지만 친절한 태우에게는 어쩐지 영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일어나 서랍에서 발랄 해녀 명함을 꺼냈다.

“혹시 다음에 해녀가 직접 딴 해산물이 드시고 싶으면, 여기로 전화 주세요.”

이 말까지 하며 명함을 태우에게 내밀려고 했는데, 서준이 사기 물컵으로 물을 마시다 입술에서 피가 났다.

사기 물컵의 이 빠진 부분 때문에 입술에서 피가 난 것이었다.

서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는 소량이라도 피만 보면 예민해졌고, 온 신경이 곤두섰다. 바로 ‘그 사건’ 때문이었다.

서준은 휴지로 피를 닦아 내고, 이를 악물고 비릿한 피 냄새를 참아 냈다. 그는 자신을 그렇게 만든 도미에게 화가 났다.

“이렇게 물컵 하나 살 돈 없어 깨진 컵 쓰면서 그렇게 웃음이 나나? 이걸 긍정적이라고 해야 할까, 현실 부적응이라고 해야 할까?”

서준은 그냥 1절만 해야 할 말을 기어이 2절까지 했다.

“그렇게 자기 객관화가 안 되나? 하긴 뭐 그러니까 재개발로 남들 다 떠난 이 섬에 혼자 살고 있겠지.”

“뭐라고요?”

도미는 발끈하여 소리쳤다.

“이봐요. 사람 사정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요.”

도미는 분했다. 저 남자는 자신이 이 집을 떠나지 못한 이유도 알지 못하고 저렇게 사람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고 있다.

정말 싸가지를 밥 말아 먹었나 보다.

사랑도를 떠나지 못한 건 도미에게 이 집은 추억이기 때문이었다.

도미는 아홉 살 이전의 기억이 없었다. 하지만 엄마는 늘 도미에게 아빠에 대한 추억을 들려주었다.

아빠가 도미를 위해 만들어 준 그네는 지금도 마당에 있었다. 엄마와 함께 가꾼 화단도 있었다.

더운 여름 거실에서 더운 여름이면 엄마가 베이비파우더를 온몸에 토닥토닥 발라 주면서 재워 주던 곳이었고, 추운 겨울이면 화로에 할머니가 군밤을 구워 주며 옛날 얘기를 들려주던 곳이었다.

사랑도는 온통 도미의 추억 전부였고, 사랑하는 할머니의 추억 전부였다.

그런데 이 나간 컵 하나를 보고 남들 다 떠난 섬에 사는 부적응자라는 말을 함부로 내뱉는 사람을 보니, 화가 치밀었다.

도미는 그동안 이 섬에 리조트를 짓는다며, 돈이면 마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는 듯 구는 사람들을 많이 봐 왔다.

저렇게 사람의 겉만 보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는 정말 환멸을 느꼈다.

도미는 서준에게 쏘아붙였다.

“보아하니 금수저 같은데요. 그래요, 제가 가진 거 다 팔아도 그쪽 하루 유흥비도 안 되겠죠. 하지만 그걸 아셔야죠. 사람이 어떻게 돈만으로 살아요? 그런 태도로 살다간 언젠가 천벌받을 거예요. 사람 위에 돈인가요, 돈 위에 사람인가요?”

도미는 숨을 한 번 몰아쉬고 다시 쏘아붙였다.

“당신은 돈 말고 소중한 걸 가져 본 적, 있기나 한가요? 무언가를 지키려고 애쓴 적 있나요? 그래, 없겠지. 그러니까 저렇게 로봇처럼 돈돈거리겠지.”

서준은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도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머리를 망치로 맞은 것 같았다.

나한테 한 번이라도 저렇게 또박또박 대든 여자가 있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