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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월의 저택 1화

Prologue





12월이 지나고 나서야 겨우 밖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었다.

맨발은 이미 피로 엉망진창이었고 호흡이 가빴다. 아까 남자의 손에 목이 졸렸던 탓이다. 휘청거리는 몸을 바로하지 못하고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차갑게 손에 얽혀 오는 흙이 미치도록 사랑스러웠다.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다시 다리에 힘을 주어 일어났다. 갓 태어난 네발짐승 같았으나 흰자위를 파랗게 빛나게 하는 달빛 아래서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등 뒤에는 지옥과 천국을 넘나들게 만들었던 집이 있을 것이다.

한기가 올라오는 땅을 디디며 떠나는데 순간 등에 소름이 돋았다. 뒤에서 누군가가 자신을 쳐다보는 듯한 시선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안의 모든 것은 이미 죽어 버렸다는 걸 알고 있기에 무시하고 전진했다.

달이 밝았다.







1. 참가 (1)





눈을 감으면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우악스러운 손아귀에 잡힌 팔과 목이 또다시 아파 오는 환상통 속에서 시호는 몸부림쳤다. 도무지 벗어날 수가 없다. 억지로 들어온 살덩이를 입으로 받아 내며 공포에 떨고 있을 때, 또 다른 살덩이가 아래로 들어올 준비를 했다. 가히 경악스러운 광경에 상대를 밀어 버렸다.

침묵은 잠시, 어딘가에 부딪혔다 서서히 일어나는 실루엣이 피에 젖은 얼굴로 시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감히 어디서, 라는 말을 시작으로 무차별적인 폭행이 가해졌다.

시호는 눈을 떴다. 벌써 5년이나 지난 일이건만, 지독히도 생생했다.



“생활 패턴을 한번 바꿔 보는 건 어떨까요? 잠시 여행을 떠난다거나 친구의 집에서 잠을 잔다거나.”

비싼 돈을 주고 받는 상담에도 지쳤다. 담당 상담사는 그가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 간단한 조사라며 몇 페이지에 달하는 종이를 주고 빈 칸을 채우라 했었다. 그렇게 채워진 글들을 본 상담사는 시호에게 어떠한 설명도, 답도 주지 않고 혼자서만 아는 정보로 시호를 대했다. 몹시도 불만이었다. 심지어 상담사가 내린 결론은 정답도 아닌 것 같았다.

“이사를 몇 번이나 했어요. 그래도 악몽은 계속 꿔요.”

“과거의 트라우마가 문제인 거죠.”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단정을 짓고 있는 상담사를 힐끗 쳐다보고 다시 눈을 깔았다. 시호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있으니 그런 걸 꾼다는 건 전문가가 아닌 자신도 할 수 있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상담가에게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해 제대로 말하진 않았다. 상담사 역시 억지로 캐내기보다는 조금 더 시호에게 맞춰 천천히 이끌어 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사이 트라우마를 이겨 내는 방법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었다. 그럴 때면 상담사는 확실한 상황을 알아야만 더 좋은 방법을 알려 줄 수 있다고 말했다. 당연한 소리였다. 그러나 그날의 일은 도저히 말하기 어려웠다.

강간 미수였다.

실제로 당한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받은 충격이 약해지는 건 아니었다. 더군다나 상대가 내칠 수 없는 이라면. 바로 의탁할 곳 없는 어린 시호를 어릴 때부터 돌봐 준 마음씨 고운 부부의 첫째 아들이 한 일이었다. 아직 다 자라지 못한 소년의 몸을 만지고 입술을 억지로 비빈 것 역시 동갑내기 소년이었다.

처음엔 입술이었다. 그다음에는 혀였고, 또 그다음에는 목이었다. 가슴, 옆구리, 배. 불쾌한 접촉은 점점 밑으로 내려왔다. 심지어 오랜 기간 그렇게 만지고 핥아 놓고 이젠 자신을 만져 달라 요구했었다. 시호는 정말 싫었다. 그래도 자신이 당한 것처럼 소년을 만져 주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시호는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하며 돈을 부지런히도 모았다. 다 집을 나가고자 함이었다. 한여름이 되었을 즈음에는 목표로 했던 돈을 모아 작지만 싼 집을 골라 계약까지 마쳤다.

그런데 그 사실을 밝힌 날, 첫째 아들이 시호의 방에 술 냄새를 풍기며 찾아 들어왔다. 미수로 만든 것은 사고였다.

첫째 아들은 머리가 책상 모서리에 찍히고 열이 받았는지 피범벅이 된 얼굴로 시호를 폭행했다. 그리고 얼마 후 혼자 기절했다. 시호는 공포와 경멸로 몸이 부들부들 떨리는 와중에도 재빨리 옷을 챙겨 입고 그의 하의를 올려 입혔다. 모든 수습이 끝난 뒤에는 무슨 소리냐며 들어오는 은인 부부의 모습을 흐린 눈으로 바라보다 끝내 기절해 버렸다.

병실에서 정신을 차린 시호는 사정을 묻는 아주머니께 죄송하다는 말만 남기고 입을 닫아 버렸다. 퇴원한 뒤에는 짐을 싸 바로 고시원을 향했고, 약속한 날짜가 되고 나서야 드디어 계약된 집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도 그때까진 악몽을 꾸지 않았다. 진짜 악몽을 꾸게 된 촉발은 집 앞에 서 있는 첫째 아들의 모습이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지하 단칸방 앞에 불 꺼진 방 안을 들여다보려 애쓰는 남자가 보였다. 도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몰래 지켜보고 있자니 낯이 익었다. 시호는 남자의 정체를 깨닫자마자 경찰을 부르려던 핸드폰을 내려놓고 냅다 여관으로 향했다. 그러곤 다음 날 해가 뜨자마자 다른 집을 보러 다녔다. 집에는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근처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재빨리 짐을 챙기려 집 안에 들어갔을 때 시호의 얼굴은 새하얗게 질려 버렸다. 집 안 곳곳에는 이미 누군가가 다녀간 흔적들이 다분했다. 심지어 안에서 생활을 했는지 젖은 수건과 못 보던 세면도구까지 늘어서 있었다.

진심으로 아무도 없을 때 찾아온 것에 대해 안도하며 가장 중요한 것들만 챙긴 후 다른 짐은 다 버리고 도망쳤다. 집을 나선 뒤에도 한참 동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었다. 그리고 큰길로 들어선 뒤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부동산 업자에게 도움을 요청하니 지체 없이 경찰에 신고가 됐다. 다행히 신고자는 이미 계약이 끝난 시호가 아닌 부동산 업자가 돼 집주인과 힘을 합쳐 안에 있는 이를 몰아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 사건을 겪은 후부터 시호는 주기적으로 이사를 다녔다. 그렇지만 남자가 언제고 찾아와 집 안에 들어올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가시질 않았기에 그는 밤마다 무서움에 떨며 괴로운 밤을 보내야 했고, 그 불안감은 악몽으로 이어졌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시호만의 공포였다.

상담실을 나서며 앞으로는 심리 상담보다 바지런히 돈을 모아 치안이 좋은 동네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사람이 많은 곳이라면 괜찮을까 싶어 고시원을 간 적도 있었지만 오히려 얄따란 문짝과 도망치기 어려워 보이는 창문이 불안감을 증폭시켰다. 이럴 바에야 보안이 철저한 집을 구하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그 바람은 나중의 일이었다.

“네?”

시호는 흐릿한 얼굴로 입을 벌렸다.

“토요일마다 빠진 게 큰 원인인 것 같아.”

별다를 거 없는 생산 공장이었다. 자금 사정이 어려워 인원을 감축하거나 무단결근을 밥 먹듯 하지 않는 이상 공장에서 잘리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시호는 너무 황당해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가 일하는 공장은 자꾸만 빠져나가는 인력에 계속해서 구인 광고로 사람을 끌어 모으는 중이었다.

“우리 요 근래 토요일 풀 근무였잖아. 그런데 넌 계속 빠졌고. 어쩌겠어.”

팀장이 회사를 두둔하며 어깨를 두드렸다. 뭉툭한 손이 무거웠다. 어깨가 지나치게 내려갔다. 두드리는 손의 무게보다도 심리적인 이유였다. 시호는 이미 낮았던 자존감이 얇아진 것을 느끼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 탓이죠. 괜찮아요.”

괜찮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는 것은 그의 입버릇이었다. 이렇게라도 말해야 상대가 조금은 위안을 삼고 그로 인해 너그러워진 마음으로 자신을 다독인다는 사실을 어릴 때부터 알았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다. 자수성가형 부자였던 아버지 덕에 시호는 어릴 적 풍족했었다. 몸도 마음도 풍요로웠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받았다. 그러나 갑작스런 사고로 부모님이 사망하자 친인척들은 너나없이 돌변까진 아니었으나 난감한 기색으로 시호를 맡는 것을 거부했다. 결국 아직 초등학생이었던 시호는 돌봐줄 사람이 없어 대고모 댁으로 들어가야 했다.

고모할머니는 아주 노쇠한 인물로 그 밑에는 아내와 이혼하고 홀아비가 된 아들이 하나 있었다. 그는 고된 막노동으로 늘 피로했고 매일 같이 어린 시호를 닦달하며 제 수발을 들게 했다. 어린 것을 불쌍히 여기지 않은 것은 아니나 당장의 피로가 그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 또한 자신의 아들과 비슷한 또래인 시호를 보면 이젠 볼 수 없는 아들이 떠올라 함부로 사랑을 베풀지 못했다.

나중에야 어린 시호에게 겨우 마음을 열지만, 월급날 시호는 흥미도 없는 어린아이 장난감을 사 오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물론, 시호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 후, 고모할머니까지 유명을 달리했다. 모든 게 1년 안에 이뤄진 일이었다.

시호는 또다시 혼자가 되었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바로 한 부부를 만났다. 그 부부는 아주 오래 전, 그의 부모님께 빚을 진 자들로 그중 아내가 시호 어머니의 옛 친구였다. 새로운 어머니는 시호를 끌어안고 오랜 시간 엉엉 울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저를 빤히 쳐다보는 남자애가 하나 있었다.

그땐 그럭저럭 친했는데…… 뭐든지 시호가 우선이 되면서 서서히 관계가 비틀렸다. 한 가지 예로 시호의 생일이 더 빠르단 이유로 같은 나이의 남자애에게 형이라 부르게 했었다. 시호도, 남자애도 원하지 않았던 호칭이었다.



***



퇴사까지 약 한 달가량의 기간이 남았다. 회사는 한 달의 시간을 주었고 그 시간 이후엔 할 일이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시호는 무기력하게 일을 했고, 집에 가서는 맥주 한 캔을 마신 뒤 빨개진 얼굴로 곯아떨어졌다. 이렇게 잠들지 않으면 무서워하다 밤을 새 버리기 일쑤였다.

퇴사를 앞둔 일요일, 다행히도 이번 부모님 기일은 휴일이었다. 그는 고속버스에 올라타 창가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덥혀지지 않은 차가운 공기 속에서 어떤 남자가 인사를 해 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시호는 의문이 서린 얼굴로 고개만 까딱이며 인사를 받곤 더 이상의 말을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목도리를 하지 못한 목덜미가 시리게 드러났다. 남자는 그것을 보다가 다시 입을 뗐다.

“실례지만 자리 확인 좀 해 주시겠습니까?”

시호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꽉 차 있는 우등 버스 안을 확인한 뒤 사과부터 내뱉었다.

“죄송합니다. 자리에서 일어날게요.”

미리 예매를 하지 않고 터미널에 와 구매를 한 탓에 어디에 누가 앉는지는 몰랐다. 그래도 1분 남겨 놓고 복도 측에서 창가로 옮긴 것인데 딱 그사이에 자리 주인이 와 버린 것이다. 평소였으면 하지 않았을 일을 해 놓고 하필 그 한 번이 걸린 그는 스스로 가책을 했다. 우울한 얼굴이 창밖을 내다보지 못하게 되자 더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