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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 장소, 직업, 등은 창조적 전개상의 허구임을 밝힙니다.

「」의 언어는 외국어임을 알립니다.




1화







“율아. 유언장을 열 거다.”

박 변호사의 노회한 음성이 뒤에서 들려왔다. 신율은 서둘러 눈가의 물기를 거뒀다. 그러나 쉽게 몸을 돌리지 못했다. 울음기 서린 입술을 몇 번이고 달싹이다 겨우 입을 열었다.

“도착했나 보군요.”

율의 음색은 위태롭게 떨리고 있었지만 애써 담담함을 가장하고자 명료하게 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다부지게 두 주먹을 움켜잡았다.

정원에 떨어지는 햇살은 다정했다. 빛처럼 반짝이는 신록들에 자잘한 바람조차도 따뜻함을 머금었다.

마당 한편, 무더기를 이루고 있는 목금서 아래 검은 원피스를 입은 신율이 있었다. 검은색 치맛단은 넘실대는 바람에 서글프게도 흩날렸다.

검은 양복 차림의 박 변호사는 율을 안타깝게 바라보았다. 비서실장이자 집안과 깊은 인연이 있는 김기중이 성큼 다가왔다.

“이제 시작할 거야.”

기중은 율의 어깨를 다정하게 짚었다. 율은 차분하게 몸을 돌렸다. 말간 낯빛에 핏기 하나 없는 율. 그럼에도 눈길을 끌었다.

“저택은 그분 소유로 넘어가나요?”

차분한 물음이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박 변호사의 표정은 어두웠다. 기중 역시 얼룩진 시선으로 저택을 돌아보았다.

“아마도 그럴 거 같다. 주식과 지분, 그리고 차명 계좌로 넘긴 배분 역시도…….”

“넘어가는군요.”

“법이 그렇단다.”

“알아요. 설명해 주셨잖아요. 저는 괜찮아요. 박 변호사님.”

“뭐가 되었건 남기신 게 있으니 자리하자꾸나.”

“아버지가 남겨주신 것도 아직 있어요. 저는 염려하지 마세요. 정말 괜찮습니다.”

율은 두 사람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고 있었다. 곧 대학 진학을 목전에 두고 있다. 그러나 무일푼이 될 게 뻔했다. 거기에 당장 거처가 없는 율은 대학은 고사하고 어쩌면 남은 학기 동안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야 할지도 몰랐다. 율은 다시 흐리게 웃었다.

“전부터 기숙사에서 생활해 보고 싶었어요. 저, 다 컸는걸요.”

“그래. 곧 끝날 거야.”

박 변호사와 기중은 안타까운 시선을 나누었다.

율은 아직 어렸다. 하지만 몇 년 전 부친을 허망하게 잃은 뒤, 이제는 하나뿐인 조부까지 잃었다. 한때 20대 기업 안에 들었던 것이 무색할 만큼 이미 벼랑 끝으로 달려가고 있는 세권그룹이었다.

그의 부고를 뒤로하고 그룹의 분할, 배분 문제 등이 복잡하게 얽혀갈 태세였다. 누구도 현재를 지나 그다음의 일에 대해선 입을 열지 않았다.

현관 앞, 율의 내색치 못한 마음처럼 회색빛 구름과 동시에 거센 바람이 불어대며 궂은 날의 전조를 알렸다.

“미리 인사드릴게요. 어쩌면 안에서 못 드릴 수가 있으니까요.”

율은 깊게 허리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두 분 모두.”

기중은 차분한 율에게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안으로 손짓했다. 들어서자 먼저 자리하고 있던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는 이들이 있었다.

“언제까지 기다리게 할 작정이었니?”

도도한 음색이과 적대적인 시선이율에게 한 번에 꽂혔다. 관리가 잘 되어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황세연과 깜찍한 외향이 도드라져 모두의 눈길을 사로잡는 그녀의 딸, 신송임이었다.

“어머, 그 원피스. 어디 거야? 드 라종(De rajong)의 이번 신작. 맞지?”

혈연관계는 없으나 법적으로 묶인 인물들이었다. 송임은 율과 몇 개월 차이 나지 않지만 법적으로는 한 살 아래였다. 두 모녀가 그들의 비서진을 대동한 채 창백한 율을 맞이했다. 율은 고개 숙였다.

“벙어리도 아니고 원. 언제 네 입에서 고상한 인사말이 나오겠니?”

“나한테 먼저 보여 준다고 하고선 또 너에게 보낸 건 아니겠지? 나 화나, 엄마.”

송임은 쫑알거리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단 한 번도 율에게 ‘언니’라는 호칭을 사용한 적 없었다. 겨우 몇 개월 차이에 ‘언니’라는 대접은 치사해서 해 줄 수가 없다 했던가.

“호들갑 떨지 말렴.”

말은 그래도 제 자식이 사랑스러워 못살겠다는 듯 세연은 송임의 손등을 토닥거렸다. 아직 자리에 앉지도 못한 채 가만히 서 있는 율에게는 앉으라는 말도 없었다. 보다 못한 박 변호사가 준비된 서류를 꺼내 들었다.

“그럼, 열겠습니다.”

“드 라종에서 보낸 거야, 아니야!”

찰나의 순간, 송임이 버릇없이 끼어들었다. 앙칼진 눈빛이 당장이라도 율의 검은 원피스를 잡아 찢을 듯했다. 이번에는 기중이 나서려 했지만 율이 먼저 입을 열었다.

“드 라종인지 드라곤인지 모르겠네. 애초에 내 이름으로 들어온 상복이야. 그것을 입은 게 뭐가 잘못된 거지? 억울하면 그쪽에다 연락해서 보내 달라 해. 그럼 되는 거 아냐. 아님 벗어서 줄까?”

차분하면서도 묵직한 율의 반격이 아닐 수 없었다.

“누, 누가 벗어 달래? 그, 그냥 나에게는 안 보내고 한 번 밖에 보지 않은 너한테…….”

그녀의 당당한 눈빛에 당황한 송임이 말을 형편없이 더듬자 율은 본체만체 고개를 돌렸다. 그 모습이 괘씸한 황세연은 코웃음 쳤다.

“그냥 둬라. 격 떨어지던 차림새가 상복이라도 디자이너 옷을 입으니 인간처럼은 보이지 않니? 오늘만이라도 제대로 된 격식을 아는 것도 나쁘지 않지.”

황세연은 시선으로 상대를 깔보았다. 여전했다. 고작 옷차림에 왈가왈부 오로지 명품이라는 것에만 치중하며 살아온 화려한 삶이니 만큼 그저 수수한 신율은 눈엣가시였다.

“신경 쓰지 말렴. 이제 온전히 무일푼이 될 텐데 고작 옷 한 점 따위, 기부했다 치려무나. 우리와는 격이 다르잖니.”

황세연의 턱이 도드라지게 추켜졌다. 제 엄마에 동조하듯 송임도 그녀 옆에 바짝 앉으며 거만하게 율을 노려보았다. 그 모습들에 박 변호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부친을 잃은 뒤 율은 엄격하고 냉정했던 조부, 그리고 황세연과 송임 사이에서 메마른 세월을 보냈다. 그러나 곧 저들과 이별할 시간이 다가온다.

역시나 변함없는 황세연의 차디찬 시선과 태도에 쉴 새 없이 찰랑이던 물기도 말랐다. 그 점은 감사할 지경이었다. 비로소 율의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감돌았다.

그래, 이제 세상천지 저 혼자다. 슬픔을 애도할 여유도 없다. 이 순간을 헤쳐가야 한다.

율은 누가 권하지 않아도 태연하고도 당당한 모습으로 자리에 앉았다. 황세연의 눈빛은 더욱 사납게 치떠졌다. 이제 눈치 빠른 박 변호사가 언성을 높였다.

“알려 드립니다. 본 건에 대해선 법적으로 유효한 바 이의란 있을 수 없음을 명백히 하겠습니다. 먼저 회사 지분과 지방 몇 곳 회장님 소유지와 이 저택에 대한…….”

넓은 공간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그러나 율은 그 반대로 바짝 조여진 감정을 느슨하게 풀어냈다.

어느 틈에 붉게 내려앉은 햇살. 하늘이 물들어 갔다.

그리고 붉은 그림자를 지상에 뿌려낼 즈음…….

율은 단출한 짐을 챙긴 뒤 저택을 벗어났다.

뒤로 긴 그림자가 이어졌다. 계속하여 올라가야 할 끝없는 계단처럼 율이 가야 할 앞길은 한없이 열려 있었다.



***



달이 바뀌고 계절이 지나도 달라진 건 없었다.

도심 근교에 위치한 사립고교의 기숙사.

율은 기숙사로 들어가기 전 현관 위, 금빛으로 각인된 ‘dormitory’의 글자를 오랫동안 올려다보았다. 전국구이니 만큼 멀리 지방에서부터 치열한 경쟁을 뚫고 입학하기에 유수의 대학 기숙사만큼이나 명성이 자자한 이곳은 신청자에 한해 서류 심사를 거쳐 입소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졸업을 앞두고 학생처럼 전도유망한 학생이 안타까운 사연에 위축될까 재단에서 특별히 신경을 썼어요. 모쪼록 다른 잡음이 생기지 않도록 유의하고.”

율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사생활이 학생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그저 무난하고 조용히 졸업하고 싶은 마음이었다.

2층, 구석진 방이었다. 사감은 손수 문을 열어 주었다.

“모든 학생은 2인실이 원칙이나 학생은 중간에 입소하는 관계상 1인실입니다.”

율이 안으로 들어가자 멈춰 있던 썰렁한 공기가 얼굴을 스쳤다.

“감사합니다.”

사감은 어색한 미소를 지은 뒤 등 돌렸다. 사감이 나가자 율은 텅 빈 방 안을 찬찬히 살폈다. 벽에 붙여진 두 개의 싱글 침대. 두 개의 간이 책상. 또 두 개의 1인용 옷장은 정확히 대칭되어 있었다.

당분간 몸을 의탁할 장소가 생겼다는 것에 대한 안도일까. 일순 몸이 축 처졌다. 그때, 이상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때도 이렇게 창문을 바라보았었다.



“널 내 집에 들이는 것은 마지막 혈육이기 때문이다. 아이에게 필요한 모든 양육은 할 요량이야. 그러니 결혼해. 그러하다면 그 아이를 손녀로 인정하마.”



일방적인 통보에 이를 악문 신찬, 부친의 손을 꼭 잡은 채 엄격하기 그지없는 조부를 올려다보는 어린 율.

그들이 저택에 들어온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친의 의향 따위 무시한 채 법적 부부가 된 황세연과 그녀 소생인 송임이 가족으로 묶였다. 사람은 늘어났으나 저택은 전과 마찬가지로 서늘함만 가득했다.

그렇게 몇 년이 흐르고 뜻밖의 교통사고로 아버지를 잃었다. 부친을 보내고 방 안에 우두커니 앉아 보았던 창가의 풍경이 꼭 이러했었다.

그 차가운 집에서 적대적이고 냉정한 생활에 적응해 나가기를 수년, 이제 마지막 혈연인 조부마저도 잃었다.

율은 생각을 갈무리하고 움직였다. 단출한 짐을 차분하게 정리하는 손끝은 야무졌다. 가장 마지막으로 손에 든 것은 박 변호사가 전해 준 서류 봉투였다.

손에 봉투를 든 율은 침대에 앉았다. 손끝으로 가만히 봉투 끝을 쓸었다. 봉투 입구는 붉은 인주로 마감되어 있었다. 껍질만 남은 세권그룹의 수장인 신 회장이 남긴 것. 그러나 궁금하지는 않았다.



“알려 드립니다. 본 건에 대해선 법적으로 유효한 바 이의란 있을 수 없음을 명백히 하겠습니다. 먼저 회사 지분과 지방 몇 곳 회장님 소유지와 이 저택에 대한 부분입니다. 저택은 황세연 씨와 자녀께 상속되겠습니다. 지방에 위치한 임야는 부족한 재원을 마련키 위해 세권의 법적 담보물로서…….”

“저택은 당연히 그렇다 치더라도 법적 담보? 아버님의 개인 자산일 텐데 세권의 빚을 탕감하기 위해 넘어간단 말인가요? 그 땅, 시세만 해도 족히 몇 백억 가까이 될 텐데요?”



수많은 은행 빚과 차압된 유산에 질겁한 황세연. 변호사가 유언장의 내용을 발표할 때마다 수많은 빚, 차압 등등 우그러진 인상을 펼 기미가 없었다.



“회사 지분은요?”

“주주들의 동의하에 매각이나 합병 수순이 될 것이며 전문 경영인들이 나서서 수습하게 됩니다. 그리고 황세연 씨. 이제는 회장님과의 계약을 이행하셔야 합니다.”



징징거리는 송임을 더는 참지 못했던 박 변호사가 노련함을 발휘했다. 비서실장 기중 역시 거드는 눈빛으로 세연을 응시했다.



“알고 있어요.”

“확인 절차상 물었습니다. 그럼, 상속은 처리되는 대로 법적인 절차를 밟겠습니다.”

“회장님 뜻은 충분히 알겠고. 그럼 저 아이에게는 무엇을 남겼죠? 설마 우리보다 더한 것을 남긴 건 아니겠지?”



황세연은 턱짓으로 율을 가리켰다. 송임은 몸을 앞으로 내밀며 혹시나 좋은 것을 받게 될까 눈을 부라렸다. 모두의 귀와 눈이 박 변호사만 향했다. 오직 관심 없는 율만 제외하고.



“자필 편지만이 전해질 것입니다.”



그럼 그렇지. 숨길 생각도 없는지 미소가 한가득한 얼굴로 황세연과 송임은 쾌재를 불렀다. 도도한 웃음, 모녀는 똑같은 자세, 닮은 미소로 그제야 안심된 듯 율을 응시했다. 현대에서도 계급 사회가 있다면 자신들은 상류층이고 율은 하류 계급이라는 눈빛이었다.

같잖았다. 그러나 내색하지 않았다. 율은 오직 자신에게 힘내라 눈길을 보내는 박 변호사와 기중을 볼 뿐이었다. 황세연은 더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비서진에게 손짓했다.



“차 대기 시켜요. 참, 친정으로 가기 전에 강변에 있는 실내 디자이너 사무실에 들렀다가 갑시다.”

“저번에 미팅했던 그 디자이너? 너무 좋아! 이 집, 촌스럽게 고리타분했는데.”

“그렇지. 이렇게 좋은 대지 위의 저택을 이렇게 그냥 둘 수는 없지.”



그때 율은 처음으로 당황했다. 조부의 저택, 비록 오래된 저택이지만 아버지가 정성 들여 가꾼 정원이 있다.

출산 이후 점점 쇠약해지는 몸을 지탱 못 하고 생을 달리한 모친. 타국에서 힘들게 자신을 부양하며 살았던 부친이 한국으로 다시 돌아온 이유, 그것은 율을 잘 키워 보고 싶다는 부정(父情)에 기인함을 알고 있었다.

율과 함께 돌아오는 조건으로 조부는 쓰러진 기업을 살리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빌미로 황세연과 재혼을 권유했다. 그 당시 황세연의 집안은 사채로만 이익을 취득한 별 볼 일 없었기에 그 누구도 그녀와 연을 맺자는 정재계 인사들은 없었다. 그렇게 부친과의 결혼은 성사되었다.

“후우.”

마침내 의지를 불태운 율은 조부가 남겼다는 편지를 보기 위해 서류 봉투를 열었다.

“이게 뭐예요, 할아버지!”

저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났다. 봉투 안에서 나온 것은 편지가 아니었다. 색실로 묶인 한지 봉투 한 장이었다. 특이하다면 봉투에 실이 묶였다는 것. 율은 그것을 풀었다.

“대체 이게.”

봉투에서 나온 것은 역시나 한지 한 장과 바닥에 떨어진 명함 한 장. 그게 전부였다.

“이건 또 뭐고.”

한지에는 한자로 휘갈긴 이름과 생년월일로 보이는 글자가 먹으로 쓰여 있었다. 율은 바닥에 떨어진 명함을 주워 들었다. 명함의 감촉은 묵직했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그것의 무게 따위 뭐 그리 중하겠느냐마는 느낌이 그랬다. 율은 한자가 쓰인 한지를 내려놓고 진하게 새겨진 명함을 읽었다.



알칸 M&A 한국 지사. 알렉스. 최준환



난감했다. 무엇을 바란 것은 아니나 참으로 허망한 심정이었다. 고작 명함 한 장과 한자로 휘갈긴 종이가 신 회장이 손녀인 신율에게 남긴 전부라니.

“이런 게 기막히단 걸까.”

급작스런 감정이 들었다. 그것은 궁금증도, 허탈함도 아니었다. 아주 자그마한 분노였다. 그래도 뭔가를 기대했나 보았다. 율은 희미하게 웃었다.

이유가 있겠지. 분명. 그래, 있을 거야. 꼭 있어야 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