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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리브가 감격한 눈망울로 샘을 올려다보았다. 물론 떨어진 음식을 주워 먹을 생각은 없었지만, 한낱 짐승이 리브를 챙겨 줬다는 것만으로도 감동적이었다.

리브는 샘에게 다가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샘은 털을 바싹 세우더니 고기를 물고 멀찍이 달아나 버렸다. 변덕이 심한 고양이 마음을 누가 알겠느냐마는, 아무래도 샘은 리브에게 스테이크를 자랑만 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결단코 샘의 고기를 빼앗아 먹을 생각이 없었던 리브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흙 묻은 고기도 고기라고, 스테이크를 봤더니 배까지 고파 와 더욱 서러워졌다.

샘은 리브에게 알은척한 것이 언제였냐는 듯 뻔뻔한 얼굴로 인도를 누볐다. 문득 저 뚱뚱하고 게으른 고양이가 이 먼 곳까지 나와 있는 이유가 궁금해진 리브는 샘의 뒤를 졸래졸래 쫓기 시작했다.

‘그냥 좀 궁금한 것뿐이야! 절대 고양이 먹이를 빼앗으려는 건 아니야! ……근데 혹시 한 입 달라면 줄까?’

리브는 절대로 샘의 고기를 얻어먹을 생각이 없었지만, 입가에서는 침이 흐르고 있었다.

샘은 꼭 정해진 목적지가 있는 고양이처럼 빠릿빠릿하게 걸었다. 리브는 샘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곤한 다리를 재촉해야만 했다.

샘의 발걸음이 멎은 곳은 어느 생선 가게 앞이었다. 생선 가게에 도착하자마자 샘은 물고 있던 스테이크를 한입에 꿀꺽 삼키더니 “야옹.” 하고 간질거리는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가게 안에서 덩치 큰 아주머니가 후다닥 뛰어나와 샘에게 생선 한 미를 던져 주었다.

“오늘도 왔구나! 생선이 그렇게 좋으니? 맛있게 먹으렴.”

생선 가게의 주인아주머니는 우람한 겉모습과는 달리 마음이 여리고 따스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샘이 생선을 먹는 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샘의 등허리를 쓰다듬었다.

샘은 먹이를 내어 준 생선 가게 주인에게 기꺼이 그의 털을 만질 권리를 부여해 주었다. 주인아주머니는 무척 기뻐하며 샘에게 고양이용 우유를 따라 주기까지 했다.

‘오……. 오오!’

리브는 눈을 반짝거리며 샘의 저녁 식사를 훔쳐보았다. 세상에 이렇게 쉽게 음식을 얻는 방법이 있었다니! 이제는 아예 샘이 존경스러울 지경이었다.

배가 빵빵하다 못해 뱃살이 땅에 닿을 지경이 될 때까지 포식한 샘은 아쉬움 없이 생선 가게를 떠났다. 열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 모든 과정을 지켜본 리브는 샘의 모습에 아주 깊은 영감을 받았다.

‘그래! 동물이라고 굳이 야생 생활을 해야 하는 건 아니지! 나도 쟤처럼 인간한테 밥을 얻어먹고 살면 되겠다!’

이건 적어도 야생 동물이 되겠다는 생각보다는 훨씬 그럴듯해 보였다.

새끼 여우의 모습을 한 리브는 샘보다 몇백 배는 사랑스러웠고, 모든 인간은 귀여운 것을 좋아했다. 리브는 태어나 단 한 번도 여우의 모습을 한 자신을 예뻐하지 않는 사람을 본 적 없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밥을 줄 인간을 잘 고르는 일이었다.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사람이 많이 모여 있는 번화가로 가야 했다. 도로 이곳저곳에 메인 스트리트의 방향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었으므로 번화가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번화가에 가까워질수록 리브를 발견하는 행인이 많아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진 채 사랑스러운 아기 여우를 쳐다보기 바빴다. 그중에는 물론 리브에게 먼저 호의를 보이는 사람도 많았다.

그러나 리브는 번번이 그들을 거절했다. 자신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이들은 왠지 모르게 의심스러웠다. 메리는 낯선 사람이 다가오는 것을 항상 경계하라고 말했고, 메리의 말은 리브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그녀의 뇌리에 콕 박혀 있었다.

얼마 안 돼 또다시 누군가 리브에게로 다가왔다. 그는 무거운 뱅뱅이 안경을 콧방울까지 내려 쓴 덩치 큰 남자였는데, 서늘한 가을 날씨 속에서 저 홀로 더운 숨을 학학 내뱉고 있었다.

“헉, 헉, 아가야, 헉, 혹시, 헉, 길을 잃었니? 헉, 우리 집에 헉, 같이 갈래? 헉헉.”

연신 밭은 숨을 몰아쉬는 남자는 수상하기 그지없었다. 경찰서 앞 어딘가에 남자의 얼굴이 그려진 수배 전단이 붙어 있다고 해도 놀랍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실상 남자는 나쁜 사람이 아니었다. 그저 저 멀리서 길 잃은 강아지를 발견하고 먼 거리를 달려온 가슴 따듯한 아저씨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의심할 여지없는 전형적인 변태처럼 보였고, 당연히 리브는 기겁하여 달음박질쳤다.

“아앗……!”

남자가 아쉬운 탄성을 내뱉었다. 민들레 홀씨처럼 보들보들한 털을 가진 아기 여우는 한순간에 작은 점이 되어 사라져 버렸다.

‘아쉬워라. 저 강아지의 평생을 책임지고 싶었는데!’

실망한 남자가 하릴없이 서서 입맛만 쩝쩝 다셨다. 리브가 바라 마지않던 준비된 집사는 그 외양 탓에 처참하게 버려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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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 한편에서 그런 내용의 현수막이 연신 펄럭거렸다.



리브는 변태로 추정되는 남자를 피해 급하게 아무 골목으로나 들어섰다. 길을 잘못 든 모양인지, 앞으로 나아갈수록 행인의 모습을 찾기 어려워졌다.

하긴 어느덧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안전 의식이 제대로 박혀 있는 사람이라면 이 시간에 거리를 헤매고 있을 리 없었다.

길이 끊긴 곳엔 익숙한 브랜드의 호텔이 있었다. 어쩐지 로비가 영 초라하다 싶더니, 리브가 있는 곳은 정문이 아니라 샛문이었다. 보안 요원 두 명이 샛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을 뿐, 손님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는 리브를 주워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아무래도 번화가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지만, 더는 걸음을 뗄 기운이 없었다. 리브는 맨바닥에 힘없이 찰파닥 주저앉았다.

그때, 까만 리무진 한 대가 호텔로 들어섰다. 리브는 왠지 모르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그 차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리브는 그것이 곧 메리가 종종 업무를 보러 갈 때 이용하는 얌전한 리무진과 같은 차라는 것을 알아챘다. 메리는 이 차를 두고 ‘언론 앞에서 점잖아 보여야 할 때 타는 차’라고 칭한 바 있었다.

리브가 조금만 더 기운이 있었더라면 메리의 것과 달리 이 리무진에는 번호판이 없고, 그 대신 은빛의 독수리 모형이 장식되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겠지만, 지금의 리브에게는 그런 일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조용하게 호텔로 들어선 까만 리무진은 보안 요원 앞에서 멈춰 섰다. 보안 요원이 운전석으로 다가가자, 창문이 열리고 무테안경을 쓴 중후한 노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노신사와 보안 요원이 소리를 낮춘 채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나눴다.

리브는 열린 차창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그 노신사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연극배우처럼 기른 콧수염과 왁스를 발라 깔끔하게 넘긴 흰 머리, 낡았지만 고풍스러운 양복과 구두가 마치 동화책 속에 나오는 할아버지처럼 인자한 인상을 풍겼다.

그래, 바로 저 사람이다! 리브의 마음속에 강한 확신이 차올랐다.

사실 리브에게는 할아버지, 할머니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리브는 날 때부터 조부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메리는 이따금 리브에게 리브의 조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곤 했다. 메리의 이야기 속에서 리브의 조부모는 언제나 대단한 위인이자 존경하기 마땅한 인물이었다. 리브는 조부모의 얼굴 한 번 본 적 없었으나, 그들을 무척 사랑하고 있었다.

심지어 노신사는 리브의 할아버지를 조금쯤 닮은 것도 같았다. 리브는 노신사가 좋은 사람일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리브는 마지막 힘을 다해 리무진까지 달려갔다. 때마침 노신사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성인 손바닥보다도 작은 여우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고 차 안으로 숨어들 수 있었다.

‘좋아! 어디로 가는지는 몰라도 일단 따라가 보자!’

언젠가 교내 서점 주인이 자신이 비만 고양이 샘을 주운 것이 아니라, 샘이 제멋대로 서점에 터를 잡은 것이라고 말한 적 있었다. 그는 이미 서점에 눌어붙은 샘을 쫓아내기도 뭣해서 그냥 밥을 주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리브도 샘의 성공 신화를 본받아 그녀 마음대로 노신사의 차 안에 터를 잡았다. 여우의 모습을 할 때면 이상하게도 구석진 곳이 좋아졌기 때문에, 조수석 아래로 꾸물꾸물 숨어들기까지 했다.

노신사는 여전히 차 밖에서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우의 귀는 밝은 편이지만, 엔진 소리가 시끄러워 그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다.

리브는 귀를 쫑긋 세워 그들의 대화를 엿듣는 것보다는 몸을 동그랗게 말고 잠을 자는 편을 택했다. 온종일 고된 노동을 한 다리가 피곤해서 견딜 수 없었다.

리브가 막 잠에 빠져들기 직전, 뒷좌석의 문이 열리며 누군가 차에 올랐다. 노신사 또한 앞좌석에 올라타 운전대를 잡았다. 두 사람은 이내 알 수 없는 목적지를 향해 차를 달리기 시작했다.

리브는 몰려오는 잠기운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피로만큼 효과적인 수면제는 없었기 때문에, 리브는 코 한 번 골지 않고 조용히 깊은 잠에 빠졌다.



✿ ✿ ✿



세드릭은 리무진의 뒷좌석에 느슨하게 앉아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벌써 일주일째 제대로 된 잠을 취하지 못한 탓에 시야에 실체 없는 부유물이 둥둥 떠다녔다. 그중 몇 개는 눈을 감았다 떠도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의 신경을 어지럽혔다.

특히 오늘은 유난스러울 만큼 거슬리는 것이 있었다. 그건 의지를 가진 것처럼 살랑살랑 나풀거리는 금색 솜털이었다. 미간을 꾹꾹 눌러도 보고, 한참 동안 눈을 감았다 떠 보기도 했지만, 금빛의 솜뭉치는 그의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휴이, 저건 뭐지?”

세드릭은 특유의 무심한 말투로 물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는 것인지 혹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인지 헷갈리는 어조였다.

말없이 운전에 열중하고 있던 휴이가 룸 미러를 흘깃 쳐다보았다.

“죄송합니다, 왕자님.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저거 말이야. 글러브 박스 아래에 뭐가 있는데.”

“조수석에 말씀입니까?”

때마침 차가 신호에 걸렸다. 정지선에 정확히 멈춰 선 휴이가 고개를 숙여 세드릭이 언급한 곳을 확인했다. 과연 정체불명의 동그란 솜뭉치가 그곳에 있었다.

“이런 것을 여기 둔 일이 없습니다만……. 잠시 차를 세워서 확인해 봐도 되겠습니까?”

“됐어. 거의 다 왔으니 그냥 가.”

세드릭은 여전히 남의 일을 대하는 듯한 무신경한 어조로 지시했다.

금빛의 무언가는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움직였지만, 딱히 중요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세드릭은 그것에게서 흥미를 잃고 다시금 두 눈을 감았다.

휴이는 세드릭의 명령대로 착실하게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목적지가 코앞이었다. 쭈뼛하게 솟은 성의 첨탑이 가까운 곳에서 제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지는 베르툼 왕성, 일명 ‘사계의 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곳이었다.

베르툼 왕성이 ‘사계의 성’이라는 별명을 얻은 것은 각 계절의 모습을 담은 네 채의 큰 성을 중심으로 설계되었기 때문이다.

네 채의 성 중 가장 강렬한 인상을 주는 성은 작열하는 태양의 모습을 형상화한 여름의 성으로, 베르툼 왕실은 왕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왕실의 자산을 충원할 목적으로 여름의 성을 통째로 관광객에게 개방하고 있었다.

여름의 성은 낮에는 햇빛을 찬란하게 반사하는 모습으로, 밤에는 조명을 이용한 화려한 일루미네이션으로 유명했다. 덕분에 여름의 성에는 낮이든 밤이든, 눈이 오든 비가 오든, 온갖 곳에서 온 사람들이 사시사철 장사진을 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