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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거대한 구름층을 뚫은 비행기가 고도를 낮추며 서서히 하강했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인천공항까지 30시간에 가까운 비행시간과 2번의 경유지를 거쳐야 하는 지루한 여정이었다.

착륙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을 때야 지안은 책장을 덮고 기내의 좁은 창으로 보이는 흐린 회색빛 바다를 내려다보았다.

가을을 지나 겨울을 바라보는 계절, 시야로 다가드는 서늘한 풍경 탓일까. 오랜만에 찾은 고국이 반갑다기보다는 서먹한 기분을 끌어냈다. 아니, 어쩌면 쫓기듯이 고국을 떠나야 했던 과거의 기억이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일게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저기.”

복도를 사이에 두고 앉은 옆 좌석의 누군가가 지안에게 말을 건넸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사인 한 장 부탁할게요. 저 윤지유 씨 팬이거든요.”

말을 건 사람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였다. 예닐곱 되어 보이는 아이와 나란히 앉은 걸 보니 가족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양이다.

“죄송하지만, 저는 윤지유가 아니에요.”

지안의 깍듯한 대답에 여자의 얼굴에 당황한 표정이 스쳐 지났다.

사실 그녀가 말한 유명 여배우 윤지유는 지안과 한날한시에 태어난 쌍둥이 언니였다. 하지만 지유가 어린 시절에 헤어진 언니라는 말은 할 수 없었다. 괜스레 복잡한 가정사를 꺼내서 공인인 언니를 곤란하게 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앗, 죄송해요. 윤지유 씨와 닮아서 저도 모르게 그만.”

과하다 싶을 만큼 호들갑스러운 사과에 주변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로 모였다.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부담스러워진 지안은 쓰고 있던 모자를 더욱 깊이 눌러썼다.



지안이 쌍둥이 언니의 연락을 받은 건 일주일 전의 일이었다. 남수단에서의 고된 캠프 생활을 마치고 남아공에 있는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막 짐을 풀고 있을 때, 국제 전화가 걸려 왔다. 한국에서 영화배우로 활동하는 언니, 지유였다. 지안은 오랜만 걸려 온 전화가 반가워서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째서일까, 전화선 너머에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지안은 초조한 기분이 들어서 언니의 이름을 불렀다.

“지유 언니?”

그제야 전화선 너머에서 ‘지안아.’ 하며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 무슨 일은. 그냥 네 목소리가 듣고 싶어 전화했어.

아무 일도 없다고 했지만, 지안은 본능적으로 언니 주변에 안 좋은 일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여덟 살 무렵, 부모님의 이혼으로 언니와는 원치 않은 생이별을 해야 했다. 지안은 다큐멘터리 감독이었던 아버지를 따라서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올랐고 몸이 약했던 지유는 어머니와 함께 한국에 남았다. 이듬해 어머니의 재혼으로 언니와 연락이 끊겼는데, 그 후, 두 사람은 오랫동안 서로의 소식조차 모르고 지냈다.

지안이 대학에 입학할 무렵, 아버지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는데 어머니는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언니와 함께 지안을 찾아왔었다. 어머니는 함께 살자 했지만, 지안은 어머니의 권유를 거절했다.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아버지와의 추억이 깃든 남아공을 떠나고 싶지 않았고 그녀 나름대로 하고 싶은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삼 년 전, 어머니마저 지병으로 세상을 떠나자, 언니로부터 부쩍 연락이 잦아졌다. 지안 역시 바쁜 와중에도 언니의 안부를 챙겼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으나, 세상에 남은 혈육이라고는 두 사람뿐이니, 서로에게 애틋한 마음이 드는 게 당연했다

지안은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저녁 8시, 남아공은 늦은 저녁이었으나, 서울은 새벽 시간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잠들어 있을 시간에 홀로 깨어 전화를 걸었다는 자체가 언니의 마음이 편안하지 않다는 증거였다. 난민구호 캠프에서 심리 상담가로 일하는 지안은 상대가 마음을 열지 않을 때,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지를 오랜 경험으로 터득했었다. 서둘러서도, 강요해서도 안 된다, 다그치기보다는 긴장을 풀어 주는 게 가장 중요하다.

지안은 애써 밝은 목소리를 지어냈다.

“얼마 전에 언니가 출연한 영화를 봤어. 액션 영화는 처음이라고 걱정하더니, 경찰 역할이 잘 어울리던데.”

― 영화는 그럭저럭 잘나갔는데, 관객 반응은 별로였어.

언니의 기운을 북돋고 싶어서 꺼낸 화제였는데, 기운 없는 목소리를 들으니 절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 그보다 지안아…….

무슨 말을 하려는지, 지유는 잠시 말을 끊었다.

― 너는 계속 그렇게 지낼 거야? 계속 떠돌이처럼 지냈으니 이제는 정착할 때도 되었잖아.

지안은 다큐멘터리 감독인 아버지를 따라서 다양한 나라를 여행했다. 그녀가 가장 먼저 깨달은 사실은 세상은 너무도 불공평하다는 것이었다. 문명의 혜택을 누리는 사람과 인간이 누려야 할 최소한의 생존권마저 위협받는 사람들.

그것은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극과 극을 이루며 불균형했는데, 그런 사실을 깨닫고 고민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지안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작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 눈에는 구호 캠프를 오가며 지내는 지안의 모습이 떠돌이처럼 보이는 모양이다.

“지금 하는 일이 좋아. 힘들지만 보람 있는 일이고.”

지안의 대답이 못마땅한지, 지유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한날한시에 태어났지만, 자라 온 환경 탓인지 언니와는 가끔 뜻이 맞지 않을 때가 있었다. 부유한 집에서 태어나 평생 물 한 방울 손에 묻히지 않고 살았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만나면서 인생 밑바닥까지 떨어졌다고 입버릇처럼 말했었다.

어머니는 풍족했던 과거의 시간을 그리워했고 아버지 역시 그런 어머니를 버거워했다. 성장 과정이 달랐던 두 사람이 결국 공존하지 못하고 갈라선 것처럼 성장 과정이 다른 언니와 지안의 사고방식이 같을 순 없었다.

그러나 서로가 가진 신념과는 별개로 두 사람은 서로를 그리워하며 자란 쌍둥이 자매였다. 지안은 가족이란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언니를 조용히 감싸 안고 싶었다.

“언니는 어때? 배우라는 꿈을 이뤄서 행복해?”

감정 표현이 서툴고 내성적인 성격을 가진 지안과 달리 지유는 쾌활한 성격에 유난히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었다. 어디를 가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던 언니는 어린 시절부터 영화배우가 되겠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는데, 진짜 배우가 되어서 명성을 떨치게 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아버지를 따라 먼 타국을 떠돌며 지낸 지안으로서는 연예인이라는 화려한 직업이 늘 막연하게 느껴지곤 했으니까. 그래도 지안은 언니의 오랜 바람을 알기에 배우로 데뷔했다는 소식에 제 일처럼 기뻐했었다.

― 잘 모르겠어. 행복한지…….

예상 밖의 대답이라 지안은 약간 당황스러웠다.

― 모든 게 엉망진창이야. 벌인 일은 많은데, 제대로 되는 건 하나도 없고. 그 사람과도…….

지유는 말을 흐리며 꺼질 듯이 한숨을 쉬었다.

언니가 교제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얼핏 들은 기억이 있는데,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걸까. 지안은 재촉하지 않고 다음에 나올 말을 기다렸다.

― 그 사람이 결혼한대. 나 말고 다른 여자랑.

밑도 끝도 없는 말이 황당했다. 교제한다고 모두가 결혼하는 건 아니지만, 교제 중에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다니.

“그 사람이 언니를 속인 거야?”

지유는 질문에 대한 대답 대신 느닷없는 말을 꺼냈다.

― 지안아. 내가 죽으면 그 사람이 슬퍼할까?

지안은 심장이 쿵 하고 멎는 거 같았다. 가끔 나누었던 대화만으로 언니가 우울증이 있다는 것은 어림짐작하고 있었다. 지안은 우울증 환자를 자주 상담했었다. 아무리 사소해도 그들의 말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이미 뼈아픈 경험으로 알고 있다. 가까이 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언니의 상태를 살폈을 텐데, 닿을 수 없는 먼 곳에 있으니 초조한 기분만 엄습했다. 언니 주변에 의지할 만한 사람이라도 좀 있어야 할 텐데.

“착각하지 마. 언니가 죽어도 그 사람은 조금도 슬퍼하지 않아.”

지안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언니가 만나는 남자에 관해서 전혀 모르지만, 양다리를 걸칠 정도의 남자라면 인성이 어떨지 안 봐도 훤하다.

“언니 기억나? 우리 어릴 적에 엄마 아빠 외에는 아무도 우리를 구분하지 못했잖아. 그게 재미있어서 가끔 서로의 역할 바꾸어서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이곤 했었는데.”

언니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안은 전화가 끊길까 두려워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내가 사고 치면 언니가 나 대신 혼나고 언니가 곤란한 일을 당하면 내가 언니가 되곤 했어. 그렇게 무슨 걱정이든 함께 나누니까 힘들이지 않고 견뎌 낼 수 있었고.”

― …….

“그러니까 혼자 고민하지 말고 무슨 일이든 말해 줘. 내가 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울게.”

무슨 일이냐고 추궁하기보다는, 언니에게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할 필요가 있었다. 잠시 후, 전화선 너머에서 억눌린 듯 흐느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지안아. 한국으로 와 줄 수 있어? ……이대로는 견딜 수 없을 거 같아.

지안은 풀다 만 짐 가방을 바라보았다. 난민 캠프에서 이제 방금 돌아왔다. 삼 개월의 휴가를 받았지만, 마음 편히 쉴 수 있는 기간은 아니었다. 보고서도 작성하고 준비 중인 연구 논문도 휴가 중에 마무리해야 한다. 하지만 언니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적어도 언니의 상태를 알아야 안심이 될 거 같았다.

“항공권 준비하는 대로 바로 출발할게.”



비행기가 강한 진동을 일으키며 활주로에 내려앉았다. 지안의 짧은 상념 역시 한국에 도착함과 동시에 멈추었다. 승객들이 분주한 모습으로 제각기 짐을 챙겨서 출구로 향했다. 주변의 힐금거리는 시선이 신경 쓰인 지안은 주위 모든 승객이 비행기를 빠져나갔을 무렵, 자리에서 일어나 짐을 챙겼다.

잠시 후, 공항 게이트를 빠져나온 지안은 입국 심사를 받기 위해 여권을 꺼냈다. 그녀의 여권을 확인한 공항 직원은 지안을 주의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지안이 입은 색 바랜 점퍼와 낡은 청바지는 지나치리만큼 소탈한 차림이지만, 공들여 빚어 놓은 듯이 아름다운 이목구비가 꽤 낯이 익었기 때문이다.

“서지안 씨, 본인 맞으세요?”

“네. 맞아요.”

지안의 대답에도 공항 직원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여권 사진을 살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