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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







갈수록 심해지는 소란스러움을 견딜 수 없었던 도희는 상황을 봐서 조용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애석하게도 바깥 상황 역시 술집 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나마 나은 것을 꼽으라면 탁 트인 공기뿐이었다.

지그시 눈을 감자 어지러운 기운이 잠시나마 개운해졌다.

자연스럽게 그 애가 떠올랐다.

의도치 않게 시선이 마주친 순간, 별안간 고개를 숙여 오는 고해찬을 멍하니 바라보다 얼떨결에 인사를 받아 주고 말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분명히 봤다. 그 애의 입가로 의문 모를 미소가 언뜻 떠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고해찬은 웃고 있었다.

“이상해.”

“뭐가 그렇게 이상한데.”

낯선 목소리에 감겨 있던 도희의 눈꺼풀이 확 떠밀려 올라갔다.

“얼마나 마신 거야.”

기태준. 3년 전 졸업한 같은 학과 선배.

적어도 도희에게만큼은 결코 반갑지 않은 상대였다.

그는 삼진그룹 기태형 회장의 아들이란 막대한 배경을 등에 업고도 누구에게든 편견 없이 친절했다. 뿐만 아니라 훤칠한 외모까지 겸비하고 있어 재학 당시 경영학과 남녀 학생, 교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를 좋아했다.



‘동생이 병원에 있다며. 깨어나도 평생 장애를 감수하며 살아야 한다고 들었는데.’



그것들이 전부 계획된 가식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도희뿐이었다.



‘신기하네. 본인이 다친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런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희생하려는 거지. 단순히, 가족이라서?’



첫 느낌 자체가 나빴다. 마치, 옷 속으로 침범한 뱀이 살결을 타고 기어오르는 듯한, 그런 소름 돋는 불쾌함이라서.



‘요구만 들어준다면 그 돈, 내가 빌려줄 수 있어.’



결코 단순한 호의가 아니란 것쯤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어떻게 알고 왔어요.”

“동준이한테 들었어.”

이젠 하다 하다 과대표까지 구워삶았나. 도희는 무신경하게 태준을 흘겨보곤 이내 발을 돌렸다. 그때, 태준이 손목을 덥석 잡아챘다. 강한 악력에 손목이 시큰거렸다.

“뭐 하는 짓이에요.”

“가. 데려다줄 테니까.”

“됐으니까 이거 놔요.”

“집으로 데려다주면 돼?”

태준은 뜻을 굽힐 줄 몰랐다.

싫다는 사람 말은 보란 듯이 무시하고 제 할 말만 전하는 태도에 도희는 미간을 구겼다.

“간섭하지 마세요.”

손을 힘껏 비틀어 봤지만 빠지기는커녕 태준의 손힘만 더 강해졌다.

“말 들어. 너한테 무례하게 굴기 싫으니까.”

“지금 무례라고 했어요?”

“백도희.”

전과 확연히 달라진 냉담한 목소리에 도희의 어깨가 작게 움찔거렸다. 그때였다.

“선배.”

짙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도희와 태준의 시선이 한곳으로 향했다.

검은색 볼캡을 푹 눌러쓴 채,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2층 벽에 기대어 서 있는 남자.

그 애였다. 고해찬.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섬뜩한 눈빛만큼은 또렷했다.

해찬은 도희의 눈을 똑바르게 직시하며 물었다.

“도와줘요?”

도무지 가늠할 수 없는 질문에,

“말해요. 도와 달라고.”

문득 기시감이 들었다.



‘도와 달라 말할 용기조차 없으면 평생 입 다물고 살아.’



언젠가 누군가에게 스치듯 들었던 건방진 말과 겹쳐졌다.

“고집 하난 여전하네.”

해찬은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대며 걸음을 떼어 냈다. 한 발자국, 두 발자국. 곧이어 망설임 없이 성큼성큼 계단을 내려왔다.

앉아 있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보니 체격도 체격이었지만 키가 남달랐다.

결코 작지 않은 키를 가진 도희가 올려다보아도 끝이 없었다. 뒷목이 뻐근해질 정도면, 못해도 180 중후반쯤 되지 않을까.

심각하게 컸다.

태준의 표정이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뭡니까.”

“놔요.”

낮은 음성 속엔 무시할 수 없는 경고가 묻어났다.

“이봐요, 학생.”

태준도 뒤지지 않았다. 일부러 ‘학생’이란 호칭을 붙여 가며 은연중 상하 관계를 확실히 구분 짓고자 했다. 고급스러운 슈트와 상반된 트레이닝복. 몸에 걸쳐진 차림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해찬은 그런 것엔 관심도 없었다.

“그 손.”

얇은 손목 위로 해찬의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차가웠다. 후덥지근한 더위가 조금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놓으라니까.”

해찬이 도희의 손을 제 쪽으로 가볍게 끌어당기자, 얹어진 태준의 손이 허무하게 떨어졌다.

태준은 평소라면 볼 수 없는 살벌한 표정으로 해찬을 직시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금세 휘발되었다. 잠시 구두 끝을 내려다보던 태준이 돌연 픽, 웃음을 터트리며 시선을 올렸다.

“아. 도희랑 아는 사이였나 보네요. 그런 줄도 모르고, 실례했습니다.”

앞, 뒤 가리지 못하고 무작정 달려들 줄만 아는 어린 남자와 격이 다른 어른 남자의 정중한 태도였다. 모르는 사람이 본다면 충분히 그렇게 느껴질 만했다.

해찬에게 고정된 태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런데……, 좀 낯이 익네.”

당사자보다 도희가 더 놀랐다.

이럴까 봐 도와 달라 하지 않았던 건데. 도희는 혹시나 자신 때문에 그가 피해를 입는 건 아닐까 노심초사하며 시선을 돌렸다.

정작 해찬은 초연했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실소를 터트렸다.

“너, 가.”

결국 도희가 재촉했다.

“얼른!”

등을 떠밀어 봤지만 해찬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태준의 악력을 손쉽게 떨쳐 낸 인물이다. 도희의 힘이 통할 리 없었다.

“뭐 하고 있어? 사람들이 알아보고 있잖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주변 사람들의 이목이 하나둘 쏠리고 있었다.

“누가 누굴 걱정해…….”

중얼대는 목소리가 거슬렸다.

“알아보면 어때요. 곤란한 사람 도와준 거 가지고 기사 한 줄 나갈 것도 아니고 시합에 못 나갈 것도 아닌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태준을 똑바로 쳐다보며 해볼 테면 해보라는 듯 말하는 폼이 괜한 허세는 아니지 싶다. 더는 안 되겠다. 도희는 그대로 해찬의 손을 억척스럽게 잡아끌었다.

태준의 매서운 시선이 등 뒤로 아프게 꽂혔지만 도희는 일절 무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해찬은 반항 없이 순순히 끌려와 주었다.

얼마쯤 걸었을까. 시끄러운 잡음이 멀어진 뒤에서야 도희의 다리가 우두커니 멈췄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마음을 다잡은 도희가 홱 몸을 돌렸다.

“너……!”

막상 그 애를 마주 보자 할 말을 잃어버렸다. 따지고 보면 도와준 죄밖에 없는 해찬에게 타박할 명분이 남아 있지 않다.

“……하.”

피로와 어지러움이 동시에 훅 올라왔다. 물인 줄 알고 무작정 들이켠 술의 여파가 뒤늦게 나타난 모양이다.

지친 기색으로 긴 머리를 쓸어 올린 도희가 슬쩍 해찬의 시선을 피하며 웅얼댔다.

“미안한데, 다음부턴 그러지 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 줄은 알고서 이래.

화를 낼 줄 알았던 예상이 보란 듯이 어긋나자 해찬의 입술이 느슨하게 벌어졌다.

“그런 말도 할 줄 알아요?”

몰랐네.

장난스러운 미소가 해찬의 입가에 어렴풋이 맺혔다. 원래 이렇게 잘 웃던 애였나. 놀란 건 도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날카로운 이목구비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퍽 차가워 보이는 인상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권태롭고 감흥 없는 눈빛은 모든 것에 무심했다. 그래서 무표정한 얼굴이 더 잘 어울릴 것이라고 어림잡아 생각했는데. 거기까지 생각에 다다르자 도희는 순간 멈칫했다.

자신 역시 늘 그런 편견 속에서 살아온 입장이었다.

상대를 함부로 평가하는 짓이 얼마나 불쾌한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면서 같은 잣대를 들이밀고 있다는 게. 한심했다.

긴 침묵을 뚫고 도희가 먼저 운을 뗐다.

“왜 나왔어?”

“아는 사람이에요?”

해찬은 대답 없는 도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다 뒤늦게 대답했다.

“시끄러워서요.”

이해는 됐다. 이목이 집중되는 자리가 불편할 만도. 잠시나마 걱정이 되어 따라 나온 건 아닐까 생각했다. 우습게도.

“선배는요.”

“나도, 너랑 같은 이유.”

“많이 마신 것 같던데.”

짐작이 맞았다.

“별명이 백구예요?”

계속 지켜보고 있었다.

귀엽네……. 낮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도희가 이맛살을 구겼다.

“남 걱정할 시간에 네 걱정부터 해.”

퉁명스러운 도희의 대꾸에도 해찬은 그저 웃기만 했다. 생각보다 잘 웃네. 좀 이상한 감상평이었지만 고해찬을 몇 번 만나 본 사람이라면 아마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매사가 지루한 사람 같았으니까. 고해찬의 곁엔 항상 많은 사람이 들끓었으나 정작 당사자는 무리에서 조금 동 떨어진 채 관망하기만 했다. 동화되길 거부하는 것처럼. 그래서 더 수상했다.

“무슨 걱정이요.”

갑작스럽게 친근해진 태도부터 말이다.

“운동한다며, 너.”

“그게 왜요.”

“꼭 실력 애매한 애들이 하라는 운동은 안 하고 술 먹고 담배 피우지.”

“누가 그래요?”

“누구라도 알아. 그 정도는.”

“담배 안 피우는데.”

“술은 마셨잖아.”

도희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유 없이 지기 싫었다. 고작 스치듯 몇 번 만난 사이였으면서 어린애 취급 하는 해찬이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해찬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이러니까 꼭 여자 친구 같네.”

도희가 눈매를 찡그렸다.

“이젠 아주 대놓고 기어오른다.”

“봤어요? 내가 술 마시는 거.”

도희는 말문이 막혔다. 술집에 술 마시러 오지 그럼 뭐 하러 오느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안 마셨어요.”

해찬이 싱겁게 웃었다.

“마셨다 해도 누구 말처럼 술 몇 잔에 기록 떨어질 만큼 애매한 실력도 아니고.”

근거 있는 자신감이었다.

도희는 검은색 눈동자를 빤히 들여다보다가 입술을 떼어 냈다.

“너 원래 이렇게 말이 많았어?”

“원래 내가 어땠는데요.”

어쩌다 한번 마주쳐도 말 한마디 없었다. 민망해진 분위기를 참을 수 없어 인사를 건네 봐도 돌아온 것은 처참한 무시였다.

그랬던 애가 15분 전 선뜻 먼저 눈인사를 건네 오질 않나,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질 않나. 됐다, 더 이상 파고들지 말자.

“근데 왜 아까부터 자꾸 나한테 선배라고 해.”

“후배는 아니잖아요.”

“같은 과 아니잖아. 새삼스럽게 무슨 선배야. 오글거려.”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해찬이 고개를 기울이며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백도희?”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알고.

“내가 네 친구야? 선준이 친구니까 그냥 누나라고 불러.”

선준이 친구. 그 말을 곱씹자마자 그의 잇새로 피식,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도희가 땅에서 발을 떼어 냄과 동시에 해찬이 물었다.

“어디 가요.”

“조심히 들어가. 요즘 밤길 위험하더라.”

해찬은 묘한 눈으로 조금씩 멀어져 가는 도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얼마 마시지도 않았으면서 휘청거리는 모습은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할 정도였다. 해찬은 넓은 보폭으로 금세 도희를 따라잡았다.

“차라리 택시 정류장으로 데려가지 그랬어요. 모텔촌은 의도가 너무 뻔하지 않나.”

도희의 눈꺼풀이 느릿느릿 감겼다 떠졌다. 일부러 도발하려는 의도가 분명한 말이었음에도 그저 얌전하다. 앙칼지게 받아치던 기세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공부와 아르바이트를 병행하느라 하루에 많아 봤자 네 시간 쪽잠을 잔다. 어디든 누울 곳만 있으면 픽픽 쓰러지듯 잠을 자던 도희였다. 여태껏 버틴 것이 기적이다.

“안 되겠다.”

도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집요하게 옭아매는 눈빛 때문인지, 술기운 때문인 건지.

해찬은 모자를 깊게 눌러쓰며 말했다.

“같이 가요, 선배.”

그땐 알 수 없었다.

“데려다줄게.”

원한 적 없는 친절의 의미를. 누나란 멀쩡한 호칭을 두고 굳이 선배를 고집하던 이유를. 도무지 의도를 파악하기 힘든 말들과 웃음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