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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소설 속 내용은 허구이며 실제 단체, 대회 등과 아무런 연관이 없음을 미리 밝힙니다.

<프롤로그>







매앰, 매앰─. 찌르르, 찌르르르.

지치지도 않는지 매미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는 날이 갈수록 높아졌다.

기상청에선 올해 여름의 더위가 최고 기록을 갱신할 것이라 했다.

과장은 아닌 듯했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히고,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힘겨웠다.

도희는 자글자글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끔찍하게 바라보며 들고 있던 서류 파일을 신경질적으로 흔들었다.

“아……, 더워.”

열기는 좀처럼 식을 줄 몰랐다.

쉴 틈 없이 이어진 미팅 스케줄 덕분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이대로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마저 처리해야 할 업무만 해도 산더미다.

삐이이이― 요란한 소음에 도희는 눈가를 찡그리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폭염 주의보 경보 알림이었다.

팝업 창을 내리자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재중 전화와 문자가 와르르 쏟아졌다.



[백 대리. 왜 이러헼 전화를 안 바ㄷ아.]

[밖에서 대체 뭘 하고 있길래 느ㅈ어. 농떄ㅇ이 부리고 있는 거 아니야?]

[급하니까 문자 보면 당장 호ㅣ사로 ENldj어와. 얼른.]




오타가 남발하는 문자를 보내온 발신자는 전부 부장이었다.

밖에서 저녁 먹고 일찍 퇴근하라며. 멀쩡히 일하던 사람 억지로 떠밀듯 내보낼 땐 언제고. 평일 주말 할 것 없이 부려 먹는 데엔 이미 도가 튼 인간이었다. 상식이 통할 리가 있나. 메신저 사용 방법을 알려 달라 채근했을 때 모른다고 시치미를 뚝 뗐어야 했는데.

지긋지긋해.

도희는 원망스러운 눈초리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쓸데없이 청명하고 난리다.

“왜 또 여름이야. 짜증 나게.”

당연한 순리를 두고 불만을 토로하는 꼴도 우습지만 정말이지, 돌이켜 생각해 보면 여름은 최악인 것들뿐이었다.

멀쩡한 사람마저 예민하게 만드는 살인적인 더위라든가. 눅눅하다 못해 끈적한 장마철 공기의 습도라든가. 사람들과 살짝만 옷깃이 스쳐도 한계를 모르고 솟구치는 불쾌지수 또한.

하지만 도희가 유난히 여름을 기피하게 된 것은 비단 앞서 말한 이유들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을, 겨울, 봄을 지나 돌아오는 여름만 되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그 얼굴이 문제지.

처음이자 마지막이란 각오로 뜨겁게, 보다 더 비참하게 사랑한 그 순간이 여름이라서.

여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하필이면…….

“너. 이제 그만 나올 때도 되지 않았니.”

질리지도 않나.

도희는 삼진전자 매장 내부를 흘겨보며 볼멘소리를 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몇 분 전부터 매장 내부에 진열된 수십 대의 대형 TV 화면들을 동시에 꽉 채우고 있는 한 남자를 노려보고 있었다. 애써 외면해 보려 해도 자꾸 눈길이 가는 것을 막을 길이 없다.

올림픽까지 앞으로 1년 남은 이 시점에서 하루가 멀다 하고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너. 이쯤 되면 약 올리는 것 같아.

‘네가 날 잊을 수나 있겠어?’

마치 그렇게 비웃기라도 하듯이.

싫었던 계절이 좋아지고, 잃었던 열정을 바라고, 원한 적 없는 꿈을 가지게 한 남자. 뿌연 안개 같던 인생에 선명한 오점을 남기고 떠난 모순덩어리였다.

아직까지도 나의 여름엔 그가 멀쩡히 살아 숨 쉬고 있다.

첫사랑.

말한다고 믿어 줄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 너의 첫사랑은 어땠느냐고 물어 온다면 한 치의 망설임조차 없이 대답할 수 있다.

후회한다고.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만나기 전으로 돌아갈 거라고.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다면 그 이름 석 자부터 지워 버리겠노라고.

나는, 태어나 처음으로 꿈을 꾸게 한 너를 원망한다.

아직까지도, 미련스럽게.



그런데 예상이나 했을까.

너와 다시 마주 앉아 있게 될 줄.



* * *



돌고 돌아 만나게 될 인연은 어떻게든 만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단단히 엉켜 버린 실타래 같은 것이라면 가위로 끊어 내면 그만일 관계인데, 허울만 거창하게 꾸며 표현하는 꼴이 우스울 뿐이다.

“……가지가지 한다, 진짜.”

그런 것들이 지금 와서 무슨 소용일까.

기가 막혀 웃음만 나왔다.

무슨 정신으로 이곳에 나왔는지 수백 번, 수천 번 스스로에게 되물어 봤지만 해답을 찾지 못했다. 맨몸으로 오물통에 내던져진 기분이다.

주먹으로 가슴팍을 수차례 내리쳐 봐도 소용이 없다.

“환장하겠다, 진짜.”

도희는 격식을 차린 장소와 걸맞지 않은 말을 내뱉으며 이마를 짚었다.

이제 10분 뒤, 사연 많은 첫사랑과 7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아웃도어 기업 <익스페디션> 마케팅 부서 대리와, 전 세계를 제패한 국가 대표 수영 선수이자 전속 모델, 갑과 을이 명확하게 정해진 입장으로. 그것도 무려 화려한 샹들리에가 유난스러운 5성급 호텔 라운지 바에서.

충격과 공포를 넘어서 끔찍했다. 신이 외면한 것이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거지 같은 상황이 펼쳐질 리가 없다.

늦지 않았어.

지금이라도 때려치워. 일어나.

야속하게 흘러가는 시계 초침 소리가 불안감을 한층 깊게 조성했다. 더는 못 참겠다. 도희가 엉덩이를 들썩거린 때였다.



‘그 선수가 이번 해는 쉬고 싶다면서 완강하게 거절하고 있나 봐. 그런데도 상부에선 무조건 승인부터 따내라며 억지를 부리고 있는 상황이고. 아무래도 이때가 기회다 싶었겠지만 하루에도 몇 번씩 독촉 연락 받느라 나도 골치 아파 죽겠어. 답지 않게 고집부리는 걸 보면 매출은 확실히 보장된다는 소린데.’



묵직한 중력이 온몸을 잡아끄는 기분이다.



‘하지만 그건 컨택 팀 업무이지 않습니까.’

‘해 봤는데 안 되니까 백 대리한테 백업 요청하는 거잖아.’




거절이 통했다면 이 자리에 멱살 잡히듯 끌려 나오게 되는 상황은 처음부터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기대가 많아. 백 대리도 내년엔 과장으로 승진해야지.’



하다 하다 협박이라니. 묵직한 한숨이 샜다.

먼발치에 위치한 자동문이 스르륵 열렸다. 누구일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직감할 수 있었다. 도희는 꼼짝 않고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긴장감이 목을 꽉 조여 왔다.

차라리 눈을 감자. 사형을 선고받은 사형수의 심정이 이런 걸까. 걸음 소리가 조금씩 가까워질수록 발작하는 심장 소리에 정신이 혼미해지고, 호흡조차 버거웠다.

도희는 간신히 숨을 들이켜며 습관처럼 아랫입술을 꾹 짓이겨 물었다.

10년 같은 1분이 흐르고.

“…….”

테이블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수영장 풀(Pool)의 특유한 물 냄새와 시원한 샴푸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슬며시 눈을 뜨자 우두커니 멈춰 선 검은색 구두가 시야에 담겼다.

7년이 지났어도 예상할 수 있었다. 늘 그렇듯 훈련과 웨이트까지 마친 뒤 샤워를 하고 온 거겠지.

더는 물러설 곳이 없다는 판단이 섰을 때쯤, 똑똑똑. 손등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는 소리에 정신이 번쩍 깼다. 시선을 들자 자연스럽게 그와 눈이 마주쳤다.

도희의 손끝이 파르르 경련했다. 들키지 않으려 두 손을 꽉 맞잡았다. 놀란 것은 피차 마찬가지였다. 남자의 얼굴에 의아함이 스쳤다.

“……설마 했는데.”

익숙한 낮은 목소리. 순간 소름이 끼쳤다.

“진짜였네.”

남자의 시선은 오로지 도희에게 향해 있었다.

도무지 속을 파악할 수 없던 검은색 눈동자는 조금 더 깊어졌고 매끈한 이목구비는 전보다 훨씬 더 날렵해졌다.

고작 잘생겼다는 단어로 단정 짓기엔 턱없이 부족한,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화려한 정물 같은 남자.

찰나에 스쳤던 앳된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한결같던 운동복 차림 또한 온데간데없었다. 슈트를 갖춰 입고 있는 모습이 낯설다. 완전한 어른이 된 그는 더 세련됐고, 날렵해졌으며, 아름다웠다.

전과 변함없는 것이라곤 날카로움 속에 은근하게 배어 있는 연한 분위기라든가 슬쩍 입술만 당겨 웃는 습관 정도, 일까.

스물하나와 스물넷에서 스물아홉과 서른하나로.

시간의 속도가 무섭도록 빠르단 사실을 체감한 순간.

남자의 입술 끝이 언뜻 올라섰다.

“드디어 만났네요.”

운명인가.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음성이었지만 도희의 귀엔 보다 정확히 내려앉았다. 마치 여태 찾아 헤맸다는 것처럼 들렸다면 착각일까. 혹시, 겨우 나 따위에게 어쭙잖은 복수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너는.

“만나서 반갑긴 한데.”

농축된 통증이 뼈를 뚫고 들어와 심장을 아프게 푹 관통한다.

멈춰 있던 짙은 눈동자가 고요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래로, 조금 더 아래로. 작은 부분 하나하나 눈에 각인시키려는 기세로 집요하게 도희를 훑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그저 눈빛만 스쳤을 뿐인데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조금 화가 나는 건 어쩔 수가 없네.”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결을 만지던 차분한 손길을. 지독하게 입을 맞춰 오던 입술을. 몸이 으스러지도록 강렬하게 서로를 찾았던, 그때의 그 절박함과 처절함을.

탐색을 끝낸 강렬한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닿으며 비로소 움직임을 멈추었다.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못 신던 구두도 신고.”

별안간 그의 잇새로 바람 빠진 실소가 새어 나왔다.

“안 하던 화장도 하고.”

솜털이 삐죽 섰다. 그는 속을 전부 꿰뚫고 있는 듯 여유로워 보였지만 한편으론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더 예뻐졌잖아. 작정한 것처럼.”

그의 입술이 미약하게 뒤틀렸다.

“보는 사람 열받게.”

감히 네가 나를 두고 어떻게. 마치 그리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끈질기게 좇는 눈길에 도희는 할 말을 잃었다.

충분히 아팠으니 의연하게 대응할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내가. 이 거지 같은 첫사랑을,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다.

접착제를 이중으로 바른 것처럼 도통 떨어질 줄 모르는 입술이 이토록 원망스럽기도 처음이다.

혼란스러움으로 잠식된 머릿속은 이미 암전 상태였다. 넋이 나간 도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그가 다시금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나 없이 그동안. 잘 지냈어요?”

차라리 욕을 해.

물어뜯듯 따지고, 욕을 하고, 지난 행동들을 모욕했으면 했다.

그럼 조금이나마, 편해질 것 같았다.

“잘 지냈다고 말해 봐요.”

그의 얼굴이 싸하게 식어 버린 것은 순식간이었다.

“하루하루가 지옥 같았던 사람 앞에 두고.”

“…….”

“그때처럼 내 마음 찢어 갈겨 놓고 싶은 생각이면.”

다른 건 모르겠지만 이것 하난 알겠다.

느슨해진 실타래가 전보다 더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