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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사실 수연의 그런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결코 우는 모습 따위 남에게 보이는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은 흔히들 그런 수연을 보고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인간, 이라는 말을 하였다. 하지만 결은 알고 있었다. 나약하지 않지만 나약한 사람이 한수연이라는 걸. 지금 저 앞의 밑바닥이 곧 낭떠러지인 이 벼랑을 버티고 서 있으려고 나약하게 보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을.

그렇게 나약한 수연을 보았을 적에 결은 수연이 전과 같이 돌아가지 못할까 봐 걱정스러웠다. 결과적으로 이겨 낸 것인지 아니면 여전히 아프면서도 괜찮은 척을 하는 것인지 모를 그 중간점에 수연이 서 있었지만, 저렇게 밝게 웃게 된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오, 역시 고 비서.”

의수인 왼쪽 손으로 엄지를 치켜들며 수연이 방정을 떨었다.

“월급 올려 주세요. 물론 상여도 같이 올려 주셔야 해요.”

“왜? 지금 걸로 모자라? 월급 인상한 지 얼마 안 됐잖아?”

“전 대표님 비서지 도우미는 아니에요. 근데 제가 도우미 일까지 보잖아요.”

“역시. 넌 진짜 인쓰였어.”

“제가 그 별명 붙이지 말라고 부탁드렸을 텐데요.”

“인성 쓰레기, 이렇게 풀 네임으로 부르기는 거북스럽잖아. 말하는 나나, 듣는 너나.”

“자꾸 그러시면 내일 대표님 책상 위에 사표가 하나 놓여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장비를 다시 거실 장에 넣어 놓고 결은 현관으로 가 신발을 신었다. 그에 수연이 거실 중앙에 오도카니 서서 양손을 흔든다.

“저녁 먹자고 해도 네가 거절할 거 같아서 안 붙잡는다. 내일 아침에 보자. 조심해서 들어가.”

“네. 푹 쉬시고, 내일 아침에 봬요.”

여느 날의 저녁과 다르지 않게 업무가 늦게 종료되었다.

내일도 오늘과 같이 수연이 평안하기를.

수연의 집을 나서 사늘한 바람이 살갗을 꿰뚫는 와중에 결은 그런 바람을 품었다.







<비서와 대표라는 관계>





잔잔해서 평온하게 돌아가던 아침을 커다랗게 장식한 불행은 한주건설의 전화 한 통이었다. 시공하기로 결정되어 계약서를 작성하고 디자인을 조율하기 위해 샘플까지 만들었다. 기한이 촉박하다고 회사 내부적으로 말이 많았지만 그래도 다 같이 힘을 모아 밥 먹듯 야근을 하면서 한주건설이 지은 아파트 2층에 보여 주기용으로 샘플 시공까지 들어갔다.

샘플 시공 들어간 층을 보고 한주건설에서 요구 사항이나 컴플레인이 있다면 그것을 조율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한주건설에서 난데없이 이번 계약은 없었던 걸로 하자며 연락이 왔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샘플 기한을 안 지켰다면, 그래서 계약서를 쓰지 않았다면 모를까 억지로 기한까지 맞춰 가며 진행한 일을 건설사 측에서 이토록 일방적이게 파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전화 다시 연결해.”

수연은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음성으로 결에게 지시를 내렸다. 결이 다시 전화를 건다. 그러나 이내 받지 않는 모양인지 결의 고개가 가로저어진다.

“다시.”

결은 묵묵하게 다시 전화를 걸 뿐 수연을 말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에도 역시 전화는 불통이었다.

“미친 거 아니야? 그 새끼들 대가리에 총 맞은 거 아니냐고! 지금 누구 똥개 훈련 시켜!”

“진정하세요.”

묵묵히 수연의 지시를 따르던 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도 봤잖아! 네가 더 잘 알잖아! 내가 생산부에 얼마나 난리를 쳤어! 사장님 그때까지는 도저히 안 될 거 같다고 생산부에서 얼마나 힘들어했냐고! 그런 사람들이랑 밤새우면서 너나 나나 얼마나 독촉을 했어! 그러면서 또 속상해서 얼마나 미안해했냐고!”

물부터 한 잔 마시라며 결은 물이 담긴 유리잔을 수연의 손에 쥐여 주었다. 하지만 수연이 입으로 가져가려던 유리잔을 바닥에다 내던졌다. 잔이 깨지며 유리 파편이 수연의 몸 쪽으로 튀어 올랐다. 옷 때문에 수연의 피부에 직접적으로 생채기는 나지 않아 다행이었으나 결은 일순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다.

“조심하세요! 그러다 다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하지만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수연의 뺨이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일단 앉으세요. 앉으셔서 기분 좀 차분히 가라앉히세요.”

씩씩거리는 수연을 결이 억지로 의자에 앉히고 깨진 유리 조각을 치웠다. 그러는 와중에도 수연은 말이 없었다. 어처구니없이 헛웃음을 치다 아랫입술을 피가 나도록 질끈 깨문다. 입술에 피가 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이에 짓이겨진 입술은 피가 터진 부분을 제외하고 시퍼렇게 색이 변해 갔다. 깨진 유리 파편을 급히 다 치운 뒤에 결은 수연의 아랫입술을 엄지로 꾹 내리눌렀다.

“힘 빼세요. 입술에 상처 나셨잖아요.”

그제야 짓이겨진 수연의 입술에 힘이 빠지며 시퍼렜던 입술 색이 차츰 돌아왔다.

“이게 말이 돼? 이게 지금 말이 되는 상황이야?”

“말 안 되는 거, 저도 알아요.”

책상에 있던 티슈로 결은 수연의 입술을 조심스레 닦았다. 보기만 해도 아픈 상처를 수연은 자신의 몸에 잘도 낸다. 하지만 그럴 만한 일이라는 것을 알아 결은 입도 벙긋하지 못했다. 이번 일을 성사시키려 수연은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올해 제일 큰 건이 될 거라며 추석 상여금 날짜에 직원들 통장 더 두둑하게 만들어 주자, 하는 말을 피곤한 와중에 하면서 웃기까지 하였다.

“감정적으로 하셔도 안 되고, 이런 식으로 대표님 몸에 생채기 내는 일도 하셔서는 안 돼요. 직원들 다 대표님만 바라보고 있는데 대표님이 이러시면 밑에 직원들 불안하고 불편해하잖아요.”

“이럴 때도 꼭 바른 소리지……. 진심 짜증 나, 너.”

결의 손에 있던 티슈를 앗아 수연이 제 입술을 벅벅 문질렀다. 상처가 더 커질 거 같아 한마디 하려 했지만 결은 많이 참고 있는 수연을 알아 입을 다물었다. 수연이 자신에게 짜증 난다며 타박을 주는 건 화를 가라앉히고 사태를 파악해 보겠다는, 그런 뜻이기도 하였다.

“제가 일단은 파악하고 올게요. 대표님은 오늘 해야 할 일들 하시고 계세요. 오후 네 시 전까지는 들어올게요.”

“같이 가. 너 혼자 괜히 더 힘들지 말고.”

“싫습니다. 대표님은 너무 감정적이셔서 이런 일에는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진짜 무슨 약 먹냐?”

“네?”

수연이 눈을 기름하게 흘겼다.

“말 못되게 하는 약 먹냐고. 그렇지 않고서야 넌 매번 어떻게 똑같은 말을 예쁘게 하는 법이 없어.”

“못된 게 아니라 똑똑한 겁니다. 사장님이 꽤 유능한 비서를 쓰고 계시는 뜻으로는 해석하기 어려우세요?”

“참나. 그래, 아주 기어올라라.”

피식 웃음을 터뜨린 수연은 가방에서 안경을 꺼내 들었다. 오늘 보아야 할 도안들과 업무들이 또 한가득이었다. 안 그래도 일이 많은데 이런 일까지 터져 수연의 머릿속이 복잡할 것이다. 손에 펜을 쥐던 수연이 마른 피딱지가 붙은 입술을 달싹였다.

“냉녹차 한 잔만 타 주고 가. 최 실장이 탄 건 어쩐지 네가 타 준 것보다 맛이 없어.”

수연의 목소리가 평이해졌다. 머리끝까지 올라온 분을 억지로 누그러뜨린 모양이었다. 결은 차분히 녹차를 우려 컵에 가득히 얼음을 넣었다. 잔 안에서 연녹색이 쨍하게 푸르렀다. 얼음끼리 맞부딪히는 소리가 연녹색의 색감을 한껏 더 받쳐 준다. 안경을 끼고 서류를 보는 수연의 옆에 조심히 잔을 내려놓았다.

“빨리 와. 네 선에서 처리 안 해도 좋으니까, 그래서 이번 일 엎어져도 아무 말 안 할 테니까 빨리만 다녀와. 너 없으면 나 혼자 일이 너무 많아.”

서류에 시선을 그대로 붙박인 채 수연이 말했다.

“네. 네 시 안으로는 들어오니까 걱정 마세요.”

“그래.”

결은 조용히 집무를 보는 수연을 두고 서둘러 움직였다.



으리으리한 본사 건물을 올려보고 있자니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로아 컴퍼니. 대문짝만하게 걸린 이름도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찾아갔던 한주건설이 요지부동이니 여기까지 올 수밖에 없었다. 손목시계는 벌써 오후 한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네 시 전까지는 들어간다고 수연과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한다. 결은 심호흡을 가다듬고 회사 로비로 걸어 들어갔다.

데스크에서 안내 여직원이 알은체를 했다. 약속을 잡고 왔냐는 물음에 결은 아니라고 답했다. 데스크 여직원이 회장실과 전화를 해 보더니 이내 승강기까지 결을 친절히 안내한다. 결은 이 상황이, 자신이 로아 컴퍼니까지 찾아온 이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았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하며 입고 있는 슈트를 툭툭 털어 냈다. 승강기가 17층에 도달하고, 회장실로 입성하는 길이 보였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문 앞까지 걸어가 잠깐을 망설였지만 결심을 굳히고 문을 활짝 열었다. 회장님이 집무실 정중앙에 앉아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그래. 오랜만이다. 앉아라.”

수연을 닮지 않았다. 부모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회장인 인석은 수연과 닮지 않았다. 결은 그렇게 생각했으나 세간에서는 인석과 수연을 두고 어쩜 그렇게 빼다 박았냐는 말을 하였다. 그것은 가식이라고, 그래서 결은 그런 생각을 빈번히 하였다.

“그래.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

“일이 좀 생겼습니다.”

“일단 뭐라도 마시자꾸나.”

뒤에 서 있던 강 비서에게 커피 한 잔을 부탁한다는 말을 하며 인석은 결에게는 무엇을 마실 것인지 물었다. 결은 인석과 같은 커피로 달라고 하였다. 강 비서가 친절하게 알겠다는 뜻을 내비추고 회장실을 나갔다. 강 비서가 나간 뒤 적막에 잠긴 회장실에서 먼저 말문을 연 쪽은 이 회사 주인인 인석이었다.

“그래. 요새 수연이는 잘 지내냐? 통 얼굴 보기가 힘들다.”

“열심히, 그리고 바쁘게 지내고 계십니다. 잘 지낸다고까지는 말씀 못 드리겠습니다.”

“사서 고생을 하는 녀석이니까. 네가 그 애한테 잘하고 있는 건 충분히 알고 있다.”

“과찬이십니다.”

그리고 다시 강 비서가 커피를 들고 들어올 때까지 침묵이 이어졌다. 인석은 구태여 말을 붙이려 입을 열지 않았고, 결도 그런 노력을 하지 않은 채로 커피를 기다렸다. 얼마나 지났을까. 노크 소리가 들리고 커피가 인석과 결의 앞에 각각 놓였다. 인석은 강 비서에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사람을 들이거나 전화를 연결하지 말라고 했다. 강 비서는 고갯짓을 하고 자리를 비켜 주었다.

“수연이가 너를 여기까지 보내진 않았을 거고. 그래, 수연이 회사에 문제가 생긴 거냐? 무슨 일인지 말해 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