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위/아래로 스크롤 하세요.

집주인과 세입자 4화

6. 반격 (2)


라스퍼는 완전히 정신을 다른 데 팔고 있는 반의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반, 정신 차려.”

“……그래.”

반이 세입자인 오웰을 어떻게 한 줄 알았더니, 반대로 오웰이 반을 홀렸다고 라스퍼는 속으로 한탄했다. 라스퍼는 둘 사이를 떨어뜨려 놓아야 하나 고민했다. 익숙하게 회전의자를 끌고 와 다리를 꼬고 앉았다. 라스퍼의 못 미더워하는 눈빛에 반은 뒷목을 한번 쓸고 스툴을 가져와 앉았다.

‘취조당하는 느낌이야.’

“반, 진짜 중요한 문제야. 너 세입자랑 무슨 관계야?”

“집주인과 세입자지. 당연한 걸 물어?”

“넋을 놓은 거 같아서 물어봤다. 전에 알던 사이도 아니고?”

반이 고개를 저었다. 라스퍼도 그가 오웰이라는 사람과 어떤 접점도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반의 집에 세입자가 든 순간 오웰의 과거를 낱낱이 조사했다. 왕실 아카데미 이슈타르단 출신이라니 신분은 확실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라스퍼는 뒷세계에서 살아남게 해 준 자신의 감을 믿었다.

은밀하게 수하들을 아카데미에 보내고, 오웰을 알 만한 사람들을 수소문했다. 아카데미에는 그의 행적이 남아 있었고, 그를 아는 사람들이 다수 있었다. 분명 아카데미를 다닌 것도 틀림없었는데, 특이한 점이 있었다. 존재감이 거의 없이 조용히 수업을 들어 그가 자주 자리를 비우는데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었다는 것이다. 아카데미 교수들 또한 같은 말을 하며 말을 아꼈다.

라스퍼는 반이 출근하는 동안 오웰에게 경호를 붙이고 집을 관찰하도록 지시했다. 그것도 기척을 죽이는 데 수준급인 이들을 선별해서. 저녁에 오웰이 암굴 안쪽으로 들어가기에 경호원들이 따라붙었는데 그 이후 수하들이 실종되었다. 그들은 만 하루 만에 인력 사무소 ‘라스퍼 베가스’에 빨간 리본으로 묶여 배달되었다.

그러니 라스퍼는 오웰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순한 미소 뒤에 무언가 숨기고 있었다.

‘둔탱이 반은 위험한 것도 모르지. 내가 반을 지켜야 한다.’

라스퍼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집에 붙인 경호원들도 모두 당했어. 경고가 분명해. 마음만 먹으면 오웰도 해칠 수 있다는 경고.”

라스퍼는 뜸을 들이며 반의 표정을 살폈다. 반은 굳은 얼굴로 라스퍼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반. 뭔가 이상하지 않아? 암굴왕이 아무리 네게 신경 쓰고 있다지만 오웰 씨는 일반인이고, 암굴왕이 여왕 폐하와 불가침 조약을 했다면 말이야. 일반인을 위협하거나 협박하는 데 이용하지는 못할 거야. 여왕 폐하는 그런데에 굉장히……. 무서운 분이시잖아?”

비로소 반은 ‘사랑의 묘약’이란 라스퍼의 시험임을 알아차렸다. 라스퍼는 종종 반 주변 사람들을 농담이나 장난을 걸며 시험해 보곤 했다. 반은 본인의 일에 나서는 라스퍼에게 약간의 짜증을 느꼈다.

“라스퍼, 나도 사람 볼 줄 알아.”

라스퍼는 코웃음을 쳤다. 반이 자신과 친구가 된 시점에서 사람 보는 눈은 실격이었다. 반의 엄청난 무위가 아니었다면 1차 전쟁 때 배신한 친구란 자에게 살해당해 지금쯤 무덤에 누워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반은 그가 사건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을 정정하지 않았다.

“내가 널 몰라서 하는 말인 줄 알아? 사람 불안하게 만드는 데 도가 튼 놈 같으니.”

“정 불안하면 내 주변에 경호를 더 늘리든가. 그런데 어쩌지? 개인의 힘이라면 내가 왕국에서 가장 셀 텐데.”

“테르가 옛날부터 한 말 잊었냐? ‘다굴 앞에 장사 없다’, 이 말이야.”

“아, 테오도르.”

반이 테오도르를 떠올리고 고약 씹은 얼굴이 되었다. 예전에 라스퍼, 테오도르와 함께 국경에 있을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었다.

“네가 내 말을 쥐꼬리만큼이라도 믿는다면, 오웰 씨를 잘 지켜봐. 만약 이상하면 나한테 바로 알려 주고…….”

다정한 노란 눈이 반을 바라봤다. 라스퍼가 항상 제 몸보다 자신을 더 챙기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반은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속상하여 입가를 쓰는 반에게 라스퍼가 조곤조곤 말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 반. 정직 먹었다기에 왕자님한테 칼부림이라도 한 줄 알았는데, 암굴왕 때문이라며? 많이 쳐서 사실 오웰 씨가 좋은 사람이라고 해도 암굴 안에 있는 이상 네가 위험해. 난 그냥 네가 기사단 숙소로 돌아가면 좋겠다. 아니면 번화가 쪽에 새 저택을 마련하든가.”

반은 미간을 찌푸렸다. 암굴왕만 생각하면 속이 비틀렸다. 자신과는 상극인 남자였다. 여왕 앞에서 그는 왕국의 기사단장을 실실 웃으며 적당히 봐주면서 싸웠다. 그자의 실력은 인정하지만, 자신의 자존심을 긁으며 남의 것을 도둑질해 쓰는 이를 반이 좋게 볼 리 없었다.

‘재수 없어.’

“……여기 계속 남으려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될 거야, 반. 오웰 씨를 내보내는 일을 1순위로 해 주면 더 좋고.”

라스퍼는 한숨을 쉬었다. 아무래도 반은 암굴에서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해는 되었다. 반이 고생이란 고생은 다 해서 모은 돈으로 마련한 부동산인데, 빼앗긴 것이 억울하고 분통하여 시비라도 걸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라스퍼는 반이 과연 집을, 땅을,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지킬 수 있을지 걱정되었다.

반은 라스퍼가 말을 마치기 무섭게 책장에 딸린 서랍을 열고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책상 앞에 앉은 그는 왼손으로 빠르게 글을 써 내려갔다. 마지막에 ‘반 다이크 브라운’이라는 서명을 한 그는 서류를 라스퍼에게 건넸다.

“자, 내 대리인을 통해 제출해 줘.”

눈을 굴리며 빠르게 글을 읽은 라스퍼가 입을 쩌억 벌렸다.

“반, 이거 가능해?”

“물론 불가능하지. 여왕한테 가기 전에 반려될 예정이야.”

반은 라스퍼의 턱을 올려 주며 검은 눈동자를 빛냈다. 잔잔하게 웃는 그를 보며 라스퍼는 전장에서 그를 만난 아레네스 기사가 된 느낌이었다. 그의 눈에 지금 반은 암굴왕보다 사악해 보였다.

“소문만 나면 돼. 땅 주인이 돌아왔고, 나와 아는 사이일 수도 있다고 말이야.”

라스퍼는 턱을 쓸면서 반의 제안서를 분석했다. 잠시 후 라스퍼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친구치곤 꽤나 효과적인 방법을 생각했네. 잘 생각했어, 반. 첫 번째 효과로는 네가 말한대로 너와 소유주를 엮어 생각할 수 있지. 하지만 지금까지 네가 소유주임을 밝힐 수 없었던 이유가 여왕의 의심 때문이었는데, 여기서 두 번째 효과. 여왕은 암굴왕이 누군지 알고 있는데, 암굴의 주인이 이런 제안을 할 리가 없지. 여왕은 ‘브라운 씨’와 암굴왕을 분리해서 생각하게 될 거야.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라스퍼는 숨을 한 번 쉬고 말했다.

“암굴의 실소유주가 등장했다고 소문이 퍼질 거야. 암굴은 여러 집단이 균형을 이룬 상태인데, 브라운 씨의 행보에 따라 암굴이 요동치겠지. 암굴왕이 평화로운 군림을 원한다면 브라운 씨와 친분이 있는 널 건드리지 못하겠지. 그리고 그 소문은 내가 내면 되는 거지?”

질문으로 끝마친 라스퍼의 말에 반이 오만하게 고개를 까딱였다. 자신이 반에게 진 빚을 탕감하려면 아직 한참이나 멀었다. 라스퍼는 괜한 일에 말려들었다며 머리를 박박 긁었다.

“감수성 풍부한 내 잘못이지…….”

그는 엄마를 찾아다니던 어린 시절의 반에게 홀린 자신을 저주하였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소파에 드러누운 라스퍼를 보며 반은 방긋 웃었다. 라스퍼는 반의 암굴 생활을 반대하지만, 그럼에도 반이 부탁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해 줄 것이다.

며칠 후, 수도에는 암굴의 진짜 주인이 나타났고, 그가 그의 땅을 기사단 연무장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소문이 대대적으로 퍼졌다. 왕국의 재무부 직원들은 어떻게 해야 아슈엘 백작이 기분 나쁘지 않게 잘 거절할 수 있을지 고민하며 머리를 쥐어뜯었다고 한다.



7. 봄비 (1)


반은 침대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웠다. 투둑, 투두둑. 비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그는 아침에 비가 오면 하루 종일 두통에 시달렸다.

‘꿈 한번 살벌하군.’

눈을 끔뻑거리며 그는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려 했지만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슈타르와 아레네스의 1차 전쟁……. 종자 생활이 끝나고 기사 서임을 받았을 때가 열여섯 살이었다. 그는 왕국의 서쪽 끝, 아레네스 왕국과의 접경지에 배치된 평기사였을 뿐이다. 서쪽 국경은 전운이 감돌고 있었다.

그 당시 대공이 과격파 마법사들에 의해 시해되고, 함께 있던 어린 1왕자는 실종되었다. 범인들은 아레네스 왕국으로 도망쳤다. 아레네스 왕국의 하나 있는 대마법사가 그들을 보호하고 이슈타르로 보내지 않았다.

이전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던 두 나라 국민들의 감정은 극단으로 치달았다. 국민들을 위해 정책을 펼치고, 여왕의 혹독한 행보에 제동을 걸던 대공이었다. 이슈타르의 국민들은 시신도 없는 장례식에서 목 놓아 울었다.

2년 후, 반이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아레네스 왕국은 대규모 군을 보내 이슈타르 왕국을 침공했다. 그들을 처음 맞은 사람은 왕국민도, 왕실 기사도 아닌 정찰을 돌던 반이었다. 그때 입은 왼 어깨 부상으로 한참 앓았고, 반은 다시는 왼손으론 검을 들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서 여왕은 반을 적기사단에 보냈다. 적기사단은 왕실의 비밀 업무와 정보를 다루는 기사단이었다. 그들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지 않았고, 임무 중에 사망하더라도 유족들은 진짜 사인을 모른다. 적기사들은 세 명의 기사가 한 조를 이루어 활동한다. 자신이 속한 조 외 기사의 신원은 알 수 없다. 같은 조라도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었지만, 그 정도는 다들 눈감아 주는 듯했다.

적기사는 흑기사단처럼 전쟁의 전면에 나서지는 않았고, 전쟁 시에 정찰 임무와 함께 아레네스의 본진에 숨어들어 정보를 빼내기도 했다.

반의 조는 아네레스 군 가까이에서 동향을 살피고 돌아오는 임무를 맡았다. 조장은 꽤 나이가 있어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을 가진 카이스 경이었고, 다른 한 명은 반보다 한두 살 많은 엔티아스 경이었다. 셋 모두 기사 중에서도 몸이 재빠르기로 이름난 이들이었다고 반은 회상했다.

‘반, 너는 단 하나라도 무언가 간절히 바라 본 적 있어? 난 있었어.’

엔티아스 경의 목소리가 반의 머리속에서 울렸다.

오늘처럼 봄이었고,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갈색 머리에 굳어 붙은 피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엔티아스 경, 그는 그날 상관을 살해했다. 미리 음식에 마비 독을 넣어 놓은, 철저히 계획된 살인이었다. 마비 독을 이겨 내고 필사로 싸운 상관은 친구의 손에 죽었다. 그리고 그 친구 역시 움직이지 못하는 반 앞에서 죽어 갔다.

굵은 나무줄기에 기대 차가운 비를 맞는 모습은 처량하기까지 했다.

‘왜 날 죽이지 않아?’

반이 물었다. 지척까지 따라붙은 죽음을 맞이하며 친구가 말했다.

‘넌 살날이 많으니까.’

‘미친 새끼. 너는 아니라는 말이냐?’

‘난 5년 전에 이미 죽었다. 저 절벽 밑에 처박힌 개자식이 다 빼앗았어. 이제 죽었겠지, 그 개자식……. 개새끼……. 아리아나의 원수…….’

그러더니 그는 한껏 쉬어 버린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살아갈 이유가 사라지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나는 모르겠다. 죽음이 코앞인데도 모르겠다.’

그 말에 반은 진흙탕을 기어가 놈의 멱살을 잡았다. 힘이 빠져 비실비실 웃던 친구는 후련해 보였다.

‘네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넌 살아, 반. 가문에 휘둘리지 말고, 네 아버지가 하라는 대로 하지 말고……. 네가 하고 싶은 걸 찾아. 좋아하는 사람도 많이 사귀고……. 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면서 살아…….’

그 후 반은 차가운 그의 시신을 들쳐 메고 진영으로 복귀했다. 반은 조사를 받을 때까지 입을 다물었다. 사방이 암흑천지에 반에게만 조명이 비추어졌다. 깜깜한 곳에서 반은 적의 습격이 있었다고 진술했다. 사건은 별 잡음 없이 마무리되었다. 진술을 하고 나오는 길에 르마 가문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반은 처음으로 자신이 무능력하게 느껴졌다. 마차 안에서 반의 아버지인 아크하트 테라 르마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반에게 어떤 말로도 비난하지 않았다.

‘엔티아스 경에게도 이유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다시 파헤치지 말거라. 적기사의 일이었음을 기억해.’

그 누고도 반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이번 일에 아버지의 입김이 닿았다는 사실을 알았다. 엔티아스 경의 사연은 반만이 알고 있었으나, 반은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었다. 죽어 버린 망할 친구의 유언은 그를 따라다니며 속삭였다.

‘네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면서 살아…….’

“너는 나쁜 새끼다.”

반은 베개에 머리를 박은 채 중얼거렸다.

당시 라스퍼도, 테오도르도 없이 외따로 떨어져 적기사단에 들어간 상태였다. 외로운 반에게는 그의 주변을 맴도는 엔티아스 경만이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상대였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라고? 죽은 네가 할 소리냐.’

반은 침대 테이블에서 목걸이를 집어 들었다. 베개여 파묻혀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1차 전쟁 직전에 작은 마을에서 만난 소년이 준 것이었다.

‘간절히 바라는 게 있냐고? 있었어. 나도 있다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소중한 약속이.’

고아 거지가 가진 물건치곤 섬세했다. 반이 모르는 나라의 동전이었다. 한쪽 면에 아주 작은 푸른 보석이 박혀 있었고 날개 한 쌍이 부조되어 있었다. 그 아이는 반의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절대 잊히지 않았다. 그가 준 펜던트는 반이 불안해할 때마다 반짝이면서 존재감을 드러냈다. 항상 반의 가슴 위에서 달랑거리는 가죽 줄에 걸린 펜던트는, 10년의 세월이 지난 후 금속 줄로 교체되었다.

‘찾아오겠다고 했지.’

빼빼 말라 곧 죽을 것 같은 아이가 과연 전쟁 중에 살아남았을지도 의문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금까지 그 아이를 찾아내지 못했다. 반의 마음속에 남은 아픈 것, 거스러미처럼 때때로 생각나 반을 괴롭혔다.

하지만 찾아오겠다는 약속 덕분에 1차 전쟁도 2차 전쟁도 견뎌 냈다. 10년이란 시간 속에 정작 아이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가물가물했지만 자신이 우뚝 서 있으면 아이가 찾아와 알아볼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이를 위한 부동산을 샀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사들이는 데에 조금 재미가 들렸었는지도 모른다. 아이가 찾아오면 자랑도 하고, 하고 싶은 거 다 시켜 주고 싶은 아이 같은 마음이었다. 약간의 부끄러움과 함께 갑자기 몰려드는 현실감에 반이 펜던트에 이마를 댔다.

수도에 큰 규모로 부동산을 매입했기 때문에 밝혀지면 투기로 잡혀갈 수도 있는 데다가, 설상가상 범죄자들의 무단 점거 지역이 된 땅을 아이에게 보여 주기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도 악몽에 굴하지 말고 침대에서 일어나야 했다. 힘내서 암굴을 없애 버려야 한다. 기사에서 정직 되었다고 인생이 정직 되는 건 아니다. 원하는 대로 되진 않았지만 집도 땅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반은 과거의 친구에게 보란 듯이 잘살 것이고, 찾아오기로 한 사람에게도 자랑할 만한 삶을 살고 있었다.

반은 펜던트를 목에 걸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침대보를 펴고 이불을 각 맞추어 개었다. 갈아입을 옷을 들고 1층에 내려온 반은 거실에 있는 장을 열어 보며 두통약을 찾았다. 통에서 알약 하나를 털어 내고 물을 마시기 위해 주방으로 가는데, 소파에서 잠든 오웰을 보고 놀라 우뚝 섰다. 반은 그제야 자신이 늦잠을 잤고 오웰의 귀가를 보지 못했음을 생각해 냈다. 불편한 자세로 잠들은 그를 보고 반은 눈가를 찌푸렸다. 물 없이 약을 입에 털어 넣고 삼킨 그는 오웰을 깨우려고 소파로 다가갔다.

테이블 위에는 오늘 자 신문이 놓여 있었다. 오웰이 읽다가 그대로 잠들었는지 활짝 펴져 있었다.

‘얼굴 없는 살인마, 암굴을 벗어나나…….’

보기만 해도 흉악한 제목에 반은 진절머리를 치며 신문을 접었다. 살인 사건의 경우 왕실 수사관이 따로 있는데도 기사단이 같이 수사를 해야 한다. 그는 정직 기간에 굳이 일을 찾아 하고 싶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