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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주인과 세입자 5화

7. 봄비 (2)


반의 이성을 잡은 건 오웰이 아카데미 출신이라는 사실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오웰과 암굴을 연결 지을 고리가 없었다. 암굴 가운데서 티 없이 깨끗한 미소를 짓고 있는 오웰을 생각하니 전혀 들어맞지가 않았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요?”

벽난로 앞에서 불을 보며 꼼짝도 하지 않는 반을 보고 오웰이 물었다. 오웰은 정말로 피곤한지 목소리가 조금 늘어져 있었다. 그에 대한 것들은 조금 후에 물어도 되었다. 반은 일어나 오웰에게 싱긋 웃으며 물었다.

“아침은 드셨습니까?”

“아뇨. 집에 오자마자 잠들어서 배고픈 줄도 모르고 있었네요!”

오웰은 자리에서 일어나 반과 함께 주방으로 향했다. 반이 냉장고 문을 열자 때마침 천둥이 내리쳤고 전등이 느리게 깜빡였다. 아버지의 흔적은 피할 수가 없다고 생각하며 반이 한숨을 쉬었다. 르마 사(社)는 무기 개발과 유통을 했지만 마석을 이용한 생활용품도 만들었고, 이 시대에 이르러 마나를 흡착시켜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기를 개발했다. 그 제품들은 대부분 귀족들의 전유물이었으며, 반의 생활 전반에 깔려 있기 때문에 아버지의 흔적은 피한다고 피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마석이 다 닳았네요.”

오웰의 말에 반이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엎친 데 덮친다고 냉장고를 작동시키던 마석까지 제 기능을 잃었다. 마석을 다시 쓰려면 마력을 넣을 수 있는 마법사가 필요했는데 이 시대에 마법사는 멸종 직전이었다. ‘마석은 효율적이지 못한 구시대의 산물!’이라고 외치던 르마 사 직원의 외침이 들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냉장고는 마법이 아니면 구현되지 못했다.

화기를 다루는 기술은 불의 마법사의 전유물이었고, 약 30년 전 마법사들의 전권이 왕권에 밀려나 역사 저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마법이 아닌 방법으로 불을 다루는 기술은 연구되지 못했다. 또한 냉장고같이 온도를 낮추는 연구도 금지되어 있었다. 연로로 사용하던 자원이 30년 전까지만 해도 마법사들이 만들어 내던 마석이었으니, 지금까지도 금속 제련이나 기계 공학의 발전은 미미한 수준이었다.

그러다 보니 현재의 기술은 반의 하얀 주택과 맞먹는 크기의 기계 장치로 방 하나 크기의 석빙고 하나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소수 귀족만이 가질 수 있었다. 개인이 쓸 수 있는 냉장고는 마석밖에 방법이 없었다.

반은 아버지를 마법사라고 생각한 적 있었다. 사실을 알고 보니 마법사가 아니라 마법사를 납치해 고문하는 사람이었다. 대공이 마법사들의 인권을 주장한 후에야 납치된 마법사들은 자유를 찾고 정당한 보수를 받게 되었다. 아직 마법이 남아 있는 시대였지만, 마법사의 존재는 굉장히 미미했다.

사람들은 마법사라고 하면 아레네스 왕국에서 공식 인정한 대마법사를 떠올리곤 했지, 이슈타르에 있는 마법사는 생각하지 않았다. 아마 그것에 대해 묻는다면 굉장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을 것이다. 이슈타르 국민들은 마법사를 배척하고 혐오했다. 마법사들은 그들을 구한 대공을 해쳤으므로.

하여간 반이 심각한 이유는 두 가지가 있었다. 마석을 채우려면 냉장고의 제조사이자, 마법사가 있는 르마 사를 방문해야 한다는 것과, 냉장고 안의 식료품이 모두 못 쓰게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이미 오웰도 식사를 포기하기로 한 건지 심드렁한 표정으로 반창고 붙은 이마를 문지르고 있었다. 반은 드물게 심각한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장을 봐야겠습니다만, 비가 많이 내리니 식료품점도 문을 닫았을 겁니다…….”

창밖엔 요란한 소리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기사로서 전쟁을 겪고 보니 식사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반은, 괜히 자신이 챙기지 못해 오웰을 굶기게 된 것 같아 기분이 저조해졌다.

“아, 저 잠시 2층에 다녀오겠습니다.”

오웰은 계단을 두 칸씩 뛰어 올라갔다가 내려올 때도 달려서 내려왔다. 어쩐지 반은 오웰이 이마에 반창고를 왜 붙이게 됐는지 알 것 같았다.

‘피곤한데 저리 뛰어다니니 부딪히지.’

그가 속으로 혀를 차거나 말거나 오웰은 종이 상자 하나를 옆구리에 끼고 반을 잡아다가 소파에 앉혔다. 맞은편에 앉은 그는 상자를 열고 안에 든 간식거리를 테이블 위에 늘어놓았다. 초콜릿, 쿠키, 젤리……. 오웰의 새싹 같은 눈이 즐겁게 반짝였다.

비가 오는 날에도 오웰은 언제나 맑았다. 반은 그런 오웰을 지켜보는 일이 즐거웠다. 오웰이 건네준 하트 모양 초콜릿을 씹었다. 달달한 맛이 입 안에 퍼지면서 두통을 조금 몰아냈다. 다음 초콜릿이 눈앞에 내밀어졌다. 반은 손의 주인을 바라봤다. 오웰이 어쩐지 기대하는 눈빛으로 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반은 그 초콜릿을 받으며 시선을 살짝 내렸다.

“……맛있습니다.”

오웰이 환하게 웃었다. 반도 따라 웃고 싶었다. 하지만 다시 암굴이란 단어가 반의 입가를 잡아챘다. 의심을 지울 수가 없었다.

‘망할 라스퍼. 죽어도 곱게 죽게 놔두지.’

그 생각이 스스로도 비이성적임을 반은 알았다. 그래서 차라리 묻기로 했다.

“오웰, 제가 알려고 한 것은 아니지만, 밤에 암굴 쪽으로 가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실례인 것을 알지만 세를 받을 때 범죄와 관련이 없어야 한다는 조건, 기억하십니까?”

어쩐지 물으면서 입 안의 초콜릿이 쓰게 느껴졌다. 오웰은 눈을 깜빡이더니 작게 웃었다.

“하하, 범죄자일까 봐 걱정되시나 봅니다. 이해합니다.”

오웰은 손에 들린 파이를 내려놓았다.

“전에 인간에 대해 연구한다고 했던 것 기억하십니까? 음……. 그러니까……. 암굴 안도 어찌 됐든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사람의 다른 면이라고 할까요, 꼭 옳고 바른 사람만이 이 세상에 있는 건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암굴 사람들에 대해서도 연구하고 있습니다.”

미간을 일그러트리는 반을 위해 오웰은 말을 이었다.

“암굴 안에서는 사람들을 위해 상담을 하고 있어요. 저는 필요한 사람들에게 상담을 해 주고,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암굴까지 올 정도면 대부분 필사적인 사람들이더군요. 그러니 제 일을 통해 인간에 대해 더 많이 알 수 있겠지요?”

“위험하진 않습니까?”

“전혀요. 암굴 사람들도 제가 필요한가 봅니다. 끝까지 몰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말을 들어 줄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한동안 지내 보니 선물도 많이 받고 그렇습니다.”

“선물이요?”

반의 물음에 오웰은 손가락으로 간식 상자를 가리켰다. 반은 손에 들린 초콜릿을 툭 떨어트렸다. 표류하는 반의 눈동자를 보며 오웰이 미소 지으며 그를 안심시키려 했다.

“반, 걱정하지 말아요. 그 초콜릿은 제가 만들었습니다. 아, 물론.”

오웰은 손으로 자신의 한쪽 볼을 감싸며 수줍어했다.

“사랑의 묘약을 조금 섞었습니다. 안심하세요. 전 책임질 수 있는 일만 한답니다.”

반이 잠시 쩡하고 얼어붙었다. 당했다. 라스퍼에게 당한 걸 그대로 반에게 써먹었다. 반은 테이블을 엎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참으며 씩씩댔다. 오웰이 배를 잡고 웃는데 이마에 붙은 반창고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그런 걸 보면 확실히 사랑의 묘약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억울함 반, 화 반. 반반. 라스퍼가 친 사기를 왜 자신에게 복수하는지 몰랐다.

제대로 토라진 반은 반창고 떨어지는 고통이라도 느껴 보라며 오웰에게 손을 뻗었다. 오웰은 학자답지 않게 날렵한 몸놀림으로 반의 공격을 피해 집 안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지치지도 않는 오웰을 보며 결국 반이 나가떨어졌다. 소파에 주저앉아 반은 지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쨌든 암굴에 사는 사람인가? 이런 체력과 순발력이 이슈타르 일반 국민의 것이라면 백금기사단의 절반은 당장 은퇴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자신 또한 다시 한번 진지하게 은퇴를 결심했다. 세입자도 평범하지는 않았다. 절대로.

2층 계단까지 피해 도망갔던 오웰은 반이 조용하자 쪼르르 내려왔다. 그리고 먹던 파이를 다시 들었다. 응접실에 휴전으로 인한 평화가 찾아왔다.

쾅쾅쾅.

“……?”

현관을 노크하는 소리에 반이 고개를 쭉 내밀었다. 비가 퍼붓는 소리가 요란해서, 반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거라 생각했다.

쾅쾅쾅. 다시 들린 소리에 반이 일어나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오웰은 입 안에 파이를 털어 넣고 반을 지켜봤다. 날도 궂은데 무슨 손님일까? 반은 문에 달린 천을 살짝 열어 밖을 살폈다.

아무도 없었다.

소름 끼치는 감각에 뒷골이 쭈뼛 섰다. 기사단장의 감은 대체로 잘 맞았다. 집에 무언가 위험한 것이 찾아왔다.

반은 문을 열지 않고 재빨리 3층에 올라가 검을 챙겨 내려왔다. 오웰이 놀란 눈으로 반을 보다가 수상한 분위기를 느끼고 주방에서 프라이팬을 하나 들고 나왔다. 상황에 맞지 않게 양손으로 손잡이를 꼭 쥔 모습이 반을 웃게 했다. 오웰이 입을 내밀었다.

쾅쾅쾅.

반이 검을 뽑고 한 손으로 수신호를 만들었다. 셋, 둘, 하나. 문을 열었다. 반의 검이 문 앞에 선 이의 목 옆을 스쳤다.



8. 불청객 처리법


방문자는 양손을 어깨 위로 들고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왔다. 긴 금발 머리를 뒤로 땋아 내린 기사는 푸른 눈으로 원망스럽게 반을 노려봤다. 반은 악당같이 삐뚜름하게 웃으며 검을 겨누고 있었다.

“반, 날 알아봤으면 그만 검을 내려 주게.”

“아는 사이인가요?”

오웰은 테오도르와 반을 번갈아 보며 말했다.

“직장 동료인데 지금 이 시간에, 정직 중인 기사한테 볼일은 없을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불청객이란 말이군요.”

반이 고개를 끄덕이자 오웰은 눈을 반짝이며 프라이팬을 고쳐 쥐었다. 테오도르는 그런 그를 보며 눈에 띄게 굳어졌다. 반은 둘을 한눈에 담았다. 보아하니 둘은 안면이 있어 보였다.

“아는 사이입니까?”

“아니.”

“네.”

테오도르는 부정, 오웰은 긍정했다. 오웰이 테오도르의 뒤로 한 걸음 다가서면서 말했다.

“일전에 범죄 수사를 위해 협력한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원한 일은 아니었지만요. 수고비도 안 나오는 일이었습니다.”

“그럼 오웰에게도 불청객이란 말이군요.”

위험을 감지한 테오도르는 들고 있던 우산을 검처럼 잡고 뒤로 물러나며 도주로를 찾았다. 하지만 그의 뒤편엔 굳게 닫힌 현관문이 막고 있었다.

“오, 테오도르 달리. 도망은 현명한 선택이 아니야. 현관문엔 방범 마법이 걸려 있다네. 억지로 열려고 하면 함정이 발동되지. 펑- 하고.”

“마법이라니, 정말 구식…….”

“하지만 이런 때엔 더없이 훌륭한 역할을 해 주지.”

거짓말이었다. 반이 범죄에 예민하고, 자신의 본가의 기업인 르마 사가 제조사라곤 해도 비싸고 매번 충전해 줘야 하는 마법석을 굳이 현관문 보안을 위해 사용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반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에 테오도르는 혹시라도 마법이 발동할까 봐 현관문에서 옆으로 한 걸음 비켜섰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웰에게 가까워졌다.

“……반, 어떻게 할까요?”

“프라이팬으로 뒷목을 치면 기절시킬 수 있습니다. 다만 살살 치면 효과가 없습니다.”

“……제가 치면 금빛 기사님이 죽을지도 모릅니다.”

“살살 치는 것도 방법입니다. 도망가지 못할 때 살살 계속 치면…….”

“그건 고문이잖나!”

둘의 무시무시한 대화에 창백해진 달리가 소리쳤다. 반이 보기에 눈을 반짝이는 오웰은 진심으로 테오도르를 치고 싶어 했다. 테오도르는 공포에 떨며 반에게 애원했다.

“반, 내 친구……. 날 좀 구해 주게…….”

명색이 왕실을 수호하는 백금기사단장의 눈에 울 것처럼 눈물이 고였다. 반과 오웰 사이에서 놀아나는 불쌍한 직장 동료를 보고, 병아리 눈물만큼 양심의 가책을 느낀 반은 검을 거뒀다. 오웰은 미간을 구기며 프라이팬을 쥔 손에 힘을 뺐다. 테오도르의 뒤에서 테니스 라켓처럼 이리저리 휘두르는 모양새가 어쩐지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찾아온 용건.”

“공무 수행이네. 자리를 옮기는 게 좋겠어.”

테오도르는 오웰을 의식하며 말했다. 오웰은 한숨을 쉬며 테이블 위를 정리하고 2층으로 올라갔다. 둘 사이엔 어떤 인사치레도 없었다.

1층에 마련된 서재로 들어가자 달리가 품속에서 편지 봉투를 꺼내 반에게 내밀었다. 쌀쌀맞게 편지를 채어 간 반이 봉투 앞뒤를 확인했다. 압화로 꾸민 종이봉투에서는 귀부인들 사이에 유행하는 향수 냄새가 났다. 봉투를 봉한 밀랍에는 아무런 인장도 찍혀 있지 않았다. 누가 보아도 연애편지로 보였다. 반은 책상 위에서 페이퍼 나이프를 가져와 봉투를 절도 있게 가르고 물 흐르듯 편지를 꺼내 펼쳤다. 역시나 편지를 가장한 여왕의 명령서였다.

“……암굴에서 왕자님을 찾아 달라고? 정직 중인 흑기사단장한테? 왕족 수호는 백금, 수사와 조사는 청, 첩보와 기밀은 적이 맡지 않나?”

“요즘 수도에 돌아다니는 살인마 때문에 맡아 줄 인력이 없어.”

반은 잠깐 신문에서 본 ‘얼굴 없는 살인마’를 떠올렸다. 살인자 한 명을 잡는 데 기사단 두 개가 움직인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그들의 능력 부족 때문에 업무가 확실히 분리되어 있는 흑기사단에게 일이 돌아오다니 반은 ‘아주 조금’ 기분이 상했다. 자신도 그렇고 흑기사단도 굉장히 오랜 시간 전장에 있다가 겨우 돌아온 참이었다. 정직이라고는 하지만 휴가와도 같은 이 시간을 방해받았다. 좀 더 생각한 반은 다른 기사단들이 여유가 없기보다는, 여왕이 왕자를 찾는 데 자신이 필요했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여왕 폐하께는 어째선지 자네가 암굴 내부를 잘 알고 있을 거라 생각하고 계시더군. 그러니 이번 한 번만 부탁하네.”

역시 정직 중에 일을 시키려는 것이었다! 테오도르의 부탁이 아니더라도 여왕의 명령이라 반으로서는 거절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미 여왕은 ‘반 다이크 브라운’이 반일 거라고 확신했다. 그와 반이 동일인임을 알면서도 그에 대해 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고, 오히려 반을 이용하려는 것을 보니 여왕은 암굴의 부동산에 대해 눈감아 줄 생각인 것 같았다. 다른 말로는 당장 반을 투기로 연행해 가지는 않겠지만 땅을 되찾아 주지도 않을 생각이란 뜻이다.

‘어쩌면 암굴에서 일어나는 일에 나를 계속 이용하려고 할 수도 있겠지.’

반은 한숨을 쉬며 명령서를 양촛불에 가져갔다. 유려한 글씨를 따라 불꽃이 붉은색으로 타오르며 종이를 갉아먹었다.

‘나는 반을 진짜 내 아들처럼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 친형제처럼 그를 부탁합니다.’

여왕은 반을 다루는 법을 아주 옛날에 깨달았다. 가족이란 단어는 알면서도 휘둘리게 되는 마법의 단어였다. 반의 기억 속에 어머니란 존재하지 않았고, 굳이 떠올리자면 여왕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반은 한숨을 한번 쉬고 차마 여왕에게 부릴 수 없는 짜증을 테오도르에게 있는 대로 부리며 그를 쫒아냈다.

테오도르를 보내고 현관문을 닫는데 오웰이 내려와 있었다. 반은 직장 때문에 나가 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오웰에게 먹고 싶은 걸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었다.

“반이 만들어 줄 수 있는 걸로요. 그리고 전 잠이 부족하니 잠이나 더 자야겠습니다. 잘 다녀오세요.”

그리고 오웰은 급히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그가 있던 자리를 바라보던 반이 푸스스 웃었다.

‘내가 한 요리라면 뭐든 좋다는 뜻인가? 마음대로 맡겨 두면 뭐가 나올 줄 알고…….’

반은 전쟁 때 식량이 부족해 만들었던 괴상한 것들을 생각해 내고 고개를 저었다. 내일 식사는 특별한 요리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반은 옷걸이에 걸어 둔 레인코트를 걸쳤다.



9. 왕자 찾기 게임 (1)


“가면을 벗겨 주겠다, 가짜!”

머피의 법칙이란 말이 있다. 안 좋은 일이 일어날 땐 연속으로 몰려온다. 반에게 오늘이 딱 그런 날이었다.

그가 암굴 안쪽으로 급하게 돌아가던 중, 전혀 반갑지 않은 이를 발견했다. 고성이 들려 반이 골목을 향해 달려갔을 때, 하얀 가면을 쓴 남자와 그를 둘러싼 건달들이 반의 눈에 들어왔다. 암굴왕을 외곽 지역에서 만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그는 조금 당황했다. 건달들도 마찬가지였는지 그를 가짜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암굴왕이 이런 외곽에 있을 리가 없잖아?”

일전에 오웰을 위협했던 비쩍 마른 남자가 안광을 번뜩이며 외쳤다. 전에 반에게 당한 일은 기억도 못하는지 진짜를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했다.

‘……당하고도 정신을 못 차렸군.’

암굴왕의 실력은 이미 알고 있어, 반은 휘말리지 않도록 골목을 빠져나왔다.

“이보십시오, 아슈엘 백작!”

“뭐? 아슈엘 백작? 그놈이 지금 여기 있을 시간이…….”

반이 걸음을 멈췄다가 다시 앞으로 나아갔다. 등에 꽂히는 시선이 따갑다. 얼어붙은 건달들을 밀쳐 내고 암굴왕이 달려와 반의 팔을 붙잡았다.

“기사가 곤경에 처한 국민을 보고 그냥 지나치십니까?”

“……누가 위험한 상황이지? 내가 보기엔 저쪽이 더…….”

반은 암굴왕과 건달을 번갈아 보다가 건달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그에 암굴왕이 입매를 일자로 굳히고 그의 손을 잡아 내리며 낮게 말했다.

“여기서 기다리십시오.”

암굴왕은 입술을 한번 깨물더니 외투 자락을 펄럭이며 돌아섰다. 가면 뒤에서 번뜩이는 눈동자와 일자로 다물어진 입매가 그가 화가 났다는 걸 알려 주었다. 그를 화나게 했다는 저열한 기쁨을 느끼며 반은 담벼락에 기대어 섰다. 반은 암굴왕의 동작을 쫒으며 그를 분석했다. 전과 다르게 밋밋한 지팡이가 건달들의 뒷목을 향해 날아들었다. 암굴왕은 순식간에 적들을 기절시켰다. 절도 있는 모습에 반은 속으로 감탄했다. 빠르고 유연하게 이어지는 공격이 암굴왕의 특기인 듯했다.

‘여왕 앞에서는 어땠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