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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케이, 정신이 들어요?”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선우가 천근처럼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우 교수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생각지도 못한 등장에 선우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주변을 살폈다. 분명 집에 있었는데?

“교수님이 왜…….”

크림색의 벽지와 침대 옆 협탁 위 작동 중인 가습기를 본 선우가 입을 열었다.

“여기 병원이에요. 케이가 잠깐 정신을 잃는 바람에 철수 씨가 데리고 왔습니다.”

우 교수의 친절한 설명에 선우가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다시 두통이 찾아와 머리를 부여잡았다. 손등엔 수액용 주사 바늘이 꽂혀 있었다.

눈을 감으니 어지러움이 조금은 가시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한동안 아무 말이 없던 선우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교수님 말씀대로 그 여잘 만났어요.”

“…….”

“근데 또 꿈을 꿨습니다.”

담담한 선우의 말에 잠시 생각하던 우 교수가 물었다.

“예전과 같은 꿈을 여전히 꾼다는 겁니까?”

“아뇨. 다른 꿈입니다. 근데 더 고통스러워요.”

대답을 마친 선우의 눈이 어느새 우 교수를 향해 있었다.

“만나면 다신 꿈을 꾸지 않을 거라 하셨죠. 근데 왜 꿈을 꾸는 건가요. 그 여잘 만났고 화도 냈는데…….”

“그게 선우 씨 마음이 아니었나 보죠.”

우 교수의 말에 무슨 소리냐는 듯 쳐다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정말 화를 내고 싶었습니까? 그 여자분께 화만 내고 싶었어요? 혹시 다른 말이 하고 싶었던 건 아닙니까? 다른 걸 원했던 건 아닌가요?”

나긋한 어투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이었다.

“제가 말한 꼬인 매듭을 풀라는 건 묵혀 뒀던 감정을 풀어내라는 거였습니다. 그리고 그건 선우 씨가 본인에게 솔직해야만 할 수 있는 겁니다.”

우 교수의 눈이 선우를 직시했다.

“물론 감정을 해소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하루 만에 할 수 있을지, 1년이 걸릴지, 10년이 걸릴지. 그건 장담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 해소된다면 선우 씨도 비로소 예전의 기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겁니다.”

“…….”

“잘 생각해 보길 바랍니다. 진정으로 선우 씨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가볍게 묵례를 한 우 교수가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선우가 방금 들은 말을 곱씹었다. 내가 원하는 거라…….

어지럽기만 했던 머리가 차츰 선명해졌다.



***



청소를 마친 수연이 청소기 소리가 들리는 미술실 창문을 두드렸다.

“저 먼저 퇴근할게요.”

“네! 들어가세요!”

잠깐 청소기를 끈 홍주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현관으로 가 신발을 갈아 신은 수연이 학원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자 때맞춰 시린 바람이 불어왔다.

감기가 오려나……. 코트를 입었음에도 바람이 차게만 느껴졌다. 하루 새 달라진 날씨만큼 수연의 평온했던 마음도 어제와 달리 어지러웠다. 그래서인지 오늘따라 가까운 집이 멀어 보였다.

이제야 집으로 향하는 계단 앞에 선 수연이 보폭을 넓혀 계단을 올랐다. 산을 타고 내려오는 바람 때문에 고개를 숙이고 오르던 그녀의 눈앞에 낯선 구두가 나타났다. 옆으로 피했으나 구두는 다시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제야 수연은 고개를 들었다.

“저기, 길 좀 비켜……. 강선우?”

선우의 등장에 적잖이 놀랐는지 수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특히 어제와 같은 차림임에도 몰라보게 까칠해진 얼굴이 그녀를 더욱 놀라게 했다.

“……할 말 있어.”

반쯤 잠긴 목소리가 분노하던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해서 그와 이야기를 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난 어제 다 끝냈는데.”

제게도 이런 목소리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싸늘함이 묻어났다.

“또 그 소리! 일단 좀 들어.”

짧게 한숨을 내쉰 선우가 잠시 뜸을 들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네가 어제 그랬지. 10년 전에 이미 끝났다고.”

“…….”

“근데 그건 네 일방적인 통보였잖아.”

“…….”

“분명 우린 헤어지기 전날까지도 아무 문제가 없었어. 말 그대로 네 통보가 나한테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지.”

담담한 어조가 되레 수연의 가슴에 비수처럼 날아들었다. 그랬을 거야. 우리에겐 정말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 수연이 차오르는 감정을 참아 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수연의 물음에 선우가 재킷 안주머니에서 서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뭔데?”

“읽어 봐.”

선우에게서 받은 종이를 펴자 맨 위쪽에 쓰인 진단서라는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진단서? 이게 무슨 말이야. 수연이 시선이 천천히 종이를 훑어 내려갔다. 환자, W’s 클리닉, 정신과, 약물복용……. 듣지도 보지도 못한 영어와 함께 적힌 한글 단어가 수연의 머릿속을 혼란스럽게 했다.

“……이게 뭐야.”

“한글 못 읽는 거 아니잖아. 내 진단서야.”

“그러니까 이게 무슨 소리냐고.”

“내 정신에 문제가 있대.”

“……뭐?”

수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리고 그 원인은 너야.”

턱짓으로 저를 가리키는 선우에 수연이 답답한 듯 머리를 쓸어 넘겼다.

“알아듣게 설명해.”

“설명하면 내 말 믿을래?”

“일단 설명부터 해.”

단호한 음성에 선우가 잠시 숨을 골랐다. 그리곤 천천히 제 이야기를 시작했다.

“하아, 그래. 정확하게 말해 줄게. 정신과에 다닌 지는 좀 오래됐어. 한 5년쯤? 잘은 모르겠지만 미국에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부터였어. 네가 꿈에 나타났거든.”

선우의 말에 수연의 손이 자신을 가리켰다.

“내, 내가?”

“정확히는 네가 날 버리고 가는 꿈이었지. 매일 잠이 들면 꿈에 네가 나와서 날 괴롭혔어. 처음엔 수면제를 먹으며 잤는데 지금은 약을 한 움큼씩 삼켜도 잠을 자지 못해.”

수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말도…… 안 돼.”

“담당 의사가 그러더군. 내 무의식 속에 무언가가 아직 남아 있다고. 그래서 꿈이 사라지지 않고 자꾸 되풀이되는 거라고.”

선우가 말을 하면 할수록 수연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정말 나 때문에 그 긴 시간 약을 먹었다고? 수연의 손끝이 점점 떨려왔다. 그 떨림은 손끝을 타고 올라와 목소리에도 묻어났다.

“……거짓말이지?”

“거짓말이었다면 애초에 널 찾아올 생각도 안 했겠지.”

선우의 칼 같은 대답에 덧붙일 말이 없었다.

“의사가 더 이상의 약물 복용은 치명적이라고 해서 찾아온 거야.”

“날 찾아오면 해결이 된대?”

“의사 말로는 원인을 풀어내야 한다는데…….”

헤어진 연인이, 그것도 10년 전에 이미 헤어진 사이에 풀어야 하는 것이 뭘까. 수연이 궁금한 듯 입을 열었다.

“그게 뭔데?”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넌 그냥 협조만 해 주면 돼.”

신경 쓰지 말라는 듯 말하는 선우에 수연이 발끈했다.

“대체 뭘 협조하라는 거야?”

“너랑 같이 살아야겠어.”

전혀 예상치 못한 협조의 방법에 수연이 기겁하며 소리를 질렀다.

“뭐? 미쳤어? 내가 왜 너랑 같이 살아!”

수연의 목소리에도 선우는 동요하지 않았다. 되레 처음보다 훨씬 더 진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으니까.”

한없이 가라앉은 고동색의 눈동자가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었다.

“Please, Save me.”

“…….”

“나 좀 살려 줘. 이수연.”

선우의 두 무릎이 바닥에 닿았다. 저보다도 족히 20cm나 큰 선우의 정수리가 보였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수연은 지금 제 앞에 벌어진 상황이 눈물 나도록 힘겨웠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

떨리는 음성이 선우의 머리에 내려앉았다.

“마지막이야.”

“응?”

“네가 내 마지막 해결책이라고.”

간절한 목소리.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보진 않았지만 왠지 표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번만 도와주면 다신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다신?”

“정말 마지막이야.”

단호한 음성이었다. 수연이 아직도 제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선우를 내려다봤다. 헝클어진 머리카락 밑 빨갛게 언 귓바퀴와 어쩌다 다쳤는지 아물지 않은 손등의 상처까지. 반지르르하게 잘 손질된 모습이 아닌 다른 사람들은 절대 모를 적나라한 선우의 모습에 명치 부근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갑작스럽게 들린 목소리에 선우가 고개를 들어 수연을 올려봤다. 수연의 시선은 먼 곳을 향하고 있었다. 선우는 제가 잘못 들은 건가 싶었다.

“어?”

“어떻게 하면 되냐고.”

입술을 깨문 수연의 두 눈이 선우를 향했다. 충혈이 되어 옅은 분홍빛을 띠는 수연의 눈이 저를 향하자 선우가 벌떡 일어나 입을 열었다.

“같이 살자. 한 달만.”

“한 달?”

수연이 자못 놀라며 되물었다.

“한 달 뒤엔 미국으로 돌아갈 거야.”

“같이 살면서 내가 해야 할 일은 뭔데?”

혹시 간병인처럼 돌봐 줘야 하는 건가? 수연의 신경이 선우의 입으로 쏠렸다.

“이별 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