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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동네 초입에 자리한 3층짜리 상가 건물에서 초등생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아이들은 나이도 성별도 달랐지만 모두 2층 ‘다빈치 피아노 미술 학원’에서 나오는 길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노란 승합차에 타려던 민지가 뒤를 돌아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앞치마를 한 수연이 손을 흔들었다.

“그래. 민지도 잘 가고, 태현이도 잘 가렴!”

수연의 인사에 미리 타고 있던 태현이 꾸벅 인사했다. 오동통한 손을 배꼽에 댄 채 인사하는 모습에 수연이 기특하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애들 다 탔어요?”

상가 출입문으로 나온 원장, 영주의 물음에 수연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내일 봬요.”

“네.”

차에 오른 영주가 승합차의 문을 닫았다. 곧 시동이 걸린 차가 떠나자 수연이 앞치마를 툭툭 털어 낸 뒤 학원으로 올라갔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안으로 들어온 수연이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제일 안쪽에 있는 피아노실로 가는데 미술실의 문이 열렸다.

“퇴근하세요?”

“네, 일이 좀 있어서요!”

학원에서 미술반을 담당하는 홍주가 활짝 웃어 보였다.

“오늘도 고생 많으셨어요.”

“선생님도요! 그럼, 내일 뵐게요!”

가볍게 묵례를 한 홍주가 출입문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보던 수연은 간단하게 청소를 한 뒤 학원을 나왔다. 복도에 나오자 오래된 건물의 묵은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수연은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상가 밖으로 나온 수연은 동네 쪽으로 향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집으로 향하던 그녀의 눈에 가전제품 대리점이 보였다.

그 앞을 지나가던 수연의 눈에 진열된 TV 브라운관이 시선을 끌었다.

짙은 눈썹과 곧게 뻗은 콧대 핏빛이 도는 입술까지. 강선우였다.

수많은 플래시 세례에도 웃으며 손까지 흔드는 선우의 모습이 브라운관에 보이자 수연은 그대로 집을 향해 뛰었다.

오르막길을 빨리 뛰어온 만큼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급하게 뱉어 내자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댔다. 심장이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이렇게 뛰다간 곧 몸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오랜만에 뛰어서 그래. 뛰어서…….”

수연이 가슴께의 카디건을 붙잡았다. 크게 심호흡을 했지만, 탱탱볼처럼 주체 못 하는 심장을 주먹으로 툭툭 쳤다.

“제발 좀 멈춰.”

하지만 간절한 목소리에도 심장 박동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군데군데 칠이 벗겨진 초록색 철문을 열고 수연이 들어섰다.

분명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아는데도 늘 집에 들어오면 잘 다녀왔다는 인사를 했다. 아주 어렸을 적부터 살던 집이라 몸에 밴 깊은 습관이었다.

마루에 올라 장지문을 열었다. 휑한 거실 겸 부엌에 익숙하게 들어선 수연이 불을 켰다. 환해진 거실엔 흔한 TV 하나가 없었다.

개수대에서 손을 씻은 뒤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내려 두고 침대에 눕자 그새 땀이 밴 옷이 차갑게 느껴졌다. 하지만 꼼작하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천장만 쳐다봤다. 그러다 문득 선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TV 속 그 얼굴이.

“그 길로는 다니지 말아야겠다.”

집으로 오려면 무조건 큰길을 지나야 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런데도 이렇게 말하는 건 스스로 거는 주문이었다.

절대 보지 말자. 우연이라도 피하자.

그렇게 10년이었다. 보지도 듣지도 않았다. 그래야 버텨 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심장 깊이 뿌리내린 죄책감이 이미 온몸을 갉아먹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다는 건 내게도 잊을 수 없는 낙인 같은 기억이 남는다는 것과 같았다.

“언제쯤이면.”

그리고 그 기억은 아주 사소한 불씨에도 걷잡을 수 없이 크게 피어나 저를 괴롭혔다.

“무뎌질까.”

수연이 발밑 반듯하게 접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다음 날이면 아무렇지도 않아지길 바라면서.



***



“미안합니다. 강선우 씨. 다 왔는데 사거리에서 사고가 났지 뭡니까.”

이미 한 차례 미룬 시간보다도 20분을 더 늦게 도착한 오현동 기자가 능글맞은 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

“그럴 수도 있죠. 이해합니다. 오현동 기자님.”

말을 마친 선우가 테이블 위 찻잔을 들었다. 바쁘게 인터뷰 자료를 꺼내던 오 기자는 제 이름을 부른 선우에 크게 웃었다.

“하하하, 나 기억해요?”

“그럼요.”

“하긴, 어렸을 때부터 자주 봤지. 선우군 이만했을 때.”

제 앉은키보다 높은 허공 어디쯤을 손으로 가리킨 오 기자가 허허 웃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선우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보아하니 오 기자의 수다스러운 입이 시동을 건듯 싶었다.

불안해하는 철수를 안심시키려 인터뷰 장소로 온 제 선택이 후회됐다. 입 밖으로 나오려는 한숨을 참은 선우가 테이블로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찻잔까지 닿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그 일이 전화위복이 된 거지, 뭐.”

인터뷰지를 찾으며 내뱉은 오 기자의 말에 선우의 손은 그대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그 손을 보지 못한 오 기자의 입 또한 멈출 줄 몰랐다.

“솔직히 사고 당시엔 다들 재기하지 못할 거라 했었는데 이렇게 크게 성공하지 않았나? 그럼 된 거지.”

악몽과도 같은 과거를 자꾸 들춰내는 오 기자에 손을 거둔 선우가 능청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기억이 나네요. 오 기자님께서도 그러셨었죠. 아마?”

“응?”

“‘강선우, 마른하늘에 날벼락의 실사판’ 맞나요?”

10년 전 오 기자가 썼던 기사 제목이었다. 설마 선우가 이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던 그의 이마 옆으로 식은땀이 맺혔다.

“내, 내가 그랬었나? 하도 오래전이라 기억이 잘 안 나네. 아! 인터뷰 시작해야지?”

서둘러 변명을 한 오 기자가 녹음기를 꺼냈다. 처음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부터 들고 다녔던 것이었다.

“자, 이번 드라마에서…….”

능숙하게 인터뷰를 시작하는 오 기자에 차올랐던 짜증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진즉에 입을 막을걸. 찻잔을 댄 선우의 입가에 미소가 서렸다.



인터뷰가 막바지에 다다랐을 무렵 카페의 문이 열렸다. 손님이라곤 선우와 오 기자 둘뿐인 카페에 들어온 사람은 철수였다.

“그럼 인터뷰는 이쯤에서 끝내자고.”

내내 틀어 뒀던 녹음기를 끈 오 기자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어렸을 적부터 연예계 생활을 했던 터라 선우의 인터뷰는 시작부터 끝까지 완벽했다.

“역시 프로야. 어렸을 때도 인터뷰 잘하더니. 그 실력 어디 안 갔네. 아주 좋아.”

대답 대신 묵례를 한 선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철수가 테이블로 다가왔다. 선우가 쳐다보자 철수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카페 밖으로 나왔다. 겨울이 다가왔다는 걸 알려 주듯 시린 바람이 선우의 얼굴에 닿았다. 그제야 숨이 터져 나왔다. 인터뷰 내내 눌러뒀던 짜증과 분노를 담은 깊고 긴 한숨이 바람을 타고 흩어졌다. 이제 좀 살 것 같다.

그렇게 한참을 찬 공기를 들이마셨는데 철수가 좀처럼 나오지 않았다.

“오 기자한테 잡혔나 보군.”

눈에 훤히 보이는 그림에 혀를 찬 선우가 다시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제가 앉았던 자리에 앉은 철수가 보였다.

“에이, 10년 매니저가 모르면 누가 알아. 그리고 그 지라시 어차피 10년 전 일인데. 뭐 어때.”

“정말 모릅니다.”

“철수 씨, 진짜 이상하네. 혹시 강선우, 아직도 그 여자 만나고 있는 거 아니야? 그렇지 않고서야 10년도 더 된 지라시, 기사 쓴다는 것도 아닌데 확인 못 해 줄 것도 없잖…….”

쾅!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우의 주먹이 테이블에 냅다 꽂혔다. 갑작스러운 선우의 등장에 놀랐는지 오 기자의 가자미 같은 눈이 크게 뜨였다.

“예나 지금이나 눈치 없는 건 여전하네.”

그를 내려다보던 선우가 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귓구멍이 막혔나. 왜 사람 말을 못 알아먹어.”

“이 새끼, 너 방금 뭐라고 했어!”

격해진 감정에 오 기자의 목소리도 한층 더 높아졌다.

“네 수준이 딱 개라고. 멍멍.”

조소를 머금은 선우에 수치심을 느낀 오 기자가 주먹이 휘둘렀다. 하지만 주먹은 선우가 아닌 둘 사이를 급하게 막아선 철수의 볼에 맞닿았다.

빗맞았지만 안면을 강타한 오 기자의 주먹에 철수가 그대로 중심을 잃었다. 그런 철수를 잡아 준 선우가 아직도 씩씩거리는 오 기자를 쳐다봤다.

“말버릇만 나쁜 게 아니라 손버릇도 고약하네.”

“뭐야, 이 자식아? 한낱 배우 나부랭이 주제에 감히 기자를 무시해? 다시 바닥까지 추락하고 싶지? 좋아! 그렇게 만들어 주지! 내일 아침 신문 기대하라고.”

두 팔을 걷어붙인 오 기자가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선우가 여유롭게 입을 열었다.

“그래. 기대하지. 대신, 미래일보를 뺀 나머지 신문에 당신 이름이 어떻게 나올지 그것도 기대하라고.”

“뭐라고?”

“‘무례한 인터뷰 진행 후 매니저까지 폭행! 기자의 갑(甲)질은 어디까지인가’ 어때, 내일 아침 신문 헤드라인으로 딱이겠지?”

“강선우!”

“그러니까 인터넷에 신상 털리기 싫으면 입 닫고 조용히 가.”

낮게 깔린 선우의 목소리가 카페 안에 울렸다. 분했지만 차갑게 내려다보는 선우의 살벌한 눈빛에 오 기자는 하는 수없이 가방을 들고 카페를 나갔다.



차로 이동한 철수가 안전벨트를 매곤 액셀을 밟았다. 카페 주차장에서 나와 도로를 달리던 철수가 10시를 향해 가는 시간을 확인하곤 속도를 올렸다. 그러면서도 백미러를 힐끔 살폈다. 선우는 반듯한 자세로 눈을 감고 있었다.

혹시나 오 기자와 나눴던 얘기로 인해 선우가 동요될까 싶어 걱정했었다. 얼마 전 상담에서도 수연에 대한 말을 했다는 우 교수에 다시는 그러지 말아 달라 당부까지 했던 터였다. 그런데 상담실도 아니고 오 기자에게서 수연의 이야기를 들을 줄이야.

철수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연을 생각하면 마음 한구석이 불편해졌다.

문득 10년 전 일이 떠올랐다. 막 스무 살이 된 선우의 매니저로 채용됐을 무렵, 저도 스물의 어린 나이였다. 그땐 매니저로서 성공하겠다는 큰 다짐과 포부가 있었기에 사장님의 말씀을 신과 같이 받아들였다.

‘선우에 관한 일은 전부 세세히 보고하도록.’


사장님의 말대로 선우의 일거수일투족, 마치 감시자라도 된 양 살았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연을 만났다.

‘우리 엄마도 모르는데, 내 매니저니까 특별히 소개해 준다. 엄청 예쁘지?’


지금보다 앳된 선우와 그 옆에서 수줍게 인사하던 수연.

‘안녕하세요. 이수연입니다.’


불현듯 떠오른 옛 기억에 철수는 입술을 꽉 깨물 수밖에 없었다. 그때, 뒷좌석에서 선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김철수.”

“자는 거 아니었어?”

갑자기 들리는 선우의 목소리에 그가 자는 줄 알았던 철수는 화들짝 놀랐다. 백미러를 힐끗 쳐다보자 어딘가 상념에 사로잡힌 선우의 옆모습이 보였다.

“왜? 무슨 일인데?”

답지 않게 뜸을 들이는 목소리였다.

“이수연 좀 찾아.”

“……뭐라고?”

순간 핸들을 놓칠 뻔한 철수가 손에 힘을 줬다.

설마 잘못 들은 거겠지. 아니겠지. 철수가 상처가 터진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수연 좀 찾으라고. 만나 봐야겠어.”

“갑자기 무슨 소리야.”

철수가 신발을 벗고 방으로 향하는 선우를 잡았다.

“이수연 찾으라고.”

“그러니까. 갑자기 왜?”

“이유 불문. 찾으라면 찾아. 내일까지.”



집에 도착해 짐을 올려 둔 철수가 선우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방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침대에 앉아 흰 병에서 무언가를 꺼내는 선우가 보였다.

“너 그거 뭐야?”

“보면 볼라? 약이잖아.”

“약이 어디 있어서? 설마 따로 받아 왔어? 아니다. 요즘 계속 스케줄 하느라 집에만 있었는데…….”

“원래 있던 거야.”

“그럼 그동안 스케줄 끝나고 방에 있던 이유가 약 때문이었어?”

그저 쉬고 있는 거라 생각했는데 매일 약을 먹고 있었다니. 선우의 상태가 새삼 심각하게 느껴졌다.

선우는 대답도 하지 않고 잘 정돈된 이불을 가슴께까지 올려 덮었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철수가 불을 끄고 방을 나왔다. 허탈한 표정의 철수는 방이 아닌 거실 소파에 앉았다.

‘이제 약으론 무리야. 언제까지고 약을 먹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이미 케이는 장기 복용을 한 터라 문제가 돼.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약을 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네.’


불안정한 머릿속에 우 교수와 나눴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 약만 끊을 수 있다면.”

결심을 굳힌 철수가 휴대폰을 꺼냈다. 버튼을 누르자 화면에 사장님의 번호가 떴다. 잠깐 망설여졌지만 번호를 지우곤 다른 번호를 썼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곧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사람 좀 찾아 줘요. 이름은 이수연. 지금 나이는 서른이고 예선예고 피아노과 졸업했어요. 내일까지면 좋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