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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연의 시작



점심은 나 혼자 작은 식당에서 했다. 식사는 남작가의 음식과는 비교도 되지 못할 정도로 훌륭하여 식사를 모두 마쳤음에도 조금 더 먹고 싶은 것을 꾹 참아야 했다. 식사를 마치고 식당 문을 나서는데 후작 부인께서 보자신다 하며 하녀 하나가 다가와 조곤히 말했다.

하녀를 따라 후작 부인이 있는 1층 응접실로 가자 펠리체 영애와 그녀의 하녀 로사가 한눈에 보였다. 펠리체 영애는 외출하려는지 광택이 들어간 고급 견사 재질의 벨 드레스를 갖추어 입고 있었다. 응접실로 들어간 나는 후작 부인께 인사하고 펠리체 영애에게도 인사했다.

“뭐야, 이 오만한 여자가 내 선생이야?”

펠리체 영애 입에서 거침없는 막말이 나왔다. 후작 부인이 깜짝 놀라며 얼굴을 붉혔다.

“펠리체, 이게 무슨 무례냐? 어서 사과드려라.”

후작 부인의 말에 펠리체 영애가 싫은 티를 내며 나에게 사과하고는 또다시 삐죽이 입을 내밀었다.

“그래도 이분에겐 배우기 싫습니다, 어머니.”

“네가 배우고 싶은 선생은 있더냐? 이번에도 선생이 일을 그만둔다 하면 나도 그냥 두고 보지 않을 테니 알아서 해라.”

모녀 사이에 낀 내가 눈을 굴리며 어색하고 민망하게 눈치를 보았다.

“수업은 하루 2시간씩, 1시간은 첼사, 1시간은 자수 시간으로 하고 수업 시간은 우리 펠리체와 저…….”

“제스나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제스나 선생이 함께 정하도록 해요. 남는 시간은 2층 서재에서 책을 봐도 좋고, 외출해도 좋으니 자유 시간으로 쓰도록 하세요. 급여는 집사가 매달 정해진 날에 줄 겁니다. 질문 있나요?”

“없습니다, 부인.”

용건이 간단히 마무리되자 후작 부인이 자리를 비켜 주며 응접실을 나갔다. 펠리체 영애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내 주위를 돌았다. 마침내 그녀가 내 앞에 가까이에 섰다.

“그렇게 잘난 척하더니 겨우 가정 교사로 들어오셨네요?”

그녀가 팔짱을 끼며 비꼬았다. 내 가슴팍 정도에 키를 가진 그녀를 보기 위해 고개를 내리며 나는 그녀에게 지지 않으려 눈을 맞추었다.

“잘난 척한 것이 아니고, 법을 알려 드린 것입니다, 시출러 영애.”

나의 단호한 말에 펠리체 영애가 인상을 찡그렸다. 잘 지내긴 다 틀린 것 같아 낮은 한숨이 나는 것을 속으로 삭였다.

“그렇게 똑똑하시니 한번 지켜볼게요. 시출러가는 무능한 사람을 제일 싫어하니 알고 계시고요.”

“네, 명심할게요.”

내가 주눅 들지 않자 펠리체 영애가 조금 씩씩거리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흥분부터 하는 것이 아이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잠자코 그녀가 하는 말을 듣기만 했다.

“수업 시간은 내 맘대로 정하도록 하죠. 후작가의 영애는 일과가 꽉 차 있거든요.”

“네, 영애 뜻대로 하겠습니다.”

“그럼…… 오전 11시, 오후 2시로 해요.”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영애.”

“오늘은 인사만 하는 것이니 수업은 내일부터 하는 것으로 해요. 제가 어머니께 말씀드려 놓을게요.”

수업을 시작하자고 한다 해도 영애는 내 말을 순순히 따를 것 같지 않았다. 이미 그녀 몸의 반은 현관 쪽을 향해 한껏 틀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알겠습니다.”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응접실을 나섰다.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지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보내고 기분 전환을 할 겸 저택 주위를 둘러보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건물 뒤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보이는 큰 건물에 호기심이 생겼다. 밖에 서서 살펴보자니 그 건물은 연무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듯했다. 남작가는 기사들이 없었으므로 연무장 같은 것도 없었다. 기사들의 기합 소리가 우렁차게 울리자 그 소리를 쫓아 얼굴을 빼꼼히 내밀어 연무장 안을 들여다보았다.

“누구시오?”

등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놀라 빠르게 뒤돌아섰다. 다섯 명의 훤칠한 기사가 한 명은 정복을, 나머지 네 명은 전투복을 입고 서 있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오늘 고용된 가정 교사인데 연무장이 있는 것이 신기하여 그만……. 다른 뜻으로 본 건 아니고, 진정 궁금하고 신기하여서요.”

혼자 이러니저러니 변명하였다. 당황한 내가 우스웠던지 그 기사들은 나를 보며 씨익 웃고는 예를 갖추고 인사했다. 나도 퍼뜩 예를 갖추고 인사했다.

“저희는 후작가의 기사들입니다. 이쪽부터 론, 제트, 바리, 디센이고 저는 남작이며 기사인 린드입니다.”

기사 정복을 입은 린드라는 기사가 기사 하나하나를 나에게 인사시켰다. 린드는 나이가 지긋해 보였는데 딱 봐도 후작가의 기사단장인 듯했다.

“저는 제스나 로인입니다.”

“혹시 돌아가신 로인 남작의 따님이신가요?”

“저희 아버지를 아시나요?”

나의 질문에 린드가 눈에 띄게 반가워하며 나에게 다가왔다.

“예전에 몇 번 뵈었지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는데 이리 아리따운 따님을 뵈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네. 제스나라고 편히 불러 주시고, 말씀도 편히 하세요.”

‘린드’라는 후작가의 기사단장은 남작의 귀족 지위를 가진 자였다. 그런 직위를 가졌음에도 가정 교사로 처음 본 나에게 존대해 주며 돌아가신 아버님을 언급해 주는 것이 감사해 마음이 뭉클했다.

“그래, 그럼 또 보자꾸나.”

짧은 만남 후, 린드는 다른 기사들을 이끌고 연무장으로 들어갔다. 가만히 그들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새로운 인연들이 생긴 것이 무척 신기하기도 하고 기분이 좋기도 하여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나는 그 기분을 그대로 간직한 채 예쁜 화원으로 가서 벤치에 앉았다. 조용히 노래를 흥얼거리며 틀어 올린 머리의 핀을 살며시 빼내어 손에 살짝 쥐고는 눈을 감은 채 꽃향기를 만끽했다. 시원한 바람에 벤치 뒤로 드리워진 긴 머리카락이 한 방향으로 흩날렸다. 그 느낌이 기분 좋아 흩날려진 후 제멋대로 자리 잡은 머리를 단정히 귀 뒤로 다시 넘겨 두고 나는 그곳에 한참을 있었다.



*



저녁 식사 후에 방에 들어온 나는 촛불이 켜진 큰 촛대 두 개를 책상의 먼 쪽 각 모서리 부근에 올려 두었다. 크고 긴 창과 조금 떨어진 곳에 책상이 있었는데, 책상 의자에 앉으면 창밖으로 밤하늘과 정원이 바로 보였다. 내가 이 방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것이 바로 이 풍경이었다.

내 방 창문 저쪽 맞은편으로 불 꺼진 3층의 방 창문이 몇 개 보였는데 방 하나의 창문인지 아니면 각 방의 창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 시간에도 불이 꺼져 있는 것을 보고 귀빈용 게스트 룸이라 확신했다.

씻고 나와 방문 옆에 걸린 거울을 보며 긴 머리를 한 갈래로 가지런히 땋아 한쪽 어깨로 내려 두었다. 옷도 잘 때 입는 시원하고 편한 소재의 잠옷용 흰색 드레스로 갈아입은 후였다. 한여름 밤공기와 풀벌레 소리에 나는 창문을 더욱 활짝 열어젖히고 책상에 앉아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펠리체 영애와의 상견례, 관계 회복이 쉽지 않을 것 같은 상황과 앞으로 있을 수업에 관한 내용을 적어 두고, 오늘 남작가에서 나온 일과 앞으로의 내 삶에 대한 고민도 남겼다. 한참 일기를 쓰는데 아래쪽에서 마차 소리가 났다. 나는 책상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 바로 앞에 서서 저쪽 밑을 바라봤다. 후작가 문양이 있는 마차에서 테일스 영식이 내렸다.

내가 몸을 돌려 다시 책상으로 가려 할 때, 테일스 영식이 고개를 들어 내 쪽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나를 또렷하게 응시하는 듯하였다. 인사라도 해야 하는가 싶어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나 그는 갑자기 고개를 휙 돌리고 그대로 현관으로 들어갔다.

“인사하는데 민망하게 들어갈 건 또 뭐야? 하긴 잘난 후작 영식에겐 그저 사용인일 뿐인데 내 인사가 뭐 그리 중요할까…….”

그의 모습을 씁쓸하게 보다 창에서 책상 앞으로 걸어가던 나는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소스라치게 놀라 자리에 멈춰 섰다.

흰색의 네글리제…….

얇은 천으로 시원하게 만들어진 네글리제는 속살을 살포시 비쳐 내며 굴곡진 내 몸의 형태를 따라 물결과 같은 선을 드러내 보였다. 나는 테일스 영식이 나의 잠옷을 제발 보지 않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이런……. 어쩌지? 내가 못 살아. 카디건은 폼이니? 입으라고 있는 걸 왜 모셔 두니…….”

내 스스로를 책망했으나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창문의 끝이 허리 즈음에 오는지라 영식이 내 차림을 꼭 봤을 것만 같아 몹시 절망스러웠다. 붉어진 내 얼굴을 따라 발끝까지 열이 났다. 나는 그날 이불을 걷어차며 깊은 밤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



제국력 895년 7월 19일.

이른 아침부터 마치 전투에 참전하는 사람인 양 마음을 굳게 먹고 오전 수업을 준비했다.

아침 식사 시간에 로사가 와서 오전은 첼사 수업으로 하자는 펠리체 영애의 말을 전했고, 나는 1층 작은 응접실에서 첼사 수업 준비를 해 두고는 영애를 기다렸다. 잠시 뒤, 펠리체 영애가 로사와 함께 응접실로 들어왔다.

로사는 벽에 가서 서 있고 펠리체 영애는 간단히 인사하고 첼사 앞에 앉았다. 로사가 서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나는 펠리체 영애 옆에 앉기 전에 로사가 벽에 붙어 있는 의자에 앉아 있어도 되겠냐며 영애에게 의견을 물었다. 펠리체 영애가 동의하여 로사는 우리의 맞은편 벽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럼, 기본 손동작과 기본 음계 치기를 해 볼게요.”

나의 말에 펠리체 영애가 퉁명스레 답했다.

“아니, 그건 너무 기초 아닌가요? 제가 설마 그걸 모를까요? 선생을 몇 번이나 바꿨는데…….”

“시출러 영애, 첼사 연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손동작과 밸런스입니다. 손동작이 그 모양을 잃으면 밸런스가 무너져 연주가 능숙하게 느는 것이 더뎌지기 마련이지요. 몇 번을 배우셨어도 또 배우셔도 좋을 것이 기본 손동작입니다. 그리고 혹시 수업 중에 영애께서 잘할 수 있는 부분을 저에게 알려 주시면 그 부분에 대한 영애의 실력을 평가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테니 언제라도 알려 주십시오.”

나의 말이 끝나자 펠리체 영애의 얼굴이 또 붉어졌다. 뭐가 그리 분한지 눈에 보이지 않는 연기가 머리에서 뿜어져 나오는 듯했다. 그렇게 그녀와의 첫 첼사 수업은 힘겨운 기 싸움으로 끝이 났다. 너무 힘든 마음에 점심이고 뭐고 그냥 쉬고 싶기만 했다. 기 빨린다는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점심 식사 후 후작 부인이 말한 2층 서재를 둘러보러 나섰다. 서재의 문을 열고 들어선 나는 그 웅장함을 보고 감탄했다. 보통의 방 두 배 크기는 되어 보이는 공간의 모든 벽에 들어찬 책장들과, 그 책장들을 하나같이 꽉 채운 책들은 내게 위압감을 안겨 주었다. 위엄에 어느 정도 기가 눌린 채로 둘러보자니 이런 어마어마한 규모의 책들이 테마별로 잘 정리되어 있는 것이 또한 놀라웠다.

서재는 배열 좋게 늘어선 세로로 긴 큰 창들이 책장 중간중간에 자리했고, 해는 그곳을 통해 빛을 부서뜨리며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몇몇 열린 창으로 들어온 바람이 희고 하늘하늘한 커튼 한쪽을 춤추게 하였다. 그 모습이 아름다워 나는 한참을 자리에 서 있었다. 책 냄새가 가득한 서재는 화원과 더불어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이 될 듯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