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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날벼락을 맞아도 이 정도는 아닐 거다. 안온한 삶을 영위하리라 기대하던 엑스트라1에게는 악역 주연이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 자체가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이제는 그거로도 모자라서, 이 방에서, 에드윈과 단둘이, 계속 같이 있으라고?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순 없었다. 비단 그가 악역이라서 그러는 게 아니었다.

그는 상사였다. 그것도 마탑의 수장. 전생의 회사로 따지자면, 대기업에 다니고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회장님의 사무실에서 회장님과 같이 일하게 된 것과 같았다.

“다, 다시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현실을 믿고 싶지 않아 물었다. 에드윈은 별일도 아니라는 듯 답했다.

“항상 한 명 정도는 내 방에서 대기하고 있게 했었지. 근데 연구실장은 이제 너 하나뿐이야.”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다른 분들은 어디에 계세요?”

“글쎄. 지금쯤 어딘가를 헤매고 있지 않을까.”

“네?”

“쓸모없는 것들은 남겨 놓을 필요가 없으니까.”

그래.

이런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나는…… 차라리 일을 엉망진창으로 해야겠다는 해결 방안도 폐기해야 했다.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나는 어디 던전에 버려질지도 몰랐다.

“그래도 네가 죽이면 안 된다고 했으니 죽이진 않았어.”

과연 성공적으로 튈 수 있을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른 것에 대한 질문은 나중에 하지.”

그냥 넘어간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다.

나에게 한쪽의 책상을 내준 에드윈은 다른 말 하나 덧붙이지 않고 침대로 향했다. 걸어 올라가는 그의 뒤태가 어제보다 적나라하게 보였다.

이러고 싶진 않지만, 에드윈의 몸이 좋은 게 잘못이었다.

나는 넓은 어깨에 비해 가느다란 허리를 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이러면 안 돼. 정신 차려. 나는 사정없이 고개를 저었다.

에드윈은 두껍고 새카만 커튼을 치더니 더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책상 앞으로 향했다. 확실히 지하 연구실에서 쓰던 것보다 백배, 천배는 좋은 가구였다.

의자에 앉자 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폭신함이 과해서 구름이 나를 감싸 안는 것 같았다.

“아흐……. 좋다.”

가만히 앉아 있다가, 나는 한편에 쌓인 설계도를 펼쳤다. 일을 열심히 해야지. 나는 일개미니까.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건 에드윈을 보고 있으면 지겹지 않다는 거였다. 반짝반짝 빛나는 얼굴에 깃든 퇴폐적인 매력이 괜히 나를 덥게 만드는 듯했다.



일단은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나는 내가 이 방에 들어오며 아주 잠시 가졌었던 마음을 되새겼다.



✎ ✎ ✎



“퇴근하겠습니다.”

설계도 하나만 잡고 끙끙거리길 몇 시간. 어느덧 해질녘, 퇴근할 시간이었다. 에드윈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커튼 쪽을 보며 이야기했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이대로 퇴근하면 내일 목숨이 위태로울까?

한 방에서 지내야 하지만 죽은 듯이 잠만 자는 상사는 편하긴 했다. 어쨌든 일에 집중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퇴근 확인을 받지 못해 일어나길 기다려야 하는 삶은 내가 원하는 삶이 아니었다.

야근이 잦은 직종이긴 했지만 일단 퇴근 시간은 확실히 해 둬야 한다. 그래야 정상적으로 퇴근하는 날도 있고 그러지.

“에드윈 님?”

속삭이듯 불렀지만 역시 대답은 없었다. 나는 일어나려다 다시 의자에 앉았다.

어쩔 수 없었다. 에드윈이 일어난 후에 가야 했다. 아직 그가 퇴근한 부하 직원에 분노하는 상사인지, 쿨하게 넘기는 상사인지 알지 못했으니까.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마법진이 그려진 양피지를 꺼내 들고 수식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해가 지고, 그나마 들어오던 빛도 모조리 사라져 방에 어둠이 깔렸다. 다행히 책상맡에 초가 있어 불을 켤 수 있었다. 나도 불을 켜는 마법 정도는 할 줄 아니까.

설마 나, 오늘도 밤새야 하나?

진짜 그건 싫다. 누워서 자고 싶었다.

체력이 좋은 것과 피로를 해소하는 건 별개의 문제다.

에드윈의 일로, 어제부터 오늘까지 내내 긴장하느라 온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얼른 집에 가서 뜨거운 물에 목욕하고 내 조그만 침대에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깨워 볼……까?

대체 잠을 얼마나 깊게 자기에 이렇게까지 안 일어나는 건지.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는 잔인한 악역이다.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를 위해 못된 선배도 응징해 주었고, 선배가 나를 괴롭힐 때 ‘나를 건드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도 해 주었다. 내가 멍청하지 않아 마음에 들어서 기쁘다고 했다.

그러니까, 음……. 퇴근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아니면 살짝 깨워 보는 것 정도는…….

퇴근에 대한 강렬한 욕망이 직장인의 마음을 흔들고 있었다.

“에드윈 니……임.”

나는 천천히 계단을 오르며 속삭였다. 제발 에드윈이 한 번에 듣고 깨어나길 간절히 빌었다.

“에드윈 니임?”

“으…….”

안에서 낮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조금만 더 하면 깨겠다.

“에, 에드윈 님. 저어…….”

“흐윽.”

이건…… 일어나는 소리가 아닌 것 같은데?

작지만 분명하게 들려왔다. 이건 고통에 찬 신음 소리였다.

나는 계단을 뛰어 올라가 커튼을 열었다. 그러고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나도 모르게 숨을 헉, 들이쉬었다.

나신으로 잠든 에드윈의, 미처 이불에 가려지지 않은 가슴팍에 난 커다란 상처가 새까맣게 그를 좀먹고 있었다.

“에드윈 님!”

깜짝 놀라 그에게로 다가갔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았지만 칼에 베인 상처 같았다. 에드윈은 식은땀을 흘리며 끙끙 앓고 있었다.

아니, 이만한 상처를 안고 잠을 자다니…….

“이 상처는.”

이 상처는 전쟁터에서 얻어 온 것일 테다. 이번에 에드윈이 참여한 전쟁은 마녀 일족과의 전쟁이었다.

도서관의 모든 책을 읽은 내 머릿속에는 당연하다는 듯 이 마법의 정체가 떠올랐다.

마녀 일족이 사용하는 마법. 몸을 옭아매고 생명을 갉아먹는 자상을 남기는 마법이었다. 저주에 가까웠다.

대상자가 아파하면 아파할수록 빠르게 생명을 좀먹는 것이었다.

그의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나는 앞뒤 잴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악역이라지만 이렇게 죽일 수는 없었다.

진통제와 항생제 정도는 지하 연구실에서 만들어 본 적이 있었다. 널려 있는 게 재료이기도 하고.

이 정도 약이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책을 다시 찾아 마법의 수식을 알아낼 때까지만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했다. 그의 통증이라도 멈춰야 했다.

에드윈이라면 이 상처에 대해 모를 리가 없는데.

그라면…….

혼자 치료하고도 남았을 거고, 약도 최고급으로 구할 수 있을 게 뻔했다. 내 아픈 어머니에게 약을 보내 주겠다고 자신 있게 말한 만큼.

그런데 왜 치료하지 않고 내버려 뒀을까.

나는 피어오르는 생각을 멈추고 지하 연구실로 달려갔다. 퇴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기에 마탑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야근하는 중인지 몇몇 연구실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만이 사람이 있다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어. 엘렉트라.”

문을 열자 데니로가 보였다. 하필 이럴 때에 그를 마주하다니.

이쯤 되면 데니로와 나는 인연이 아닐까? 그것도 아주 질기고 질긴 악연.

이 몸에 빙의해 눈뜬 순간부터 나에게 가장 많은 모욕을 준 것도, 말을 건 것도 데니로였다.

나는 그가 건네는 인사에 답하지 않고 연구실 한편의 재료를 모아 둔 수납장으로 다가갔다.

“뭐야. 잘렸냐?”

내가 이 연구실에 잠시 들른 거라고는 절대 생각 못 하는 멍청한 인간이었다.

“그러게 왜 선배들을 무시해. 결국 네 자리는 여긴데. 지금이라도 빌면 잘해 줄게, 엘렉트라.”

“…….”

“안 들려? 잠깐 거기 올라가 보니까 네가 뭐라도 된다 싶은 모양이지? 탑주님께서 너를 신기하게 여기고 잠깐 침실에 들이신 모양인데, 착각하지 마. 너같이 밋밋한 앨 누가 좋아하겠어?”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데.

하지만 지금은 급했다. 나는 무시하고 찬장을 열었다.

분명 있었는데. 파리프 잎과 벨라 열매.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최상층에서 쫓겨났다고 멋대로 마탑 물건을 훔치면 안 된다. 뭐,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스크롤을 대신 해 준다면 눈감아 줄 수는 있어.”

“좀 닥쳐. 데니로.”

한참 집중하고 있는데 자꾸 말을 걸어 오니 정신이 흐트러졌다.

“뭐?”

“시끄럽다고. 닥치고 네 할 일이나 해.”

“이 계집이 지금 뭐라고?”

데니로가 일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파리프 잎과 벨라 열매를 찾아냈다. 도마뱀의 꼬리를 달인 용액과 작은 절구도 챙겨 품에 안았다.

뒤를 돌자 그림자가 졌다. 나름 남자는 남자라고, 나보다 덩치가 큰 데니로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인상을 쓴 채로.

“지금 눈에 뵈는 게 없어?”

“응. 없어. 내가 너보다 상관인 거 잊지 말고.”

지금 이 시간에도 에드윈의 생명을 갉아먹고 있을 상처가 생각났다. 나는 데니로를 노려보고 지나치려 했다.

데니로가 내 팔을 잡기 전까진 문제없이 지나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다.

“상관이든 뭐든, 내 밑에서 잡일이나 하던 계집이 얼마나 오래 버틸까?”

그가 빙글빙글 웃었다. 팔을 잡은 힘이 꽤 셌다.

이럴 때는 참 절망스러웠다. 뇌에 주름 하나 없이, 가진 거라곤 힘뿐일 이 남자가 협박하면 나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교육을 다시 시켜 줘야겠구만. 후배님.”

이러니까 네가 서른이 넘어가는데도 이 지하 연구실에서 못 벗어나는 거야. 무식하게도 해결이 안 되면 폭력으로 해결하려 들었다.

나는 웃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하고 이를 악물었다.

“베돗가 34번지.”

“뭐?”

“네 내연녀가 사는 곳. 네 아내는 꿈에도 모르고 있지.”

“그, 그건.”

“놔. 나 급하니까.”

지하 연구실에서 입을 다물고 사는 동안 들은 더러운 이야기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리고 지금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그를 힘으로 이길 수 없었다. 권력으로 짓누를 수도 없었다. 데니로는 지금 내 지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었으니까.

지금 내게 가능한 건 협박뿐이었다.

“지금 날 협박하는…….”

“침실이 어쩌고 하기 전에 공부해. 멍청한 자식아. 네가 밥 먹고 하는 게 그것뿐이라 눈에 뵈는 게 없나 보지? 놔. 입은 다물어 줄 테니까.”

나는 데니로를 밀쳤다. 꼼짝도 하지 않을 것 같던 그의 커다란 손이 쉽게도 스르르 풀렸다.

폭력적이긴 했지만 계산을 못 하는 인간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저렇게 멍청한데도 마탑에서 오래 버틴 거겠지.

재료들을 품에 안고 최상층으로 달려갔다. 수많은 계단을 뛰어가며 내 튼튼한 체력에 감사했다.



✎ ✎ ✎



3일인가 4일 정도, 못 잤나. 아무리 내가 튼튼해도 인간으로서의 한계가 찾아왔다는 걸 느꼈을 때쯤 간신히 저주의 수식 끝에 도달했다.

첫날은 정신없이 항생제와 진통제를 만들어 그의 상처에 바르고, 도서관에서 책을 가져왔다.

상처를 살피며 약을 덧칠하고, 거즈를 바꿔 주면서 저주의 식을 풀어 나갔다. 양피지를 몇 장이나 썼는지 알 수 없었다. 마녀의 저주는 그만큼이나 지독하고 복잡한 저주였다. 손에 이미 굳은살이 박여 있는데도 새롭게 아팠다.

수식을 푸는 내내 문제가 있었다. 내 마력이 너무 적다는 게 문제였다. 여러 번에 걸쳐 시전해야 했다. 다행히 에드윈의 방에는 보조 마도구가 많아 이용할 수 있었다.

그래. 순조로운 듯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마녀의 저주에는 대상자의 인격을 파괴하는 저주까지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에드윈이 만약 이 상처에 몸을 잠식당한 거라면, 그가 악역이 된 건 이 저주 때문이 아닐까……?

그러니까 원래의 성격에 이 저주까지 더해져서, 세상을 말살시킨 인간 말종이 된 것이다.

수식의 풀이를 끝내기 직전이었다. 원작 소설에선 절대 보여 주지 않는 것을 엿본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문제는 저주의 실체를 알아낸 것이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곳에서 등장했다.

저주를 풀어내는 시전자에게 조건이 하나 붙었다.



‘시전자(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 피시전자(에드윈)에게 종속된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게 뭐지?

돈? 에베스로 건너가는 배편? 둘 중 하나일까…….

지금 내 전 재산을 에드윈에게 주면…… 진짜 배가 아플 거 같긴 한데.

그러나 만약 이 저주를 풀어 에드윈의 인격이 말살되지 않고, 그가 악역이 되지 않는다면, 한번 해 볼 만한 모험이었다. 돈이야 다시 벌면 되니까. 어차피 내 월급은 파격적으로 인상되지 않았던가.

그리고 에드윈은 돈이 많았다. 하물며 생명을 구해 준 사람인데, 인정이 있다면 어느 정도는 돌려줄 거야.

나는 약속의 계약을 맺기 위해 엄지에 피를 내 종이에 묻혔다.

순식간에 빛이 차올랐다. 그리고 수식이 풀렸다는 걸 알리는 푸른빛이 번쩍하고 에드윈을 뒤덮더니 이내 사라졌다.

“끝났다…….”

쓰러질 것 같았다.

나는 최소한의 이성을 짜내서 그의 위로 엎어지지 않고, 바닥에 내려와 쓰러져 잠들었다. 에드윈의 침대가 참 안락해 보였지만 거기에서 잘 용기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