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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제, 제가 승진이요?”

“여기에 스며들어 간 마력의 냄새랑, 네 냄새가 같아.”

천재는 마력의 냄새까지 맡을 수 있는 모양이다. 나는 겨우 느끼는 정도였는데.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이렇게 쉽게 찾아낼 수 있었을까?

마탑은 넓고 사람은 많다. 내 몸만 한 스크롤을 어렵지도 않게 한 손으로 들고 있는 에드윈을 보면서 이게 어떻게 된 걸까 고민했다.

하지만 그 의문은 곧, 에드윈이 불세출의 천재라는 사실을 떠올리자 내 안에서 사라졌다.

“상급 마법사 자리를 줄게. 그중에서도 상급 연구실장. 어때?”

“연구실장이요?”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상급 연구실장이라 함은 이 마탑에 단 네 명밖에 없는 직위다. 예전의 체계적이었던 마탑에는 더 많았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에드윈이 인정한 ‘실력자’만이 올라가는 자리였다.

그리고 에드윈의 수족으로 한껏 부려지는 자리였고.

물론 그만큼 돈은 많이 벌었다.

그 자리에…… 한낱 엑스트라인 내가?

나는 그냥 혼자 가만히 사는 게 좋아요. 내가 뭘 했다고 마음에 드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런 사람 아닙니다요.

“하하. 사실은 고향에 계신 어머니가 아프셔서 마탑을 그만둘 생각이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 사내다. 어떻게 해야 하지.

정말 덜컥 연구실장이 된다면 그 이후로는 그의 곁을 쉽게 빠져나갈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차라리 1년 뒤의 일을 지금으로 당기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안녕, 내 짭짤한 수입들아.

모아 둔 돈이 뱃삯으로 충분할까? 약간 마음이 약해지려고 했다. 하지만 충분치 않다고 해도 도망쳐서 다른 일을 하고 사는 게 나았다. 잡일이라면 자신 있으니까.

에드윈 볼테르라는 희대의 악역의 눈에 절대 띄어선 안 된다. 내가 이 세계에 떨어지자마자 세운 철칙이었다. 철칙을 지켰다고 하기엔 마탑의 일원인 몸에 빙의해 어폐가 좀 있었지만, 다행히 하급 마법사와 마탑주는 마주칠 일이 없었다.

원작대로였다면 말이다.

“그만둔다고?”

“네, 탑주님. 안타깝게도 저는 오늘까지만 나오기로 했어요.”

“탑주님?”

에드윈이 눈썹 한쪽을 치켜올리며 중얼거렸다. 왜요. 무서워, 무섭다고요.

“누구 맘대로 관둔대?”

그리고 눈치 없게도 감히 탑주님과의 대화 중에 끼어드는 얼간이 하나가 있었다.

말단 중의 말단만이 모여 있는 이런 작은 연구실에 마탑 수장이 직접 행차하실 일은 별로 없다.

게다가 에드윈은 하나의 단체를 운영할 생각이 없는지 모든 일을 행정관들에게만 맡겨 놓고 밖으로 나돌고 있었다. 전쟁터에 끼어들다 가끔씩 돌아와서는, 상상도 못 한 대단한 발명품을 만들기만 했다.

그러니까 정리하자면 이름만 마탑 수장이지, 실제로는 마탑이라는 권력의 상징을 끼고 자기 마음대로 사는 전쟁광일 뿐이었다.

물론 현재 마탑의 권력은 에드윈에게서 나오는 것이기에 누구도 뭐라고 할 수는 없었다.

이러나저러나 이 하급 연구실에 있는 얼뜨기들이 에드윈을 모르는 건 당연했다. 소문의 그 ‘마왕’이 저렇게 미남자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하는 것도 당연했다. 잔인하고 가차 없는 사람인 에드윈의 외형은 단순하게도 괴물 같은 모습으로 소문이 났다.

“뭐야, 저 예쁜이는? 왜 우리 엘렉트라한테 헛된 꿈을 심어 주지?”

“엘렉트라가 관둔다니. 그럼 내 스크롤은 누가 베끼라는 거야. 절대 안 돼.”

“휘유. 형씨, 여기는 일반인이 오는 곳이 아닌데.”

“내 취향인데.”

“변태 자식.”

그러니까 저들이 나한테 하듯 낄낄대는 것도 예상 가능한 절차였다.

피가 차게 식는 게 느껴졌다.

여기에서 저 피의 사신이 폭발한다면?

저놈들의 시체가 굴러다니게 된다면?

나는 튀기도 전에 휘말려 죽게 될지도 몰랐다.

“아아아, 타, 탑주님. 선배님들은 결코 탑주님께 일부러 무례하게 구는 게 아니고요. 그냥 조금 모자란 거예요.”

나는 황급히 수습했다. 되는 대로 뱉었기 때문에 말하고 나서 놀란 건 내 몫이었지만.

“모자라……? 엘렉트라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그 긴 머리 형씨가 탑주님일 리가 없잖아. 승진이란 말에 낚여서 선배들 무시하는 거 봐라.”

내 손이 바들바들 떨려 왔다. 승진이고 뭐고, 지금 당장 마탑이 날아가는 것만은 막아야 하지 않겠는가.

내 꿈은 에베스에서 평화로운 여생을 보내는 것이다. 전생에서 치열하고 비참한 청춘을 보내다 어이없게 죽은 뒤 도착한 세계에서 엑스트라가 된 것도 억울했는데, 이대로 죽으라고?

나는 <절벽 위의 꽃>에 대해 아는 내용을 모조리 끄집어내서 이 세계에 적응했다. 에베스로 가는 방법을 아는 것도, 이곳 말고 다른 대륙이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내가 이 소설의 독자였기 때문이다.

이제는 처절하지 않은 잔잔한 호수 같은 인생을 살고 싶었다.

제발. 악역님.

간절히 에드윈을 보았지만 고요하고 깊은, 짙고 커다란 눈동자는 가만히 나를 응시할 뿐이었다. 그의 입에 자물쇠라도 채워진 듯했다. 나는 초조해졌다.

“아니면, 네 애인을 여기에 불러들인 거냐. 엘렉트라?”

나는 마지막으로 던져진 데니로의 말에 기함해 펄쩍 뛰며 변명했다.

“탑주님. 그게, 저분들이 나쁜 분들은 아니에요. 나쁜 분들일 수는 있는데. 그게, 저. 그냥 진짜 단체로 사고가 나서 머리를 다쳤나 봐요. 왜, 가끔 그런 일이 있잖아요. 다 같이 걷다가 마차에 치였다거나.”

“야, 엘렉트라! 아 건방진 게.”

“……너는 내가 누군지 어떻게 알지?”

침묵 끝에 에드윈이 내뱉은 말은 그거였다.

“예?”

“너는 나를 ‘탑주님’이라고 불렀어. 승진시켜 준다는 말에도 내가 누구냐고 묻지 않았어. 넌 마력이 별로 없어서 날 알아챌 리도 없는데.”

“그, 그건.”

“마탑에서 이런 취급 받는 건 익숙해. 별로 고칠 생각도 없어. 내가 마탑에 관심이 없으니까 붙어 있을 생각도 없고. 어쨌든 내 얼굴은 아는 자라곤 첼로트랑 연구실장들뿐이거든.”

첼로트라면 에드윈을 대신해 마탑을 관리하느라 매일매일 죽어 가고 있는 상급 행정관이다.

“근데 넌 나를 어떻게 알지?”

“그, 그게…….”

나는 눈알을 굴렸다.

지금 그가 받는 취급만 본다면, 내가 그를 ‘탑주’라고 부른 건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실수했다.

“물론 고칠 생각이 없을 뿐이지, 얼간이들은 없애는 게 맞지.”

“네?”

“저런 쓰레기들 없이도 마탑은 충분히 돌아가니까. 딱 봐도 쓸모없어 보이는군.”

아니, 설마 죽이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자신을 조롱하고 있는 얼간이들에게 돌아서는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키가 훤칠한 그가 돌아서자 커다란 산이 불쑥 솟아난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뒤에서 보니까 더 거대했다.

에드윈이 손을 들었다. 불길한 마력이 그에게로 모여들고, 연구실에 바람이 하나둘 불어오기 시작했다.

여기는 창이 없는 지하실인데.

“이, 이게 뭐지?”

“으악!”

아무리 하급 마법사들이라도 시전된 마법의 마력은 감지할 수 있었다. 그거야 나도 할 수 있는 거니까.

그들은 자신을 감싸는 바람이 가진, 저와는 상대도 되지 않는 강한 마력을 느끼고 불길해했다. 그제야 무언가 깨달은 듯 에드윈을 바라보았다.

저대로 놔두면 죽는다.

나는 에드윈의 팔에 달려들었다.

“저, 어, 기! 탑주님, 잠시만요. 잠시만요!”

“왜 그러지?”

“그렇대도 죽이는 건 좀 아니죠. 인간은 존엄하고요. 잘못은 누구나 하고. 물론 저도 저 얼간이들 싫어하는데요. 여기는 제 삶의 터전인데, 피로 물드는 건 좀…….”

“어차피 승진하면 이 연구실은 필요 없을 텐데.”

“그러니까, 저, 그게. 저는 이 연구실이 너무 좋거든요! 여기에 있을 때 아이디어가 막 샘솟는다고 해야 하나!”

“흐음……. 저 멍청이들이 너를 모욕하면 아이디어가 샘솟나?”

……아니요. 죽이고 싶긴 한데요.

나는 솟아오르는 말을 꾹 눌러 삼켰다. 그래도 인간의 목숨은 귀한 법이다.

“탑주님. 살려 주십쇼.”

바람에 몸이 묶인 이들이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탑주님,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세요.”

“네가 상급 연구실장 자리를 받아들인다면 생각해 보지.”

에드윈이 피식, 웃었다. 저 냉정한 얼굴이 웃을 수도 있구나. 황홀하고도 섬뜩한 미소였다.

“저는 어머님이 아프셔서……!”

“내가 약을 보내지.”

“예……?”

“내가 써 오는 약이면 치료되지 않을 병은 없어.”

“하지만 직접 돌봐 드려야…….”

“어떡할래.”

“아악!”

그가 손을 움켜쥐었다. 공중에 둥둥 뜬 선배들의 몸이 바짝 쪼그라드는 것 같아 보였다. 팔이 꺾이고 있는 건가?

나는 황급히 에드윈의 손을 덥석 잡았다.

“하, 할게요. 한다고요!”

“그래?”

“네, 네. 할게요. 대신 아무도 죽이지 말아 주세요.”

눈앞에 시체가 굴러다니는 걸 보는 건 사양이니까요.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에드윈에게 애원했다. 그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그래. 알았어.”

그러고는 바람을 거둬들였다. 공중에 떠오르던 남자들의 몸이 바닥으로 떨어져 철퍽,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내일부터 최상층으로 출근하도록.”

“네, 네. 알겠습니다. 탑주님.”

“네가 어째서 나를 아는지에 대해 설명할 준비도 잊지 말고.”

“……그건요. 그냥 소문을 많이 들어서…….”

“내 소문 중에 제대로 된 건 하나도 없어.”

그가 여상하게 말하고 다시 표정을 굳혔다. 창백하고 피곤에 찌든 얼굴에는 예민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칼같은 사람이네.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성격이 그렇다는 게 아니고, 외모가 그랬다. 날카롭게 벼려 놓은 칼날 같은 뾰족함과, 검신의 유려한 곡선을 모두 가진 얼굴이었다.

“그럼.”

그가 초토화된 연구실의 중앙을 저벅저벅 걸어갔다. 내가 열 걸음은 걸어야 했던 책상 사이의 복도가 그의 긴 다리로는 채 다섯 걸음도 되지 않아 끝났다.

“엘렉트라. 너…… 수장을 꼬셨군.”

에드윈이 나가자마자, 바닥을 기던 선배들 중 기운이 왕성해 보이는 놈 하나가 벌떡 일어나더니 다가와 그렇게 말했다. 얼굴에 분해 죽겠다고 쓰여 있었다. 빙글빙글, 비열한 웃음도 빼먹지 않았다.

“꼬신 적 없는데요.”

“거짓말 마. 여자들은 역시 참 쉽게 살아.”

그 말과 동시에 닫혔던 문이 다시 열렸다.

“그런데 말이야.”

에드윈이었다.

“내가 찜한 내 유능한 부하 직원을 건드리는 건 나를 건드리는 거나 마찬가지라서 말이야.”

“타, 탑주님.”

“한 번은 그냥 넘어갔는데, 두 번은 영.”

그가 손을 들자 내 앞에서 나를 모욕했던 선배가 갑자기 뾰로롱, 사라져 버렸다.

사라졌다고……?

“내 부하 직원이 죽이지 말래서 죽이진 않았지만 고생 좀 할 거야.”

“…….”

“나는 멍청한 이들에게는 별로 인내심이 없다.”

에드윈은 미소조차 짓지 않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서는 돌아섰다. 손을 대지 않은 것 같았는데 문이 저절로 닫혔다. 다시 밀실이 된 연구실 안에는 고요만이 감돌았다.

나는 앞뒤 돌아보지 않고 짐을 챙겨 뛰쳐나왔다. 나오면서 내 책상 위에 있던 스크롤을 몰래 몇 개 챙겼다.

여태까지 양심에 찔려 도둑질은 안 했지만, 이쯤 되면 어쩔 수 없었다. 이게 곧 돈이니까. 어차피 선배들은 내가 뭘 가져가도 알지도 못하는 족속들이었다.

더 이상 그 안에 있다간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일이죠.

엑스트라1인 제가 왜 ‘마왕’, ‘피의 사신’이라 불리는 악역님의 부하 직원이 된 거죠? 왜죠?

제일 가까운 마을의 여관으로 가야 했다. 다행히 걸어서 한 시간이면 도착하는 곳이었다.

체력은 자신 있으니 달리기로 했다. 가방을 꼭 동여매고 마을로 달리기 시작했다.

나, 여기에서 벗어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