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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화



대꾸하는 남자의 말에 한숨이 섞였다. 반항기의 십 대를 다루는 상담교사 같은 말투.

― 십 분 후에 봅시다.

숫제 통보만 거듭하다 전화는 끊어졌다. 분개를 누르며 요한은 수화기를 신경질적으로 내려놓았다. 쾅 하는 소리에 멀찍이 마주 앉은 중년 커플이 이쪽을 힐끔댔다. 바텐더는 못 들은 척 여전히 글라스 닦기에 한창이다.

“맥주 한 잔 드릴까?”

잠자코 끄트머리 스툴에 앉으려던 요한이 눈을 치떴다. 잘 닦인 글라스를 조명 아래 이리저리 비춰 보며 남자가 말을 이었다.

“아님 더 독한 게 필요한가. 진토닉? 얼음 꽉 채워서?”

요한은 그만 코로 더운 숨을 뿜었다. 저 빙글대는 면상을 쳐 주고 싶은데 그러면 안 되겠지.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바텐더가 휙 고개를 돌리더니, 눈이 마주치자 싱긋, 넉살 좋게 미소까지 날려 준다.

“일단은 진정하는 게 좋을 거야.”

그러고는 길고 투명한 유리잔을 집어 얼음물을 채웠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정확히 손님 앞에 컵 받침을 밀어 놓고는 그 위에 잔을 올려 뒀다. 제 눈앞으로 길게 뻗은 상대의 왼팔. 현란한 빛깔의 문신을 우두커니 응시하던 요한이 고개를 들었다.

“만만치 않은 녀석이거든.”

바텐더가 속삭였다. 조언인지 조롱인지 이번에도 애매하다. 역시 이놈과 그놈은 한패인 모양이었다. 놈들의 영역에 걸어 들어왔으니 지금 나는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건가. 코앞에 놓인 유리잔을 보며 생각했으나 이제 와 박차고 나갈 마음은 없었다.

그러니까 도발이 시작된 것은 몇 주 전쯤부터다.

요한이 그려 놓은 낙서들, 다수의 사람들은 작품이라 불러 주는 그 흔적들에 누군가 굵직한 줄을 긋기 시작했다. 마치 폴리스 라인 같은, 기다란 엿을 먹이듯 가로로 쫙 그어진 노란색 페인트 한 줄. 그걸 본 순간 어찌나 기가 차던지 욕도 나오지 않았다. 하단에 남겼던 ‘730’이라는 서명들은 아예 깨끗이 지워 놨다. 누가 봐도 노골적인 선전포고였다.

퀸즈보로 브릿지 그래피티는 마지막 남은 작품이었다. 한때 도시 곳곳을 점령한 세븐써리의 이름은 이제 뉴욕시에서 완전히 멸종됐다. 가만히 있는 사람의 성질을 건드리려 수고를 아끼지 않은 까닭이 궁금했다. 대체 어떤 미친놈인가 면상만큼은 꼭 봐야겠다. 요한은 바텐더의 눈을 피해 오른손을 등허리로 슬쩍 옮겨 보았다. 허리춤에 꽂힌 리볼버는 충실히 대기 중이다.

그래서 그는 홀로 앉아 기다렸다. 앞에 놓인 얼음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리고 대략 10분쯤 지나지 않았을까 싶던 찰나, 유리잔 표면에 맺힌 물방울이 하나둘 아래로 흐르기 시작할 무렵 등 뒤의 출입문이 열리는 기척이 났다.

왔다.

뚜벅뚜벅 구둣발 소리가 다가오더니 짙은 향수 냄새가 훅 끼친다. 상대는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와 그의 왼쪽 두 번째 스툴에 앉았다. 검은색 수트를 맵시 좋게 입은 남자는 어두운 금발을 말끔히 뒤로 넘겼다. 다리 위에 그려 놓은 남의 낙서를 지우기는커녕 그래피티 따위엔 관심조차 없을 것 같은 입성. 예상했던 것과 판이한 모습에 요한은 내심 당황했다.

“같은 걸로.”

“얼음물이야.”

바텐더가 뚱하게 대꾸했다. 남자는 잠시 침묵하더니 짧게 웃듯 콧김을 뿜는다. 여전히 이쪽은 쳐다도 보지 않는 미끈하고도 멀끔한 프로필에 비소가 선명했다. 그걸 보며 요한은 다문 입술에 힘을 주었다. 하마터면 내가 주문한 거 아니라고 발끈할 뻔했다.

“그럼 진토닉으로.”

남자가 말하며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대체 어떤 미친놈인가 기어이 면상을 보게 된 요한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힌다.

“당신,”

“……구면이네.”

베런의 푸른 눈동자가 요한을 응시했다. 권태로이 이완됐던 표정에 약간의 놀라움과 흥미가 섞였다. 재빠르게도 진토닉을 만들어 내놓은 바텐더는 어디론가 사라졌고, 텅 빈 바에는 이제 스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은 남자 둘뿐이다.

“우연치곤 절묘한데.”

“악연은 원래 지랄맞아.”

“성급한 판단은 지양하라고 해 주고 싶군.”

“당신 누구야(Who the fuck are you).”

“그건 알 필요 없고(No need to know).”

베런이 유리잔을 집어 입가로 가져갔다. 왼쪽 손목의 시계가 조명을 받아 반짝였다. 그는 차가운 진토닉 한 모금을 유유히 삼킨 뒤 입술을 뗐다.

“그래피티를 좀 그려 줘야겠어.”

“그게 무슨 엿같은,”

“무슨 엿인지는 나도 잘 몰라. 심부름하는 입장이라.”

요한은 기가 막혀 입을 벌렸다. 투자은행 직원처럼 수트를 빼입은 남자가 나타났을 때부터 이상하단 생각은 했지만 상황은 감조차 잡히지 않는 방향으로 전개 중이다.

“내 그래피티는 왜 지운 건데?”

“그쪽을 찾아야겠는데 달리 방법이 없어서.”

더 생각할 시간도 없었고. 베런이 덧붙였다.

“낙서들 망가뜨린 건 유감스럽게 됐어. 다시 말하지만, 우리도 심부름하는 입장이라.”

우리. 역시 패거리가 있는 모양이다. 물론 저런 비주얼로 친히 건물이며 다리 위에 기어 올라가 낑낑대며 페인트를 지웠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다.

“다섯 점에 만 오천 달러.”

“뭐?”

“낙서 하나에 삼천 달러면 대단히 후한 값이지. 시키는 대로 시키는 자리에 평소처럼 그려 주면 돼.”

“시키는 대로? 하, 어이가 없어서 말도 안 나오네.”

“복권 당첨됐다고 생각해.”

“복권?”

“다시 말하지만 낙서 하나에 삼천 달러야.”

“그러니까 이게 다 무슨 엿같은 짓거리냐고?”

“일종의 협업이라고 해 두지(Let’s call it a collaboration).”

대본을 외워 둔 배우처럼 상대는 유수 같은 대답을 이어 갔다. 어이도 없거니와 어째 자꾸 말리는 기분이라 요한은 일그러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콜래보레이션 같은 소리 하네.

“거절하면?”

“안 될 거야.”

베런은 진토닉을 크게 두 모금 삼켰다. 창백한 옆얼굴. 유리잔을 내려놓은 그가 정면을 향해 말했다.

“심부름시키신 분이, 성정이 좀 모질어서.”

패거리가 있는 걸로 모자라 무려 시키신 분까지 있는 모양이다. 그러니까 이 남자는 중간책쯤 되는 건가. 요한이 되물었다.

“심부름시킨 놈이 누군데.”

“지나친 호기심은 명을 재촉하지.”

베런이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호수 같은 벽안과 어두운 금발. 아이랜드계 혈통이 틀림없다고 요한은 재차 생각했다.

“그러니 궁금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쪽은 나만 알면 돼. 지시를 전달할 사람도, 대가를 지불할 사람도 나니까.”

요한의 눈썹이 미미하게 꿈틀댔다. 제 이름조차 밝히지 않은 주제에 저만 알면 된다는, 지극히 오만한 태도에 속이 다 뒤틀렸다. 성정이 모질다는 그분은 아마도 무지막지 대단한 사람인 모양이지. 그는 못마땅한 표정을 숨기지 않았으나 베런은 상한 기색 하나 없이 침착하게 이쪽을 마주 보았다.

“대금은 현찰로 지불할 수도 있어.”

“현찰?”

“물론 수표 쪽이 더 편리하겠지만 원한다면. 다섯 건 모두 마친 후에 일괄 지불할 수도 있고 건당 지불할 수도 있고.”

원한다면 착수금도 가능하지. 덧붙이는 말을 들으며 요한은 계산을 시작했다. 1만 5천 달러. 그래피티 하나당 3천 달러. 정상적인 상황이었다면 너무도 황송한 제안이라 아마 믿기지 않았을 것이다.

이 패거리가 지운 그래피티는 못해도 열댓 군데였다. 스프레이 페인트는 뿌리는 것보다 없애는 게 훨씬 어려우며 여간해선 벗겨지지도 않는다. 적절한 약품과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고 무엇보다 정성과 의지가 있어야 하는데, 그들은 다리 한중간에 그려 놓은 것까지 기어 올라가 기어코 없앴다.

이 모든 수고와 노동이 단지 세븐써리를 찾아 협업하기 위해서였다면 그 협업이란 그들에게 분명 중요할 것이다. 요한의 갈색 눈동자가 고급스런 행색의 백인 남자를 훑었다. 심부름시키신 분. 그렇다면 잘난 그분께서 지운 작품들 값까지 아울러 쳐주셔야겠지.

“삼만 달러.”

베런은 눈앞의 동양인 남자를 계속하여 바라보았다. 제시한 가격이 두 배로 뛰어 돌아왔으나 표정엔 변화가 없다.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눈가에 웃음기가 스치더니 수트 재킷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갔다. 설마 3만 달러짜리 수표를 벌써 써 주려나 싶었지만 돌아온 것은 하얀 명함 한 장.

“난 명함 같은 거 없는데.”

“뒷면에 연락처 적어.”

나 주는 게 아니었구나. 요한은 명함을 받아 눈으로 훑었다. 사람 이름 없이 주소와 연락처만 박힌 명함에는 주류 수입 회사의 상호가 큼직하게 들어 있다. 본인이 소속된 업체인지 어쩌다 갖고 있던 거래처 명함인지는 명확하지 않았다.

엠파이어 주류상사(Empire liquor imports LLC).

남자는 품에서 펜까지 꺼내 건넸다. 뚜껑 꼭지에 흰색 별. 써 본 적은 없으나 몽블랑 펜이라는 것쯤 요한도 안다. 이 남자는 돈 많이 주는 회사에서 일하는 모양이었다. 그래피티랑 콜래보레이션 할 만한 곳 중에 주류업과 관련이 있고 돈도 많이 주는 회사라. 실마리를 찾아보려 머리를 굴렸으나 아무래도 모르겠다. 그는 이미, 절반쯤은 무언가에 홀린 기분이었다.

윤기 나는 펜의 뚜껑을 열었다. 집에 굴러다니는 플라스틱 볼펜과는 상이한 무게감. 그 묵직한 중량에 손가락이 무뎌지는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명함을 뒤집어 호출기 번호를 적었다.

진토닉을 끝까지 다 마신 남자가 명함을 도로 받아 눈으로 확인했다. 이름 없는 숫자의 나열을 눈으로 훑고는 말없이 품에 넣는다. 그리고 왼손에 찬 시계를 한번 들여다보며 미련 없이 일어섰다. 그러고 보니 이 남자 한겨울에 모직 코트 한 장 걸치지 않았다. 공원에서도 지금도. 몸에 딱 맞는 수트는 테일러점에서 맞춘 것이 분명해 보이는데도.

“그럼 조만간 연락하지.”

베런은 지갑에서 20달러짜리 지폐를 꺼내 빈 잔 옆에 놓아두었다. 스툴에 앉은 요한에게 눈인사하듯 힐끗 시선을 준 뒤 몸을 돌려 입구 쪽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요한은 지켜보았다. 보도 곁에 세워진 새까만 롤스로이스 역시 눈에 익다. 방금 진토닉 한 잔을 비운 주제에 거리낌 없이 운전석 문을 열더니 남자는 차와 함께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