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립 앤 키스

4화



* * *



“호신술 같은 거 배울 만한 데 있을까?”

“네? 아! 있어요. 제가 예전에 다니던 체육관 관장님이 호신술 자격증이 있었어요.”

“그래? 나중에 소개해 줘.”

“네!”

나현은 한 번도 위협을 당한 적이 없어 자신이 꽤 안일하게 살았음을 알았다. 범죄 심리만 파고들 줄 알았지 몸을 움직이는 건 싫어했다. 나현은 나중에 러닝 머신도 하나 장만할까, 생각했다. 호신술도 좋지만 일단 잘 달려야 할 것 같았다.

“선배님 제가 준 휴대폰 꼭 쥐고 주무세요. 여차하면 제가 기동대를 불러서라도…….”

“그래그래.”

나현은 문 앞에서 걱정 반 잔소리 반을 늘어놓는 병호를 말리듯 손까지 휘저으며 대답했다.

“걱정하지 말고 얼른 가. 이거 꼭 쥐고 나 지금부터 잘 테니까.”

나현은 병호가 준 휴대폰을 들어 보이고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뭔가 미심쩍다는 듯 걸음을 못 떼던 병호가 마지못해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휴우…….”

닫은 문에 기대선 나현은 긴 한숨을 내쉬고는 호텔 룸을 훑었다. 어제 묵었던 호텔로 다시 가려 했는데 병호가 안 된다며 말리는 바람에 귀찮다고 생각하면서 온 호텔이었다. 전망이 좋아 그나마 속이 덜 답답했다.

창가로 다가간 나현은 도시의 불빛들을 보다 유리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살폈다. 밝은 갈색 머리칼 때문인지 오늘따라 얼굴이 유난히 창백해 보였다.

“술 한잔할까.”

나현은 룸에 구비되어 있는 술을 꺼내려다 손을 거뒀다. 기분도 꿀꿀한데 룸에서 혼자 술을 마시려니 처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톡톡톡.

거울 앞에 선 나현은 창백한 자신의 뺨이 마음에 안 들어 볼을 가볍게 두드렸다. 굵은 웨이브가 진 머리칼을 단정하게 정리하고 원피스 치맛자락을 탁탁 털자 나현의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불안하고 초조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자신을 잠재우는 방법이 술이라서 못마땅하지만 지금 자신이 어떤 상황인지도 모르면서 친구를 불러낼 수는 없었다. 그 친구마저 위험에 빠트릴 수 있었다. 사이버 수사대뿐만 아니라 납골당 CCTV까지 조사하고 있으니 조만간 그들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 믿었다.

“이름이 루카였다고 알려 줄 걸 그랬나?”

어제만 해도 그 남자의 이름을 알려 주면 병호가 다칠 것 같은 생각에 선뜻 말하기가 꺼려졌는데 범죄를 연구한다는 사람이 정보를 숨기면 안 될 것 같았다.

“아!”

룸에서 나와 엘리베이터에 오른 나현은 병호에게 남자의 이름을 알려 주려 휴대폰을 찾다 탄성을 내뱉었다.

“이런, 룸에 두고 나왔나 보네. 다시 갈…….”

땡―

고개를 들어 층수를 확인한 나현은 엘리베이터가 이미 스카이라운지에 도착해 있자 잠시 고민하다 내렸다.

“한 잔만 하고 갈 거니까. 30분 후에 연락해도 괜찮겠지.”

어깨를 가볍게 으쓱한 나현은 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걱정할 아버지께는 휴대폰을 물에 빠트려 서비스를 받고 있는 중이라고 둘러댔다. 그래서 며칠 연락이 안 돼도 걱정하지 말라고 얘기해 둔 상태였다.

“안녕하세요. 피나콜라다 한 잔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여자 바텐더의 상냥한 눈웃음에 마음이 좀 편해지는 것 같아 나현도 눈웃음을 지었다. 능숙한 솜씨로 칵테일을 만드는 바텐더를 보고 있자니 지루할 틈이 없었다.

“여기 야경이 멋지죠?”

바텐더의 말에 칵테일을 한 모금 마시던 나현은 고개를 돌렸다. 높은 지대에 있는 호텔이라 야경이 발아래 펼쳐져 있는 것 같았다.

“네, 멋지네요.”

싱긋 웃어 준 바텐더가 다른 고객을 맞으러 가자 나현은 칵테일을 마저 홀짝거렸다. 달달한 파인애플 맛이 혀끝을 자극했다.

만족한 얼굴로 입술을 핥은 나현은 창가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한 여자에게 시선이 멈췄다.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육감적인 입술에 붉은색 립스틱을 발라서 그런지 더 화려해 보였다.

“목 예쁘다.”

여자는 예쁜 목선이 드러나도록 머리칼을 틀어 올린 상태였다. 가지런한 쇄골도 감탄을 자아낼 정도였다.

<오늘 밤…… 할까요?>

“으응?”

칵테일을 마시던 나현은 눈을 끔뻑였다. 무심결에 여자의 입술을 읽었는데 뭔가 대화가 평범하지 않은 것 같았다.

“오늘 밤 뭘 해? 설마…… 이, 일을 말하는 거겠지.”

나현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남녀의 은밀한 대화를 엿들은 건 명백한 사생활 침해였다. 그래서 눈길을 거두려 했는데 여자의 입에서 나온 다음 말에 의아함이 들었다.

<호락호락하지 않다고요?>

뭘 하자는 건지 몰라도 여자가 오늘 밤 하자는 말을 했는데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말하는 건 뭔가 앞뒤가 안 맞는 대화였다.

<네? 음, 얼굴은…… 눈길을 확 잡아끄는 미인이네요.>

연인 사이처럼 보이지만 연인들이 나누는 대화가 아니었다. 남자가 말하는 것이 보이지 않아 여자의 입술만 읽어 짐작만 할 뿐이지만 제삼자를 염두에 두고 나누는 대화가 틀림없었다.

“헛.”

여자가 눈길을 들어 슬쩍 쳐다보자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들이켜던 나현은 흠칫했다. 본의 아니게 훔쳐본 것이라 양심에 찔렸다.

<아, 고집은 있어 보입니다.>

나현은 이쯤 되니 남자가 뭐라고 말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도대체 무슨 관계면 저런 대화를 주고받을까 싶었다. 남매는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비즈니스 관계도 아닌 것 같았다. 말투로 보아서는 상하 관계가 확실했지만 여자의 얼굴이 굳어 있거나 얼어 있는 건 아니었다. 나현은 도통 알 수 없는 남녀 사이라 생각하며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회수라고요?>

여자가 눈을 약간 크게 뜨고 되묻자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응?”

나현은 자신이 잘못 읽었나 하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 일반적이지 않은 남녀의 대화였다.

“도대체 무슨 관계일까.”

짐작이 어려워진 나현은 슬쩍 다시 곁눈질을 했다. 무심한 척 남녀를 눈여겨보던 나현은 돌아보는 남자의 얼굴에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버린 거 다시 회수해야지.>

여자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은 납골당에서 만난 바로 그 남자, 루카였다.

“……!”

남자와 눈이 딱 마주친 나현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버려.’

나현은 남자가 미련 없이 내뱉었던 말이 귓가에 울리자 숨이 턱 막혔다. 놀라 벌어진 입술이지만 숨이 드나들지 않는 진공 상태처럼 머릿속이 하얗게 비워지기 시작했다.



#2장. BACK


“어디 불편하세요?”

“……네?”

나현은 얼이 빠진 얼굴로 자신을 부르는 바텐더를 쳐다봤다. 살짝 고개를 기울인 바텐더가 친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 아뇨.”

나현은 당황한 얼굴을 금세 갈무리하고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최대한 저들의 눈길을 끌지 않고 이곳을 벗어나야 할 숙제가 앞에 놓여 있었다.

“저기…….”

“모나현.”

바텐더에게 말을 걸려던 나현은 더 이상 커질 수 없을 만큼 눈을 커다랗게 뜨고는 몸을 굳혔다. 이건 분명 그 루카라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몇 번밖에 못 들어 본 음성이지만 그 특유의 낮고도 깊은 소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혼자네.”

“……!”

등 뒤에서 울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나현은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용감하게도.”

“허!”

남자의 말에 나현은 비명을 터트리듯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뭘 믿고 혼자 있느냐는 비아냥거림이 깔린 말이었다.

나현은 생각했다, 지금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선글라스를 벗으라며 괜한 오기를 부린 탓이라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선글라스를 고집했을 텐데. 차라리 얼굴을 못 봤다면 이 남자와 이리 또 맞닥트리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누구세요?”

나현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다는 생각에 천천히 돌아보며 눈꼬리를 치켜올렸다. 통성명도 하지 않은 사이니 누구냐고 묻는 것이 맞지 않느냔 말이다. 나현은 그렇게 자신을 두둔하며 루카를 올려다봤다. 바의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데도 나현의 고개가 꽤 젖혀졌다. 남자의 키가 크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보니 더 크게 느껴졌다. 그만큼 더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누구……세요?”

나현의 말을 따라 하는 루카의 입술 끝이 비틀리더니 픽 하는 웃음이 새어 나왔다.

“……!”

루카가 바에 몸을 기대며 팔을 걸치자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나현은 움찔 놀랐다. 시선을 피하지 않고 안색을 살피듯 빤히 쳐다보던 루카의 눈빛이 순간 번뜩였다.

“성가시게 구는 건 여전하고.”

“아니, 이것 봐요!”

“어머, 나현아!”

막 언성을 높이려는 찰나 빨간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다가와 친구 사이인 것처럼 이름을 불렀다. 나현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인 것을 알았다.

목소리를 높여 사람들의 시선을 받은 후 루카라는 남자를 떨치고 자연스럽게 스카이라운지를 벗어나려 했다. 그런데 이 여자 때문에 계획이 물거품이 되었다. 나현은 짜증 난 표정을 지으며 여자를 쳐다보다 루카를 돌아봤다.

“당신들 뭐…….”

“어떻게 여기서 만났네?”

나현의 말을 뚝 잘라 버린 여자는 정말 반갑다는 듯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여자를 보며 나현은 낭패감을 느꼈다.

“도대체 뭐 하자는 건데?”

나현은 눈에서 레이저라도 쏘아 버릴 것처럼 루카를 쳐다봤다. 그러자 루카의 입술이 길게 늘어졌다.

“이유는 이미 말했던 걸로 아는데.”

아! 그래. 이 남자는 부탁이 있다고 말했었다.

“이미 거절한 걸로 아는데?”

나현은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도발하는 눈빛으로 루카를 쳐다봤다. 그 부탁이 뭔지 궁금하기도 했지만 엮이는 순간 골치가 아플 것 같았다. 게다가 목숨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나현아, 우리 나갈까?”

여자가 애써 환하게 웃으며 팔을 슬쩍 잡으려 하자 나현은 방어적인 자세를 취했다. 어디서 함부로 잡으려 하느냐는 눈빛으로 질타하듯 째려보자 여자가 흥미롭다는 표정을 지었다.

“진짜 호락호락하지 않네요.”

“뭐?”

나현은 그제야 그들 대화의 중심에 있던 제삼자가 자신임을 알았다.

“내가 말했잖아.”

여자의 말에 루카가 쿡, 하고 웃음을 터트리다 나현을 보며 입을 열었다.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게 하는 스타일이라고.”

나현은 기가 막혔다. 도대체 뭐 하는 인간들인데 사람을 앞에 두고 놀리듯 이런 말을 주고받는 건지.

“미친.”

나현의 말에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다 이내 기분 상했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더니 차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모나현 씨. 어렵게 하지 말고 그냥 말 좀 들어요.”

“나가.”

“루……. 네.”

루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여자가 약간 놀란 얼굴로 쳐다보자 그가 물러서라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그러자 발톱을 세우고 있던 여자는 얌전한 고양이가 되었다.

딱!

여자가 스카이라운지를 미끄러지듯 빠져나가는 것을 보던 나현은 손가락 튕기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