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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토끼야, 아빠는 내 편. 어무니도 내 편. 네 편은 이 세상에 없어.”
“나도 내 편 만들 거야.”
“그래, 그래. 피터팬이 네 편 돼 줄 거야, 미스터 웬디. 웬디 달링.”

라사는 손을 휘휘 내저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누나, 누나 동생이라서 빈말로 말하지 말고 객관적으로 말해 줘. 나 정도면 괜찮게 생겼지? 어, 그러니까…… 못 봐 줄 정도는 아니지?”

정오가 조바심을 내며 물었다. 그의 머릿속은 영희에게 왜 쫓겨났는지를 입증하느라 바쁘다. 차마 눈 뜨고 못 봐 줄 정도로 못나서? 키가 너무 커서? 정오는 나름대로 심각했다. 하지만 자신이 무턱대고 찾아간 것부터 문제라는 것은 차마 생각하지 못했다.

“어, 그랴. 네가 버르장머리 없어질까 봐 그동안 말은 안 했는데, 잘생겼다. 잘생겼네, 어, 정말 잘생겼어. 인제 꺼져. 누나 바빠.”
“간다.”

정오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고 의기소침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게로 가는 거지?”
“한강 갈 건데.”
“미리 신고해? 토끼야, 괜한 생각 마. 부모님을 생각해. 이 누나도. 우리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라사는 깜짝 놀란 체하며 가운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내어 흔들었다. 정오는 휴대 전화를 보자, 영희가 112에 자신을 신고하려던 것이 떠올라 울컥했다. 서럽다.

“아니, 좀. 누나는 대체 사람이. 됐다.”

정오는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고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오늘 한강 수온 따뜻하대.”

라사는 씩 웃으며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라고, 누나. 답답해서 바람 좀 쐬려고.”

정오는 그렇게 말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으이구, 저 고집불통. 라사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그래. 가라, 가.” 하고 정오를 내쫓았다. 정오는 주먹을 꽉 쥐고 장난감 병정처럼 뚜벅뚜벅 걸어 나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정오의 얼굴을 힐끔힐끔 쳐다봤다. 입 다물고 있을 때 정오는 괜찮게 봐 줄 만하다.


“쟤가 저렇게 힘 빠진 거 오랜만인데.”

이윽고 동생의 쓸쓸한 뒷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고, 라사는 어깨를 으쓱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계속 상대해 주면 성가시게 굴어서 일단 돌려보내긴 했는데, 그래도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다.

피터팬 찾을 수 있는 사람은 걔밖에 없지. 머릿속에 불빛이 깜빡였다. 라사는 즉시 사촌 연요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요원아, 나야. 라사.”
―웅웅, 뭔 일. 오랜만이네.

요원은 뭘 먹고 있는지 우물거리면서 말했다. 그래도 용케 이 시간에 안 자고 있네. 라사는 새삼 감동했다. 낮과 밤이 뒤바뀐 요원은 해 지기 전에는 얼굴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요원은 아무리 빨라야 새벽 4시를 넘겨서야 잠들고, 보통 아침 해가 뜨면 침대에 누웠다.

“바빠?”
―아닝. 그래두 용건은 간단히.

프리랜서 디자이너인 요원은 매일 바쁘다. 주말에도 바쁘고, 휴일에도 바쁘고, 어떻게 사느냐고 물어보면 항상 바쁘다고 대답했다.

“네가 정오한테 찔렀지?”

라사는 본론을 꺼냈다.

―으흠. 뭔 말인지.

요원이 말을 돌렸다. 긴장한 탓에 마른침 꿀꺽 삼키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걔 있잖아, 네 고등학교 때 친구. 호빵. 정오 첫사랑.”
―으하하! 요즘 세상이 말이야, 라사야. 사람 찾는 게 참 쉬워 가지고. SNS 건너 건너 돌아다니다 보면 금방 따악! 하고 나오는데…….

요원이 어색하게 웃으며 말끝을 흐렸다. 어렸을 때부터 라사는 괜히 상대하기 어렵고 곤란한 상대였다. 라사가 제 어머니를 똑 빼닮은 갸름한 눈으로 지그시 응시하면, 누구라도 진실을 털어놓게 된다.

“알았다, 용건 끝.”

라사는 깔끔하게 통화를 정리했다.

―뭔데? 엉? 나 궁금하게 해 놓고 입 닦아? 정오 걔가 영희 기어이 찾아갔대? 뭔 일 있어?

요원은 뒤늦게 안달을 냈다.

“으응, 현재 진행 중.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이만하면 됐다. 더 물어볼 것 없다. 정오의 네버랜드는 차차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다. 그곳이 정말 정오의 말대로 동화처럼 아름다운 곳인지는 차차 알 수 있을 것이다. 라사는 전화를 끊었다.


* * *


같은 시각 꽃집 0505. 근처 도시락 가게에서 사 온 점심이 테이블에서 먹음직스러운 자태를 자랑하고 있다. 마음의 점을 찍는 이 순간, 0505에 모인 세 여자는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쌀밥을 앞에 두고 엄숙하게 젓가락을 들었다.

먹는 속도가 가장 빠른 사람은 번역가이자 과외 선생님인 정혜윤이다. 소설부터 영화에 이르기까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받는 혜윤은 영희의 대학교 동아리 친구다. 송곳처럼 날카로운 말씨로 이 세상 머저리들을 종종 찌르곤 했다.

젓가락을 느릿느릿 움직이며 꼭꼭 씹어 먹는 사람은 대학원생 오지민. 졸업을 앞두고 교수의 회유에 홀라당 넘어가서 대학원에 진학하고 매일매일 세상이 망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며 살고 있다.

오늘 세 사람이 모인 까닭은 다름 아닌 연정오. 영희가 메신저 단체 대화방에 얘기를 꺼내자마자 혜윤과 지민은 지금 바로 갈 테니 문 꼭꼭 닫고 기다리라 했다. 그리고 이렇게 점심 도시락과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고 찾아온 것이다.

영희는 혜윤과 지민에게 매미가 목청껏 울어 대던 아침부터 시작해서 가게 앞에서 연정오와 만난 일, 그리고 그가 느닷없이 은혜를 갚겠다며 같이 밥 먹자고 말을 꺼낸 일까지 하나도 빠짐없이 말했다.

물론 오늘 하루 청룡언월도 역할을 한 빗자루에 대해서도 잊지 않고 말했다. 인테리어 소품인 빗자루는 정오를 내쫓는 과정에서 영광스러운 훈장을 얻었다. 끝이 아주 살짝 구부러졌다.

영희는 비빔밥 위에 곱게 깔린 샛노란 지단을 뒤적이며 빗자루 세례를 받을 때 정오가 내질렀던 비명을 떠올렸다.


저 정말 이상한 사람 아니고요, SNS에서 봤어요!
최영희 씨. 저 기억 못 하세요?
예전에!
억!
우리 아는 사인데!
억!
명함 두고 갈게요! 어억!
연락! 악!
생각나시면! 어억! 연락! 억억! 네! 갑니다! 억! 조, 좋은 하루! 억! 되시길! 바랍니다!


아는 사이라고? 영희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아무리 머릿속에 빼곡한 서랍을 열어 보아도, 정오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게 잘생긴 사람이면 기억 못 할 리가 없는데. 자다가도 떠오르고, 수면 내시경 받고 마취 깨면서 근데 진짜 잘생기셨어, 하는 헛소리도 꺼낼 법한데 전혀.

“희야, 그래서 내가 SNS에 셀카 올리고 그 지랄하믄 안 된댔잖아. 세상에 발정 난 개새끼 참 많아요.”

혜윤은 뾰족하게 날을 세운 말투로 곰곰이 생각에 잠긴 영희를 깨웠다.

“딱 한 장이었는데. 인생 사진이었단 말야. 어차피 팔로워도 얼마 안 되는 계정이구…….”

영희는 머쓱하게 웃으면서 젓가락으로 지단을 한 움큼 집었다.

“근데 잘생겼냐?”

혜윤이 물었다.

“어, 쫌. 아니, 많이.”

영희는 얼른 대답하고 우물우물 지단을 씹어 꿀꺽 삼켰다. 그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키도 커.”
“오, 언니. 얼마나?”

지민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이따만큼.”

영희는 실실 웃으면서 목덜미가 빳빳해질 정도로 팔을 한껏 들어 올렸다.

“좋겠다. 언니 안구 공유해 주라, 나.”

지민은 고개를 들고 정오라는 남자가 얼마나 큰지 대충 어림짐작해 보았다.

“몸도 좋더라…….”
“부러워.”
“으음, 관상용으로는 딱인데. 남자야 뭐, 어리고 잘생기고 참한 게 최고의 미덕이다. 영 이상한 놈이다 싶으면 멀리하고, 괜찮으면 만나 봐. 너도 맘 있으면 연애 한 번 해 봐.”

혜윤이 쌀쌀한 말씨로 말을 이었다.

“내 팔자에 무슨. 그런 사람이 나랑? 뭔 드라마나 영화도 아니고 설마아.”

영희는 콧잔등에 주름을 잡으며 손사래를 쳤다.

“희야, 그거 알아?”

혜윤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원래 현실이 더 영화 같아.”

혜윤의 말에 영희와 지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현실이 더 영화 같다는 말, 아직 극장에 걸리지도 않은 영화 매일 같이 보며 스크립트 따다가 번역하는 혜윤이 이런 말을 하니 묘하게 더 설득력이 있었다.

“내 친구 최고다. 머찌다.”

영희는 아낌없이 박수를 보냈다.

“최고, 최고.”

옆에서 지민이 거들며 함께 손뼉을 쳤다.

그때, 지민의 휴대 전화가 우렁차게 울렸다. SF 영화 「스타워즈」에서 다스베이더가 등장할 때 흘러나오는 스산하면서도 웅장한 음악이었다.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새파랗게 질렸다. 그 벨 소리는 바로 지민의 지도 교수인 김 박사를 알리는 소리였다.

“언니, 난 갈게. 나중에 봐요.”

지민은 덫에 걸린 작은 짐승처럼 벌벌 떨며 휴대 전화를 들었다.

“벌써? 밥도 다 안 먹었는데?”

영희가 울상을 지으며 물었다.

“교수가, 교수가.”

지민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말을 더듬었다.

“그래, 가련한 대학원생아. 잘 가.”

혜윤이 쓸쓸하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대학원생…… 저기 랩 무덤이 내 집인걸…… 울지 마라, 울지 마라, 울지 말아라…….”

지민은 구슬픈 노래를 중얼거리며 힘없이 일어났다.

“지민아, 한 숟갈이라도 더 먹고 가.”

영희는 부랴부랴 반찬으로 나온 치킨 한 조각을 집어다가 지민의 입에 넣어 주었다.

“고마버여.”

지민은 웅얼거리면서 치킨을 씹음과 동시에 전화를 받았다.

“네, 교수님. 근처에요. 들어갑니다.”

영희와 혜윤은 지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눈물을 글썽거리며 지켜보았다.


점심을 다 먹고 영희와 혜윤은 테이블 위를 깨끗하게 치웠다. 그사이에 다육 식물 통통하게 살찌우는 법 물어보러 온 손님이 한 명, 장미꽃 다섯 송이 사러 온 단골 한 명, 엊그제 오픈한 전시 보러 온 손님 두 명이 꽃다발 하나씩 들고 갔다.

“나 갤러리 진짜 사랑해.”

영희는 비수기를 근근이 버티게 도와주는 갤러리에 늘 감사하며 산다. 갤러리 아니었으면 원데이 클래스 여는 거로는 부족해서 디자인 외주를 받으며 입에 풀칠해야 했을 것이다. 작게는 명함부터 시작해서 식당 전단지, 간판 디자인, 제멋에 취해 남의 말은 곧 죽어도 안 듣는 인디 아티스트들 앨범 커버 작업……. 영희는 손목 터널 증후군에 시달리던 20대의 고달픔을 두 번 다시 맛보고 싶지 않았다.

“위치 선정 인정.”

혜윤이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윤쓰, 내가 홍차 타 줄게.”

영희는 웃으면서 티 포트를 꺼냈다.

“오키, 고마워.”

혜윤은 랩톱을 꺼내고 이어폰을 연결했다. 이번 주까지 번역을 끝내야 하는 영화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사람이 그립고, 바깥 공기가 그립고, 햇볕이 고플 때면 정혜윤은 종종 영희의 가게에 와서 작업한다. 특히 여름에는 더욱 자주 찾아왔다. 5월 한 달 바쁘게 보낸 영희가 여름이 시작하면 무기력하게 늘어지기 때문이었다. 숨 돌릴 겨를도 없이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이따금 자신을 돌아보지 못할 정도로 지치고는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