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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선진家의 막내 손녀.

그것이 대외적으로 그녀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그녀는 태어나기 전부터 가진 것이 많았다.

태어난 순간부턴 나날이 더 많은 것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들을 당연하게 누리며 살아왔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말 한마디로 대한민국의 경제를 뒤흔들 수 있는 선진그룹 명예 회장 차진모였다.

그녀의 아버지 또한 회장이었고, 오빠들도 당연히 선진그룹의 계열사 중 전자, 자동차, 미디어 부분에서 각각 중역을 맡고 있다.

가족이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솔직히 오빠들은 어딜 내놓아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명철하며 사업 수완 또한 뛰어났다.

인터뷰만 하면 경제 뉴스 메인을 장식하고, 수려한 외모 덕에 연예 뉴스 차트까지 위협할 정도로 잘난 오빠들.

하지만 어딜 가나, 무엇을 하나, 가만히 숨만 쉬어도 이슈가 되는 오빠들과 달리 그녀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그녀의 이름은 차지해.

이름만 보면 욕심 되게 많을 것 같지만, 실상은 욕심이 너무 없어서 문제였다.

그런 이유로 땅콩 때문에 비행기를 돌려세우지 않는 한 그녀가 신문을 장식할 일은 아마 평생 가도 없을 것이다.

뭐, 그런 식으로 매스컴에 등장하느니 그냥 조용히 살다 죽는 편이 낫겠지만.

사실 집안에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지만, 그녀 또한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금수저’였다.

‘금수저’ 중에서도 상위 계급인 ‘플래티넘 수저’를 입에 물고 태어난 그녀는 말 그대로 모든 걸 다 가진 행운아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치명적인 단점이 존재했으니.

그건 바로 상대방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어 버리는 낙천주의.

그녀의 성향은 모친인 정 여사의 영향이 컸다.

미술학도였던 정 여사는 결혼 후 대한민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미술관을 운영했었는데.

여기까지는 다른 재벌가의 사모님들과 비슷한 노선이다.

하지만 정 여사가 운영한 미술관은 그룹 내 기부와 후원을 끌어내는 순수한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다른 기업들의 미술관처럼 비자금 세탁과 사교의 장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 여사는 명절 휴무 다음 날엔 직원들과 남은 명절 음식으로 밥을 비벼 먹을 정도로 소탈했으며, 돈이 많다고 아랫사람에게 갑질을 한다거나 위화감을 조성하는 것은 그녀가 제일 혐오하는 행동이었다.

그 부모의 그 딸이라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보며 자란 것이 그랬기에 그녀의 성품도 정 여사를 닮아 맑고 깨끗했다.

딸이 여섯 살이 되던 해에 정 여사가 물었다.



‘지해야, 부자가 행복하려면 하나만 포기하면 돼. 그게 뭔 줄 아니?’

‘응!’

‘뭔데?’

‘돈!’

‘맞네. 그게 맞긴 한데. 지해야, 돈을 포기하면 부자가 아니잖니.’

‘엄마 나는 그냥 부자가 아니어도 좋아. 행복한 삶을 살 거야.’




지해는 태어났을 때부터 낙천주의자였다.

좋은 게 좋은 거고, 싫은 것도 좋다고 생각하면 좋아졌다.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몇백억에 해당하는 주식을 상속받았지만, 엄마에게 용돈을 받아 대학 생활을 했고, 간간이 막내 오빠 예준에게 삥을 뜯어 가며 친구 하윤과 쇼핑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어떤 이는 그녀를 향해 서민 코스프레 한다고 손가락질을 했고, 또 어떤 이는 빨대라고 불렀다.

필요할 때 빨아먹고 버리는 빨대.

한번 쓰고 버리는 빨대.

쉽게 가지고 놀다 버리기 딱 좋은 상대.

그게 늘 그녀의 뒤를 따라다니는 수식어였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왜냐면 내가 행복하니까. 난 지금 행복하니까.

너희들 같은 싸구려 잔챙이 수백 명보다 보석같이 예쁘고 착한 내 친구 하윤이가 있고, 나를 사랑하고 아껴 주는 부모님 그리고 큰오빠와 작은오빠, 인정하긴 싫지만 막내 오빠까지. 그거면 된 거지.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니까.

하지만 그녀의 낙천주의는 인생의 쓴맛을 모르고 살아온 철부지 어린애였을 때나 가능한 얘기였다.

스물일곱의 그녀는 조금 변했다.

“캬!”

지해는 투명한 소주가 넘실거리는 잔을 입안에 털어 마신 후 요란한 추임새를 뱉었다.

그러곤 테이블 위에 잔을 탕! 하고 내려놓았다.

“이 씹다 뱉어 버릴 놈!”

걸쭉하게 욕을 하며 그녀가 이번엔 소주를 병째 들었다.

인생은 쓰고, 소주는 달다.

인생의 참맛을 아는 순간 그녀는 소주의 단맛도 알게 되었다.

꿀꺽꿀꺽.

소주를 병째 들이켜며 지해가 울먹였다.

“도대체 다들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지해야, 그만 마셔.”

지해의 절친이자 막내 오빠 예준과 결혼해 이제는 그녀의 올케언니가 된 하윤이 소주병을 뺏었다.

하윤은 친구를 살리겠다는 일념으로 소주병을 품에 꽉 안았다.

술을 뺏기자 지해는 테이블 위에 이마를 쿵쿵, 박으며 괴로워했다.

“열받아. 진짜 화가 나서 미치겠어.”

갑자기 이상 행동을 보이는 지해를 걱정스레 쳐다보던 하윤은 재빨리 침실로 달려가 예준을 데리고 나왔다.

거실로 나온 예준은 잔뜩 귀찮은 얼굴로 지해의 엉덩이를 발로 뻥 걷어찼다.

“꺄악! 왜 때려!”

지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빠 진짜 너무한 거 아니야? 내가 지금 나이가 몇 갠데, 엉덩이를 걷어차냐! 엉덩이를!”

지해가 따져 물었다. 그러자 예준이 지해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리며 불만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너야말로 너무한 거 아니냐? 지금 시간이 몇 신 줄 알아? 12시가 넘었어. 너 빨리 집에 안 가?”

예준이 주먹을 내보였다.

지해는 금세 깨갱, 하며 조신한 척 자리에 앉았다.

“미안……. 조금만, 좀만 더 있다 갈게.”

“당장 안 일어나?”

“한 번만 봐주라. 나 집에 가기 싫단 말이야.”

“독립해서 좋다고 난리 칠 땐 언제고.”

지해가 못 들은 척하며 소주를 홀짝홀짝 마셨다.

그런 지해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예준이 하윤을 향해 물었다.

“쟤 왜 저래? 또 차였어?”

하윤이 조용히 하라며 예준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곤 작게 속삭였다.

“양다리였대요.”

예준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지해를 흘겨봤다.

“하여튼 저거 남자 보는 눈 더럽게 없어.”

“씨!”

“뭐? 씨? 너 지금 나한테 욕했냐?”

“오빠한테 한 거 아니야. 그 새끼한테 한 거지. 씨. 발라 먹을 놈.”

지해가 별안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복수할 꼬야.”

취해서 혀가 꼬인 동생의 말투에 예준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러곤 하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지해를 향해 물었다.

“그래, 들어나 보자. 그 씨 발라 먹을 놈한테 뭘 어떻게 복수할 건데?”

“복수? 그거 다 나한테 계획이 있지.”

하윤도 궁금했는지 지해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예준과 하윤이 자신의 말에 관심을 가지자 지해는 신이 난 얼굴로 떠들었다.

“윤승원이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누군지 알아?”

“윤승원이 누군데?”

예준의 물음에 하윤이 또다시 남편의 귓가에 속삭였다.

“양다리 남이요.”

하윤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예준의 매서운 눈초리가 지해에게로 향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동생이 밖에서 남자들에게 차이고 다니는 게 화가 났다.

오빠의 눈빛이 점점 더 날카로워지자, 지해는 못 본 척 헛기침을 하더니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아무튼 윤승원이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 진성그룹 차남이야.”

“준우는 왜?”

“준우? 그게 누군데?”

“진성그룹 차남.”

“오빠가 그걸 어떻게 알아?”

“넌 그걸 어떻게 몰라? 이 상황에서 난 니가 서준우를 모르는 게 더 이해가 안 돼.”

“어……째서? 진성그룹 차남 서준우가 유명한 사람이야?”

지해가 고개를 갸웃하며 배시시 웃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이었다.

백치 같은 동생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예준은 열이 뻗쳤다.

“인마, 너희 회사 라이벌 진성기획 상무가 서준우거든?”

“아…….”

“아……? 와. 뭐 이런 게 회사 임원이라고 앉아 있냐. 야. 연애질할 시간에 가서 업무 파악이나 똑바로 해. 이 낙하산아.”

“내가 그 말 하지 말랬지. 내가 왜 낙하산이야?”

“그럼 아니야?”

“맞지. 맞는데……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다른 좋은 단어들 많잖아. 고속 승진 뭐 그런 거.”

“너 고속 승진 뭐 그런 거 아니잖아.”

“아니지. 아닌데……. 에이 씨! 나 말 안 해!”

화가 난 지해가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혈연으로 맺어진 관계만 아니었다면 저 인간을 내가 아주 그냥!

지해가 분노 가득한 눈으로 예준을 노려보자, 옆에 있던 하윤이 사태 수습에 나섰다.

하윤이 예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쑤셨다.

“여보 그만 좀 해요. 오늘은 지해 얘기 좀 들어 주자고요.”

아홉 살 어린 아내의 말에 예준은 못 이기는 척 입을 다물었다.

쌤통이다!

지해는 괜히 더 우울한 표정을 지으며 하윤을 바라봤다. 그러자 마음씨 착한 하윤이 지해의 등을 토닥이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지해야 괜찮아.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해.”

“역시 너밖에 없다. 고마워 하윤아.”

17년 지기의 따뜻한 위로에 지해는 하마터면 눈물샘이 폭발할 뻔했다.

눈가가 촉촉이 젖은 지해를 향해 하윤이 물었다.

“근데 아까 하려던 얘기가 뭐야? 윤승원이 서준우를 싫어하는데 그게 왜?”

“아, 그건……. 그래서 내가…….”

“으응. 그래서 네가?”

“서준우를 내 남자로 만들 거야.”

“…….”

“서준우의 여자가 돼서 윤승원한테 똑같이 복수를 하는 거지. 그래서 후회하게…….”

“풉!”

지해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예준이 웃음을 터뜨렸다.

“준우가 미쳤다고 너랑 만나냐? 야, 꿈 깨. 걔 눈 졸라 높아. 그리고 결정적으로 준우는 너 같은 스타일 딱 싫어할걸?”

“내가 어디가 어때서?”

“그래요 여보, 우리 지해가 어때서요?”

동시에 두 여자가 예준을 째려보았다.

아내와 동생의 매서운 눈초리가 저에게 향하자 예준은 괜히 멋쩍어서 헛기침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아닌 건 아니었다.

예준이 다시 제 페이스를 되찾곤 큰소리쳤다.

“오하윤. 너 네 친구라고 무조건 감싸는 거 그거 안 좋다? 그리고 차지해! 넌 생각하는 게 아직도 왜 그 모양이냐? 정신 안 차릴래?”

“정신을 어떻게 차려. 내가 오죽하면 이러겠냐고. 오빤 도와준다고는 못 할망정…….”

갑자기 말끝을 흐리며 지해가 울먹이자 예준은 당황스러웠다.

“야. 뭐 그런 걸로 울어. 너 울지 마. 울면 죽어.”

“여보.”

지해를 향해 윽박지르는 예준의 옆구리를 하윤이 쿡 찔렀다. 그러곤 아까보다 더 작게 속삭였다.

“오늘은 그냥 울게 둬요. 윤승원이 지해네 집에 여자 데리고 와서 잤대요. 그걸 지해가 봤고.”

“뭐? 누가 어디서 자? 이런 쌍놈의 새끼!”

예준이 거칠게 욕을 내뱉으며 지해를 향해 소리쳤다.

“차지해! 그 새끼 지금 당장 오라고 해! 당장! 아니다. 연락처 내놔. 빨리!”

괜히 얘기했다.

하윤이 이마를 긁적이며 발을 동동 굴렀다. 그러곤 지해를 향해 눈치를 줬다.

‘지해야, 도망가. 이러다 오늘 윤승원 제삿날 되고, 우리 남편 내일 뉴스에 나오겠어.’

예준의 성격을 하윤만큼이나 잘 아는 지해는 슬그머니 가방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어디 가! 앉아. 빨리 윤승원 연락처 내놔! 내놓으라고!”

“연락처는 왜?”

“그 미친 새끼 당장 죽여 버리게. 씨. 어디 감히.”

씩씩거리며 이를 악무는 깡패 같은 오빠의 모습에 지해는 뒷걸음을 쳤다. 그러곤 속으로 하나, 둘, 셋을 외치곤 곧바로 줄행랑을 쳤다.

겨우 대문 밖으로 탈출한 지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근데 내가 왜 도망쳤지?”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다가 괜스레 화가 나서 발밑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뻥, 걷어찼다.

‘저 망할 인간. 위로받으러 온 사람을 이렇게 도망치게 만들다니! 하여튼 도움이 안 돼.’

지해는 예준을 원망하며 택시를 잡아탔다.

“기사님. 청담동…… 아니, 그랜드 호텔로 가 주세요.”

내 집에서 알몸으로 뒤엉켜 있던 남녀의 모습이 떠오른 지해는 오늘도 근처 호텔로 향했다.

달리는 택시 안에서 지해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내 인생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지이잉. 지이잉.

사색에 잠겨 있던 그녀를 방해한 건 핸드폰 진동음이었다.

진동을 뒤늦게 알아차리고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웬 남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 이사님.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되세요? 제가 전화를 얼마나 많이 했는데.

“표 비서님. 밤늦게 어쩐 일이세요?”

그녀가 잔뜩 걱정하는 목소리로 묻자 표 비서가 잽싸게 답했다.

― 내일 오후에 진행되기로 했던 회의가 오전으로 앞당겨졌어요.

“아…… 그래서요?”

― 내일은 절대 늦으시면 안 된다고요. 요새 매일 지각이시잖아요. 그러지 말고 제가 내일 아침에 댁으로 모시러 갈까요?

“아뇨! 아니에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늦지 않게.”

― 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내일은 절대, 절대로 지각하시면 안 돼요.

표 비서가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조곤조곤 제 할 말을 끝까지 다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손에 꽉 쥔 채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그녀가 두 눈을 꽉 감으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사 가기 싫어.”

창문에 비친 그녀의 얼굴엔 슬픔이 짙게 깔렸다.

절망스러운 이 순간에도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서준우…… 서준우를 만나야 해.’

현재로서는 얼굴도 한번 본 적 없는 서준우라는 남자가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