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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해 주세요>
2. 어제 우리 같이 있었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상무님!”

사무실로 들어서는 태주를 향해 수아가 밝은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그러나 태주는 말없이 아주 미세하게 고개만 까딱일 뿐이다.

이름 모를 그리스 조각상이 그럴까.

태주는 항상 얼굴에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걸로 유명하다. 마치 잘생긴 제 얼굴에 불순물이 섞이는 걸 원하지 않는 것처럼.

뭐, 그 덕에 호텔 내 그의 팬클럽 사이에서는 차가운 도시 남자라던가 도도한 나쁜 남자와 같은 상투적인 별명을 붙여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다르다.

매사 반듯하기만 한 그의 얼굴이 초췌하다. 피로가 짙게 덮인 것으로 보아 지난밤 숙취로 인한 여파가 꽤나 큰 듯 보였다.

하지만 그 변화마저도 수아에게만 보일뿐 다른 사람들 눈엔 거기서 거기다. 태주 탐구 영역이라는 시험이 있었다면 수아는 손쉽게 그 시험의 수석이 될 터.

사실 수아는 그의 오랜 비서임과 동시에 짙은 밤을 함께 나누는 잠자리 파트너이기도 하니까.

상무실 안으로 들어간 태주가 그제야 인상을 찌푸렸다. 깎아 낸 듯 잘난 얼굴에 드디어 감정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많이 힘든지 자리에 앉자마자 넥타이부터 느슨하게 풀었다. 더 이상 보는 사람도 없고 제 바운더리 안으로 들어왔으니 거리낄 것도 없다.

물론 제 앞에 수아가 버티고 서 있긴 했지만 그녀는 논외다. 그녀야 이 정도 얼굴 찌푸림 뿐 아니라 환희에 젖어서 뱉어 내는 야릇한 신음소리까지 저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으니까.

태주는 눈을 감은 채 연신 이마 옆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무리 손에 힘을 줘 봐도 지끈거리는 감각은 사라지질 않는다.

이러다가 머리가 깨지지 싶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누워만 있고 싶다.

그때 수아가 데스크 위로 차가운 물 한 잔과 발포 비타민 한 알을 내밀며 말했다.

“오늘 일정이 많습니다. 상무님.”

짧은 한마디였지만 그 속에 꽤 여러 가지의 뜻이 있다는 걸 태주가 모를 리 없다.

정신 차리라는 거다. 언제까지 이렇게 숙취를 달고 어린 애처럼 힘든 티를 풍길 거냐는 강한 압박.

컨디션이 어떠냐, 어디가 안 좋으냐 등 형식적이나마 염려해 주는 대사 따윈 없다. 그저 본론이다.

수아는 항상 그랬다.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는 여자가 바로 이수아다.

어떨 땐 무심한 그녀의 성격에 마음이 상하기도 했지만 저와 함께 밤을 보낼 때만큼은 달라지는지라 그걸로 위안을 받았다. 남들은 모르는 수아의 모습을 저만 안다고 생각하면 짜릿한 희열이 느껴지기도 했으니까.

태주가 고개를 들어 수아를 바라봤다.

다른 사람 같았으면 노골적인 제 시선에 주눅이 들 텐데 어찌된 게 이 여자는 시선을 피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더 당당하게 같이 쳐다본다. 참 매력이 넘치는 여자다.

“상무님!”

대꾸 없는 태주를 채근하려는 듯 수아가 목소리를 높였다.

또다시 시작된 압박.

그 압박을 흡수하겠다는 걸까. 태주는 수아가 건넨 비타민을 물에 넣었다.

쏴아!

물에 녹아 희석되는 비타민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사라졌고 태주가 그 비타민을 한 모금 마셨다.

태주는 오늘 제 스케줄표에 눈을 고정한 채 무심한 척 말을 걸었다.

“어제, 우리 같이 있었습니까?”

모르는 사람이 들었다면 이상할 거 없는 질문이었지만 두 사람 사이에서는 조금 달랐다. 단순히 같은 공간에 있었던 걸 묻는 게 아니었으니까. 상사와 비서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가 되었는지를 묻는 거다. 인간의 본성을 나누며 은밀하고 농염한 시간을 보냈었는지를 묻는 거고.

사실 두 사람 사이에서 크게 별스럽지 않은 질문이었지만 수아의 얼굴에 잠깐 당황한 기색이 스쳤다.

“아, 아니요.”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었다. 덕분에 태주가 잠깐 고개를 들었지만 수아는 이내 여유로운 미소를 장착했다. 자연스레 태주의 고개도 다시 내려갔다.

“너무 늦은 시간이라 어제는 상무님 스위트룸까지만 모셔다드리고 저는 바로 나왔어요.”

아니라는 대답에 태주의 눈썹이 잠시 휘어졌지만 별거 아니라는 듯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곤 시니컬한 한마디를 던졌다.

“늦은 시간일수록 더 함께하는 사이 아닌가?”

일종의 도발이었다. 수아를 당황하게 하고자 던지는 미끼 같은.

하지만 수아는 쉬이 넘어가지 않았다.

“야근 수당을 미리 신청 안 했거든요.”

하.

당돌한 대답에 태주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받아치는 기술이 점점 수준급으로 변해 간다. 만만치 않은 여자 같으니라고. 하긴, 그게 그녀의 매력이니까.

태주는 피곤한지 두 눈을 꾹꾹 누르며 수아를 향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더워서 혼자 벗은 건가…….”

수아는 분명히 태주의 그 혼잣말을 들었다. 그러나 못 들은 척 매력적인 몸매를 꼿꼿하게 세워 태주를 내려다보고 서 있기만 했다.

태주도 내심 수아의 답을 기다렸으나 돌아오는 반응이 없자 스케줄표에 두었던 눈을 거둬 수아를 올려다봤다.

그의 눈 속에 수아가 한가득 담겼다.

짙은 흑발의 머리카락을 하나로 묶어 올려 단정한 모습이었지만 하얀 목덜미가 자극적이다. 깔끔하게 틀어 올리긴 했지만 자잘하게 남겨진 잔머리카락이 꽤나 섹시하다.

진하지도 그렇다고 연하지도 않은 그녀의 화장은 청초함과 섹시함을 동시에 지녔다. 거기다 과하지 않은 가슴선과 잘록한 허리 라인은 항상 태주를 홀려 버린다.

특히 조그만 입술에 머물러 있는 핑크빛 루주는 볼 때마다 그녀를 삼키고 싶은 원초적인 욕구마저 불러 일으켰다.

한참 동안이나 넋을 놓고 수아를 바라보던 태주가 자연스레 그녀를 처음 봤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도 수아는 오늘처럼 매력적이었다.

아니, 당돌했다.

‘3년만 일하겠습니다.’

느닷없이 나타난 수아가 계약 조건으로 다른 건 필요 없으니 3년만 일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 이후엔 무조건 그만둘 거예요. 그러니까 절대 잡지 마세요.’

‘내가 잡을 것 같습니까.’

심드렁하게 받아치는 태주를 향한 수아의 표정은 꽤나 당당했다.

‘두고 보면 알겠죠.’

태주는 지독한 워커 홀릭이다.

그의 살인적인 스케줄과 결벽증에 가까운 완벽성은 늘 그의 주변의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기 일쑤였다. 그래서인지 두세 달에 한 번 꼴로 그만두는 전임 비서들 덕에 골머리를 앓던 태주였다.

그래서 과연 비서가 꼭 필요한 것인가 하는 회의가 느껴질 만할 때쯤 수아가 나타났다.

수아는 본래 로얄펠리스 호텔의 수장인 강일규 회장의 막내 비서였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입사한 그녀는 딱 부러지는 성격과 꼼꼼한 일처리로 일규가 손녀처럼 아끼는 우수 사원이었다.

일규는 믿을 만한 사람이 없다며 수아에게 태주의 비서가 되어 주길 부탁했고, 그 제안을 받아들인 그녀가 태주 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왜 하필 3년인지 그때 태주는 묻지 않았다.

제게 말도 잘 걸지 못하는 여느 비서들과 달리 당찬 배포가 있어서 좋았던 걸까. 그보다는 어차피 세 달을 못 버틸 거라 생각했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그로부터 2년 10개월이 흘렀다.

세 달을 넘기지 못할 줄 알았던 태주의 예상은 보기 좋게 걷어차였다. 수아는 지금 그 누구보다 오래, 그리고 깊이 태주의 모든 것을 잠식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이제 그녀가 처음 약속했던 3년까지 단 두 달만이 남았다.

궁금했다. 제 앞에 서 있는 저 여자가 정말 두 달 후엔 창문을 두드리고 사라지는 바람처럼 저를 떠날 것인지 말이다.

태주는 고개를 저었다.

강태주에게 이수아란 사람들이 아는 것처럼 단순한 비서만은 아니니까.

그리고 그녀 역시도 우리의 이 관계를 만족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그녀는 절대로 나를 떠날 리가 없다.

상념을 걷어 낸 태주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는 왜 그냥 갔습니까? 스위트룸까지 예약해 뒀으면서.”

또다시 얽히는 개인적인 이야기에 수아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좀 그만하자는 뜻으로. 그리곤 나가떨어지라는 듯 거침없는 입담을 시작했다.

“매번 말씀드리지만.”

“…….”

“술에 취한 상무님은 그닥 매력 없으세요.”

“그닥?”

허. 기가 찬다.

아무리 잠자리를 함께하는 사이라지만 태주는 그녀의 직장 상사다. 그럼에도 저렇게나 칼 같은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단어 하나에도 속뜻은 무궁무진하다. 그녀가 뱉은 ‘그닥’이라는 단어는 그냥 튀어나온 말이 아닐 테고.

수아가 제 머리 꼭대기에 있다는 걸 새삼스레 깨달은 태주의 혼잣말이 낮게 읊조려졌다.

“아. 맨정신일 때만 안아 달라고 했었지.”

비아냥인지, 뭔지 모를 한 마디가 이어졌지만 수아는 딱히 동요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 말 없이 태주를 쳐다만 볼 뿐, 별다른 자세를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그 흔한 미소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관심이 없는 건가.

오늘따라 태주는 수아에게 심술이 났다.

술에 취한 자신이 매력 없다는 말 때문일까. 아니면 지난밤 술에 취한 그를 혼자 두고 가 버린 행동 때문일까. 그것도 아니면 지금 저를 보고도 웃어 주지 않는 매정한 표정 때문일까.

“예외도 있지 않습니까. 어제 같은 날 혼자 둘 건 또 뭐야.”

투정을 부리는 말에도 수아는 여전히 대답이 없다. 결국 태주는 더 강하게 속뜻을 내비쳤다.

“어제는 단아한 이 비서 말고 내 앞에서만 웃는 이수아가 필요했는데.”

“사무실입니다. 상무님.”

그제야 대꾸하는 수아의 목소리에서 한가득 얼음이 쏟아진다.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말에 각이 졌다.

더 투정 부리고 싶었지만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백기를 들었다.

“어제는 고생했습니다. 이 비서 혼자서 날 침대까지 눕히려면 힘들었을 텐데.”

말을 마친 태주가 제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오늘 아침 스위트룸에서 발견한 수아의 귀걸이를 돌려주려고 말이다.

“객실에는 안 들어갔어요.”

순간 태주의 미간이 좁혀지며 재킷 주머니에 있던 오른손이 갈 곳을 잃었다. 손에 쥔 귀걸이도 놓쳤다.

“객실에 안 들어갔다고?”

“네. 스위트룸 앞까지만 모셔다드리고 바로 나왔어요.”

군더더기 없는 수아의 말에 태주가 적잖이 당황했다.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수아는 분명 거짓말을 하고 있다. 제 재킷 안주머니에 있는 귀걸이가 증거다.

어젯밤 제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던 걸까.

이수아. 도대체 뭘 숨기고 싶은 거야.

태주의 머릿속에 온갖 물음들이 떠다니고 있는데 수아의 입이 다시 열렸다.

“두 달 남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