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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 나쁜 남자


심장이 쿵쿵 뛴다.

아직도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유서은의 시도는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한 방에 무력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의 관심은 그 대단한 여배우를 넉다운시키고 당당히 그의 옆을 차지하고 있는 연아의 존재에 쏠렸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매력의 소유자이기에 도혁의 관심을 끌었나, 새삼 놀라는 눈빛으로.

처음보다 더 집요해진 따가운 시선이 이어지자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해졌다. 이제는 굳이 도혁이 가자고 하지 않아도 그녀가 먼저 나가자고 말하고 싶었다.

화려한 출입구 앞에 서서 각자 코트를 기다리고 있을 때 또 다른 사람이 그들 앞을 막아섰다.

이번 파티의 주최자인 정 원장이었다.

한국 화랑 계의 무시할 수 없는 거목으로 통하는 정 원장은 각이 선 날카로운 외모만큼이나 눈치가 빠른 60대 초반의 남자였다.

가자미같이 생긴 눈이 굳은 표정의 연아를 지나 장신의 도혁 쪽으로 향했다.

조금 전, 세 사람의 흥미로운 해프닝을 지켜본 것인지, 얇은 입술이 정떨어지게 비틀려 있다.

“서 대표님, 이렇게 빨리 돌아가시다니, 파티가 즐겁지 않으십니까?”

혀를 말듯 가볍게 굴러가는 발음이 유난히 귀에 거슬린다.

“파티는 아주 즐거웠습니다. 다만 다른 일정이 있어서 오늘은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그 전에 단 10분만 시간을 내주실 수 있을까요? 전에 관심을 가지신 윤 작가 작품이 막 도착한 터라 가능하면, 서 대표님께 가장 먼저 보여드리고 싶군요.”

“관심 있는 작가이긴 합니다만 다른 분이 원하신다면 굳이 절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 이런, 더는 지체할 수 없을 것 같군요. 작품 감상은 다음 기회에 하는 것으로 하죠. 초대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한껏 정중하게 말하고 있지만, 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은 매정한 어조였다.

당연히 깐깐한 정 원장의 눈썹이 아치형을 그렸다.

한참 어린 남자의 냉정한 대답이 그의 신경을 거스른 것이다.

하지만 그는 노련한 남자였다. 서도혁은 이 바닥에서 무시할 수 없는 VVIP 고객이었고 그를 상대로 괜한 무리수를 둘 필요는 없다는 것을 분명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는 그 이상 권하는 것을 포기하고 예의상 인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때, 누군가 도혁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고 그가 잠시 몸을 돌려 상대와 이야기를 나눴다.

그 사이 정 원장이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입술을 꼰 채 묘한 미소를 지었다. 마치 도혁이 말한 다음 일정이 무엇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의미를 담아.

분명 그의 눈에 그녀의 존재는 서도혁을 위한 섹스 파트너, 그 이상은 아닐 것이다.

날씬한 전신을 훑어내릴 때 퍼지는 그의 느끼한 표정이 그 사실을 말해주었다.

속이 울렁거린다. 분노와 모멸감을 억누르기도 힘들었다.

사실, 오늘 파티에 도착한 순간부터 저 늙은 남자는 은밀히 그녀의 전신을 저렇게 핥듯이 쳐다보곤 했다. 특별히 도혁과 떨어져 홀로 남았을 때는 혀까지 축이면서. 당장이라도 얇은 천을 찢어버리고 그 안의 흰 속살을 탐하고 싶어 안달이 난 호색한 같았다.

처음엔 설마, 하다가 그런 일이 반복되자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 모두가 서도혁과 동행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받는 모욕이었다.

물론 파트너가 서도혁이기에 그도 감상만 할 뿐 감히 손을 뻗어 건드리지는 못했다.

그나마 상대가 저 역겨운 늙은 남자가 아닌 서도혁이라 다행인 건가?

피식, 쓴웃음이 번졌다.

결과적으로 노골적이냐 은밀 하느냐의 차이일 뿐, 아니, 어떻게 보면 실제로 그녀를 덫에 가둔 채 육체를 탐하려 하는 도혁이 더 끔찍한 존재일지도 모른다.

연아는 정 원장의 눈빛을 느끼며 우아한 붉은 캐시미어 롱코트를 걸치고 도혁의 에스코트에 따라 차가운 바람이 부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갑자기 몰아친 한기에 무리하게 마신 술기운이 몰려오며 휘청, 현기증이 일었다.

도혁이 곧장 손을 뻗어 그녀의 등과 허리를 받쳤다.

흠칫, 몸을 떨며 그녀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틀었다.

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지며 아래턱이 실룩거렸다.

그녀는 최대한 그의 반응을 무시한 채 고집스럽게 앞만을 응시했다.

잠시 후 은은한 조명이 깔린 어둠 속에서 날씬한 차체의 검은 세단이 다가왔다.

20대 후반의 젊은 남자가 곧장 뒷좌석의 문을 열었다.

더는 도망갈 길이 없는 매정한 현실을 자각한 순간이었다.

매섭게 내쏘는 상대의 재촉에 끌려 연아는 억지로 차에 무거운 몸을 실었다.

어쨌든 이것으로 그녀의 첫 임무는 완수한 셈이다.

도혁은 오늘 밤의 파티에 그녀가 참석하길 바랐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대외적인 광고 효과 때문이었다. 한 큐에 여배우의 관심을 떨쳐버리면서 두 사람의 관계를 공식화하기 위한.

대체 왜 굳이 이렇게까지 판을 키우는 것인지 여전히 이해 불가였지만 세간의 관심을 끄는 파티인 만큼 결과적으로 그 어떤 매스컴의 효과보다 빠르고 강력한 결과를 보여줄 것이다.

서도혁은 영리한 남자다.

절대 상대에게 수를 읽히지 않는…….

그런 영리한 남자를 상대로 난 지금 뭘 하는 거지?

“예쁜 입술 다 찢어지겠군.”

그녀의 시선이 자동으로 그에게 향했다.

“그러다 키스도 제대로 못 하면 어쩌려고. 이제 당신 몸은 당신 것이 아니라는 걸 잊었나?”

급소를 찌르는 나직한 경고.

연아는 깊은숨을 들이켜며 남자를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그의 빈정거림을 참을 수 없었다. 굳이 상기시켜주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그녀는 치미는 감정을 힘겹게 누르며 고집스럽게 입술을 더 세게 깨물었다.

“침묵시위인가?”

“여자를 가지고 노는 게 당신 취미인가 보죠?”

“여자에 따라 다르지.”

“당신을 증오해요.”

“놀라운 소리도 아니군.”

“정말 이해할 수 없어. 왜 나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죠? 더 늦기 전에 나 같은 평범한 여자 대신 당신한테 어울리는 더 매력적인 여자를 찾아보는 게 어때요?”

일테면 유서은 같은 여자.

뭐 하나 부족할 것 없는 여자가 그렇게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내는데 왜 이 남자는 마다할까.

물론 바로 그 이유로 이곳에 온 거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유서은 같은 여자를 떼어내기 위해 자신처럼 평범한 여자를 선택한 도혁의 의도는 여전히 미스터리였다.

“안타깝게도 그런 여자들은 내 흥미를 끌지 못해.”

“그럼 나는 대체 어떤 흥미를 끄는데요?”

“몰라서 물어?”

그가 대놓고 코트 위의 날씬한 상체를 훑었다.

윽, 나쁜 자식!

연아는 고운 눈매를 매섭게 휘며 그를 노려보았다.

그 표정을 보며 그가 태연하게 씩 웃으며 거만하게 머리칼을 쓸어넘긴다.

“그거 아나? 지금 그 표정, 은근 남자를 도발한다는 거?”

하, 정말 이 남자가!

“숨도 못 쉬게 입술을 밀어붙이고 싶게.”

헉, 그녀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혹시나 정말 그런 일이 일어날까 싶어 무의식중에 주춤 뒤로 물러나다, 아차 했다. 그에게 겁먹을 모습을 들켰다고 생각하니 더 화가 났다.

그의 입술이 더 큰 호선을 그리며 휘었다.

매번 이 남자의 교묘한 덫에 빠져 휘둘리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 한마디, 표정 한 번에 이성은 날아가고 감정을 주체하기가 힘들다. 어떨 때는 그가 일부러 그녀의 신경을 건드리는 게 아닐까, 의심될 때도 있었다.

지금 역시 흥분한 그녀를 보며 지극히 만족스러운 표정이었다.

대체 왜?

“무슨 말을 한다 해도 당신이 하는 비열한 짓에 대한 변명은 될 수 없어요.”

“왜 내가 변명해야 하지?”

“최소한 양심이 있다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죠.”

“내가 왜? 난 이미 정당한 대가를 치렀어.”

정당한 대가.

피가 한꺼번에 머리로 쏠리는 기분이다.

누군가를 이렇게 미친 듯 증오해 보긴 처음이었다. 그의 잔인한 말 하나하나가 견딜 수 없는 치욕이 되어 그녀를 짓눌렀다. 혹시나 이번 일을 없던 일로 할 거라는 기대 자체가 어리석었다.

“게다가 아직 포장도 풀지 않은 상태에서?”

포장도 풀지 않은…… 아직 그녀의 육체를 건드리지도 않았다는 뜻이었다.

“지나친 겸손은 귀에 거슬리는 법이야.”

“지나친 겸손?”

“당신도 자신이 매력적이라는 것을 잘 알 텐데? 남자들이 당신을 보면 왜 그렇게 환장하는지. 아까 그 늙은 원장 새끼처럼.”

그녀의 눈이 휘둥그렇게 커지자 그가 사악하게 씩 웃었다.

“왜 놀랍나? 내가 안다는 것이?”

그런 내색은 전혀 하지 않은 채 마지막까지 깍듯한 예의를 다했던 남자였다.

“한 방 날리고 싶은 걸 참아줬을 뿐이야. 파티 주최자의 얼굴을 생각해서. 어차피 그렇게 원한다고 감히 내 여자한테 손 델 만큼 대단한 위인도 못 되니까.”

내 여자.

가뿐히 상기시키는 현실에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시선을 돌렸다.

“당신은 그런 여자야. 의도하든 아니든 간에, 남자의 거친 본능을 자극하는. 당신 주변에 있었던 수많은 남자가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같은 이유로 끌리지 말란 법은 없잖아.”

내 주변에 있던 수많은 남자?

대체 내 주변에 얼마나 많은 남자가 있었다고…… 설마 내가 그 모든 남자와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 정도로 걸레처럼 난잡하게 살았다고?

대체 왜?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스물일곱 살이 될 때까지 그 흔한 연애나 애인 한 번 가져 본 적 없던 그녀였다.

내성적인 성격도 성격이거니와 어린 시절의 아픈 상처 때문인지 성인이 된 후에도 사교 생활에 능숙하지 못했다. 물론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에 대한 회의 때문이기도 하지만.

설마 잠시 모델 계에 몸담았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끔찍한 오해를 하는 걸까?

솔직히 그 짧은 시간 동안, 많은 남자의 대시를 받은 것이 사실이었다. 어떤 이들은 노골적인 관심을 드러냈다.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하며 특별한 관계를 맺길 강요하곤 했다.

하지만 연아는 그들이 원하는 것이 하룻밤의 유희일 뿐이라는 걸 모를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이런 닳고 닳은 바닥일수록 더 정신을 바싹 차리며 자신을 지켜야 했다. 그녀는 매번 한기가 어릴 만큼 매정하게 남자들의 구애를 거절했다.

한데 문제는 그 뒤였다.

그녀의 도도한 태도에 자존심이 상했던 남자들이 한두 명씩 터무니없는 소문을 퍼트리기 시작했다. 잠자리의 언급은 물론이고 그녀가 의도적으로 다가와 자신을 유혹하고 매정하게 버렸다느니, 심지어 친한 동료 모델의 애인한테까지 꼬리 치는 걸 봤다는 둥, 선을 넘어서는 끔찍한 소문이 이어졌다.

그 때문에 그 좁은 바닥에서 일하기는 점점 더 힘들어졌고 나중에 모델을 그만두었을 때는 후회는커녕 그 어떤 미련도 남지 않을 만큼 홀가분했다.

사실 그녀는 몸으로 움직이기보다 머리를 쓰는 학문적 성취감에 더 큰 행복을 느꼈다. 그녀가 좋아하는 책과 그림에 푹 빠져 있다 보면 외로움이나 애인의 필요성조차 크게 느끼지 못했다.

그녀의 인생을 뒤흔들었던 단 한 번의 일탈을 제외하고…….

이미 그 한 번으로 톡톡한 인생의 교훈을 얻은 터였다. 두 번 다시 그런 어리석은 감정놀음에 빠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 사랑조차 그녀와 아버지만 아는 비밀이었다.

따끔따끔, 가슴이 쓰리다.

오랜 시간 묻어둔 아픈 상처를 떠올린 탓이었다.

그녀는 깊은숨을 들이켜며 무거운 생각을 밀어냈다.

이 남자가 어떻게 생각하든 이제 와 일일이 변명할 생각은 없었다. 어차피 그녀의 가슴에는 주홍글씨가 박혀 있었고 저 남자의 굳은 머리는 그 어떤 말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우린 계약을 했어. 그리고 오늘 밤이 그 계약을 이행하는 첫날이지. 난 그 시간을 아주 즐겁게 기다리고 있을 뿐이야.”

그는 잔인한 현실을 들이대길 주저하지 않았다.

그녀의 마지막 숨통까지 단단히 조이면서.

그래, 그의 말 그대로 그들은 계약했고 그는 이미 대가를 지불했다.

그러니 이제는 약속대로 그녀는 그가 원하는 것을 주는 일만 남아 있었다.

한데 왜 이렇게 억울하고 분할까.

눈가에 물기가 핑 돌자 그녀는 이내 시선을 창가로 돌렸다.

이렇게 화가 나는데도 무력하게 끌려가야 하는 현실이 너무 서글펐다.

하지만 그것이 눈앞의 냉정한 현실이라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아무리 부정하려야 부정할 수 없는.

유유히 달리는 고급 차체 안에서 현란한 네온사인의 거리가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연아는 입술을 꼭 깨문 채 도혁의 은신처에 도착할 때까지 그렇게 무거운 침묵을 이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