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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화







직원을 따라 걸으면서 지아는 카드를 만지작거렸다. 까만 바탕에 금색으로 VIP라 박힌 카드는 이곳에서 뭐든 할 수 있는 마법 패스인 것처럼 느껴졌다.

어두우나 은은하게 빛나는 공간을 가로지르자 몇 테이블을 제외하곤 모두 바텐더를 향해 앉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어디에 앉아도 같을 풍경을 감상할 수 있어 자리를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손님.”

지아가 목이 높은 의자에 앉자 이번에는 검은색 셔츠에 소매를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바텐더가 싱그러운 미소를 띠며 인사해 왔다. 사람을 대하는 눈빛이나 미소가 이곳에서 오래 근무했을 거라는 느낌이 왔다.

“좋은 하루 보내셨나요?”

“네. 괜찮은 하루였어요.”

지아가 싱겁게 웃으며 대답했다. 오늘은 난생처음 겪어 보는 일투성이니까.

그러자 바텐더가 코를 찡긋거렸다.

“괜찮은 하루의 끝을 어떤 것으로 마무리해 드릴까요?”

“제가 칵테일 종류는 잘 모르는데, 추천해 주실 수 있나요? 오늘은 충분히 취하고 싶어요.”

“술이 세신 편?”

“아니요.”

지아가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가볍게 시작할 수 있는 칵테일에 도수를 높여드리는 편이 낫겠군요. 달콤한 맛? 아니면…….”

음성과 표정이 경쾌해서일까, 지아는 저도 모르게 가벼운 기분이 되어 대답했다.

“음, 그럼 상큼한 맛으로요.”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여 보인 바텐더가 사라지고, 지아는 고요히 어둠이 내려앉은 도심을 바라보았다. 높은 곳에서 풍경을 바라보는 기분이 퍽 괜찮았다.

마치 새로 태어난 기분. 벌써 이런 기분을 느낄 수 있다는 게 신기했다.

지아가 느슨해진 머리를 고쳐 묶으며 시간을 보낼 때였다.

멀지 않은 곳에 한 남자가 다가와 앉는 것이 보였다. 살짝 대각선으로 기울여 앉은 탓에 얼굴은 드러나지 않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나 아우라가 평범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자주 찾는 손님인가?

아니나 다를까, 그를 발견한 바텐더가 메뉴를 묻지도 않고 진한 호박색 잔을 건넸다.

남자는 상복에 가까운 검은 정장을 입고 있었다. 그러나 넥타이를 매고 있지는 않아 격식을 차린 것은 아닌 듯했다.

낯선 남자에게 시선이 닿은 이유는 그가 지쳐 보이기 때문이었다. 술을 마시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를 쓸어 올리며 한숨을 흘리고. 하지만 움직일 때마다 조명에 언뜻 비치는 얼굴이 놀랍도록 잘생겼다는 이유도 포함돼 있었다.

저 남자, 어디에서 본 것 같은데.

무례라는 것도 잊고 그를 바라보던 지아는 제 잔이 나오고서야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모히토입니다.”

익숙한 이름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는데, 놀라울 만큼 맛있었다. 이렇게 상큼함이 번지고 단맛이 도는 술은 처음이었다.

그녀가 홀짝홀짝 잔을 비우는 사이, 바텐더는 너무 빨리 마시면 취한다며 물 한잔을 놓아주고 갔다. 안주로 먹을 간단한 핑거 푸드도 함께.

누군가에게 서비스를 받는 게 익숙하지 않았지만, 지아는 이 순간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일행, 없으십니까?”

그때 누군가 말을 건네 왔다. 지아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자, 놀랍게도 멀리에서 혼자 술을 마시던 남자가 코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그런데 지아는 눈을 크게 떠야 했다. 어딘가 낯설지 않더니, 틀림없이 두 달 전 납골당에서 본 그 남자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무엇보다 그는 지금까지 그녀가 만난 남자 중 가장 근사했다.

살짝 이마를 덮고 있는 머리와 빚어낸 듯이 오뚝하게 솟은 콧대, 길게 그어진 눈매는 나긋했으나 여전히 묘한 날카로움을 숨길 수 없었다. 술기운이 아니래도 한참이나 눈을 떼지 못했을 것이다.

남자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피할 곳을 주지 않고 정면으로 다가오는 기분이었다. 장소가 주는 묘한 분위기 탓인지 고작 말 한마디가 강렬한 자극으로 다가왔다.

“……네.”

“그럼 같이 한잔할까요? 나도 혼자라, 오늘은 친구가 있었으면 해서.”

친구.

지아는 낯설고도 어울리지 않는 표현에 어색함을 느꼈으나 듣기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바텐더 말대로 빨리 마셔 취해 버린 것인지.

“기태준입니다.”

남자가 통성명하며 손을 내밀었다. 지아 역시 꺼릴 것 없이 그 손을 잡았다.

“손지아예요.”

“예쁜 이름이시네요.”

“네. 그쪽도.”

멋있는 이름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말을 삼킨 건 그녀의 손을 잡은 손아귀의 힘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손바닥에 밀착해 오는 온기가 뜨거워 내심 동요할 무렵, 그가 자연스럽게 손을 떼었다.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여긴 처음인가?”

“네.”

“투숙객?”

“네.”

단답으로 대답하기만 하는 지아를 재미있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태준이 고개를 들어 가볍게 손짓했다. 다가오는 바텐더에게 알아듣기 힘든 주문을 하고는 곧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왜 혼자 마시고 있었어요?”

그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물었다. 지아는 남자가 저에게 관심을 주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었다. 납골당에서 마주쳤던 그때,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사람인 것 같았는데.

“기념하는 의미로요.”

“어떤 기념?”

잘생긴 남자와 이렇게 대화해 보는 재미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지아는 주변의 시선이 알게 모르게 제 쪽으로 쏠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묘하게 으쓱해졌다. 타인을 빌려서라도 그녀가 빛날 수 있는 기회는 흔치 않았으니까.

“큰 결심을 한 날이거든요.”

“그렇군요. 나랑 똑같네.”

태준은 작은 잔을 둥그렇게 돌리며 대답했다. 취기가 오른 탓인지 사소한 움직임마저 멋스럽게 느껴졌다.

“나도 그렇거든. 기념의 의미.”

“좋은 일이 있으셨나 봐요?”

“좋은 일은 아니지만, 평생 잊지 못하는 날이죠.”

표현이 모호하다고 생각했으나 별로 파고들어 생각할 일도 아니었다.

“지아 씨는 좋은 결정을 내린 듯하니, 축하할 일이군요.”

“네, 뭐.”

다 정리하고 떠나기로 했다는 걸 말하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상상해 보니 우스운 일이었지만, 남자의 축하는 묘하게 그녀의 결심까지도 신성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그때 벨소리가 울리고, 그가 블레이저 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환하게 빛나는 액정 한가운데에는 ‘김현아’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여자 친구인 걸까 생각했는데, 그는 전화를 받는 대신 휴대폰 전원을 끈 후 도로 블레이저 안으로 집어넣었다. 지아는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생각해 보니 여자 친구라면 이름 석 자만 달랑 써놓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안주를 먹지 않는군요. 입에 안 맞는지?”

“저는 비싸면서 조금씩 나오는 음식은 별로라서요. 차라리 그 돈으로 고기를 구워 먹죠.”

그러자 남자가 짧게 웃었다. 분위기를 망치는 대답이었을까 생각했지만, 그렇대도 상관없었다.

“만나는 사람, 있어요?”

다소 엉뚱한 대답에도 남자는 지아에게 흥미가 인다는 듯 묘하게 웃는 얼굴로 물었다.

지아는 지금까지 연애 경험이 전무했지만, 그 사실을 낯선 남자에게 굳이 털어놓기는 싫었다. 게다가 오늘 밤은 저답지 않게 보내기로 결심했으니.

“헤어졌어요, 얼마 전에.”

“어리석은 남자네. 이렇게 아름다운 분과 이별이라니.”

고루한 질문에 어울리는 고전적인 멘트.

지아는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그녀는 화장은커녕 평소보다 더 초라한 얼굴로 낡은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엄마를 보내드린 후 외모에 치장할 여유 따윈 없었다.

“취향이 독특하시네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여기 아름다운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데. 거기에 비하면 전 평범하다 못해 흔해 빠졌으니까요.”

바는 어느덧 다른 손님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중엔 애인 혹은 친구들과 찾은 젊은 여성들이 많았다. 그들은 모두 아름다웠다. 이 반짝거리는 공간을 더욱 빛낼 만큼 생기 있고 밝았다.

“지아 씨도 아름다워요.”

“네. 감사하네요. 그쪽도 잘생겼어요.”

“주문하신 칵테일 나왔습니다.”

때마침 바텐더가 다가와 신비로운 빛을 뿜어내는 칵테일을 두고 갔다. 투명하지만 별처럼 반짝이는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금가루 같은 것들이 액체 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자, 마셔요.”

태준이 잔 밑동을 잡고 지아에게 밀어 주었다. 아까 그가 주문한 것인 모양이었다.

“예뻐요. 이 칵테일은 이름이 뭐예요?”

“젖은 솜사탕.”

어울리지 않는 이름에 지아가 눈을 깜빡거리자 그가 입꼬리를 당겨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