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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화

프롤로그







“지아 씨. 이사님 호출이요.”

파티션이 툭툭 두드려졌다. 모니터를 보고 있던 지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금년 신규 계약 거래 정리본 올려 달라시네요.”

“지금 이 시간에? 그럼 지아 씨가 직접 들어가야 하는 거야?”

“실장님 퇴근하셔서 그런가 봐요. 지아 씨가 담당자니까.”

웅성거림을 들으며 지아는 차분하게 마우스를 움직여 파일 서버에 접속했다.

의아해하는 팀원들과 달리 그녀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예상하고 각오했던 것보다 가슴이 더 조여들었다. 단순한 긴장이라기엔 호출을 전해 듣는 순간 속옷이 젖어 버렸음을 스스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사님이 계약 거래 내역은 왜 확인하시는 걸까요? 그런 것까지 직접 체크하세요?”

“그러게. 난 내 담당으로 불려간 적 한 번도 없는데.”

“지아 씨는 일을 잘하잖아요.”

“그거 내 디스지?”

파일을 열어 인쇄 버튼을 누른 지아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철컥, 소리와 함께 인쇄물을 토해 내는 인쇄기 앞에 서서 심호흡했다. 몰아치는 감정으로 손끝이 저릿했다.

“퇴근이 늦어져서 어떡해. 그럼 수고해요. 저희 먼저 갈게요.”

잠시 후 직원들이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간신히 웃는 얼굴을 만든 그녀도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모두가 빠져나가고 텅 빈 사무실.

지아는 인쇄물을 들고 자리로 돌아와 서류철에 가지런히 끼워 넣었다. 그것을 품에 안고 깊이 숨을 몰아쉬었다. 천천히 이사실로 향하는 동안에도 몇 차례의 심호흡이 더 필요했다. 그러다 마침내 멈추어 선 두 발.

노크를 위해 주먹을 쥐어 든 그녀는 문득 멍이 든 무릎을 내려다봤다. 검정 스타킹을 신을 걸 그랬다고 후회했으나 이미 늦었다. 그저 그가 알아채지 않기를 바라며 문에 주먹을 부딪쳤다.

똑똑.

두드리는 순간에조차 가슴이 죄는 것처럼 선명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랫배에 힘이 들어가고 절로 엉덩이가 조여들었다.

속으로 숫자를 센 그녀가 문고리를 조심스럽게 잡아 내리자 천천히 벌어지는 문틈으로 적막한 공간이 드러났다.

분명 같은 공기일진대 유독 서늘함이 느껴져 몸을 떨었다. ‘호연그룹 이사 기태준’이라는 명패가 조명을 반사해 기품 있게 빛났다.

고개를 들자 넓은 책상에 앉은 남자가 보였다.

한가운데로 흘러내리는 실크 넥타이는 탄탄한 흉근을 돋보이게 했고, 유려한 얼굴선은 남성미를 뿜었다. 단정한 입매와 그림처럼 오뚝하게 솟은 콧날, 그리고 강인한 턱은 진실만을 말할 것처럼 굳다.

앞으로 다가가 선 지아는 시선 둘 곳을 찾지 못했다. 그의 시야 안에 들어와 있는 것만으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요청하신 자료…….”

“멍든 것 같은데.”

눈앞의 남자가 말을 끊었다.

정확한 비율로 넘긴 깔끔한 머리에 목 끝까지 잠근 셔츠가 그의 완벽주의 성향을 대변해 주는 듯했다.

“다쳤습니까?”

그런 남자가 느른하게 내리깐 눈으로 물었을 때, 지아는 전신에 소름이 돋는 것을 느꼈다. 특히나 아랫배가 저릿하고 뜨거워지는 감각은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몸의 변화였다.

“실수로 부딪쳤습니다.”

대답과 동시에 눈을 내리깔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무릎을 감추기 위해 다리를 슬쩍 겹쳐 섰다. 두 손으로 스커트를 잡아 당겨 보았지만, 타이트하게 달라붙은 원단은 무릎을 가려 주지 못했다.

“저런.”

남자는 짧게 혀를 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많이 아팠을 텐데.”

책상을 돌아 나오는 동작마저 군더더기 없는 남자, 태준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지아는 두 손을 모아 잡고 있었다. 긴장한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내리깐 눈을 들지 않았다.

이래서 이사실에 들어오고 싶지 않았다.

그를 보면 마음이 동요하고 마니까.

“오늘 부딪친 겁니까?”

태준이 한쪽 무릎을 접고 앉으며 물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지아가 뒷걸음질 쳤지만 그리 멀어지진 못했다. 굵고 강인한 손마디가 그녀의 무릎을 쓸어내린 탓이었다.

“이렇게 예쁜 다리에 멍이라니, 아깝잖아요.”

“금방 아물 겁니다. 아프지도 않고요.”

그는 여전히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댄 채로 지아의 무릎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긴 손가락으로 멍이 든 주변을 쓰다듬더니 곧 종아리를 감아 왔다. 천천히 올라온 손이 무릎 뒤를 살살 긁어내리는 감각에 지아가 크게 움찔거렸다.

“이사님.”

스타킹을 사이에 두고 움직이는 손가락은 맨살에 닿는 것보다 더 야릇한 기분을 불러일으켰다. 그만하라는 의미로 그를 불렀으나 순순히 말을 들을 남자가 아니었다.

“왜 그런 목소리로 부르지?”

그는 서두르기는커녕 느긋하고 태연한 동작으로 지아를 옴짝달싹 못 하게 했다. 긴장한 그녀를 알면서도 느릿하고 부드러운 손길로 종아리를 쓸어내리고 발목을 어루만졌다. 엄지로 발목뼈를 둥글게 문지를 때마다 온 신경이 아래로 쏠리는 것만 같았다.

“더 해 달라고 애원하는 것 같은데.”

“그만하세요.”

“왜, 간지러워?”

지아는 입술을 씹으며 여전히 무릎을 꿇고 저를 올려다보는 태준과 눈을 맞췄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비단 이 순간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최근 그의 앞에만 서면 손바닥에 땀이 맺히고 눈을 제대로 마주보는 것조차 힘들었다. 심장이 뛰고 저릿한 긴장감으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으니까.

“약 발랐어요?”

그때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지아의 상념을 깨웠다. 정신을 차린 그녀가 서둘러 그의 손에 잡힌 다리를 뒤로 빼냈다.

“멍은 그냥 두면 자연히 사라지니 약은 필요 없습니다.”

“그게 아니지.”

태준은 그제야 꿇었던 무릎을 펴고 일어났다. 아래를 향해 있던 지아의 고개가 점점 들리고 뒤로 젖혀졌다.

“전에 내가 한 말을 잊었나 본데.”

그는 지아가 도망칠 기회도 주지 않고 단숨에 거리를 좁히더니 눈을 내리뜬 채 말했다.

“내가 남긴 흔적 말곤 몸에 아무것도 새기지 말라고.”

“그게 마…….”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항변하려 했으나 지아는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입술을 잡아먹힌 탓이었다. 벌어진 틈으로 붉은 살덩어리가 거침없이 침입했다.

“흡……!”

또각, 하고 힘에 밀려 뒷걸음질 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밀어내려 두 손을 들었지만, 제 입안을 달콤하게 채우는 향기에 허공에 들린 두 주먹만 움찔거렸다.

태준은 그녀의 주먹을 부드럽게 감싸 쥔 후 좀 더 고개를 비틀었다. 상대적인 키 차이를 버거워하는 지아를 위해 다리를 넓게 벌리고 허리를 굽혀 주었다.

“으읏, 흠…….”

입속에서 두 개의 붉은 살덩이가 정신없이 얽혀들었다. 태준의 품안에서 옴짝달싹 못 하게 갇혀 버린 지아는 키스만으로 저릿한 쾌감을 느꼈다. 속옷이 축축해지는 기분에 저도 모르게 음부에 꽉 힘을 주었다.

“티 팬티를 입은 겁니까?”

입술을 살짝 떨어뜨린 태준은 커다란 손으로 지아의 엉덩이를 잡아 쥐었다. 몸에 붙는 스커트이기에 꽉 움켜쥐는 악력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아찔함으로 야릇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속옷 라인이 비치지 않으니 날 상상하게 만들잖아.”

차분한 음성과 함께 기다란 손가락이 지아의 엉덩이 사이를 지그시 눌렀다.

지아는 당혹스러움에 숨을 다급히 들이켰다. 그의 손이 스커트 위에서 자유롭게 노닐었다.

“이러지 마세요. 회사에선 이러지 않기로 했잖아요.”

그러나 태준은 물러나기는커녕, 하체를 더욱 밀어붙이며 지아의 허리를 단단히 감았다.

“아니. 정확히는 보는 눈이 있을 때였지.”

늦은 시각이었기에 이사실 밖 비서실은 조용했다. 함부로 들어오는 직원은 없겠지만, 소리가 새어 나갈 수 있었다.

요즘 그녀는 누군가에게 들킬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와의 관계가 아니라, 이 남자에게 속수무책으로 끌리고 있는 제 마음을 들킬까 봐 두려웠다.

“손지아 씨는 대체 날 언제까지 애태울 셈이지?”

지아는 그에게 반쯤 안긴 채 뒷걸음질 쳤다. 곧 뒷무릎에 소파 팔걸이가 걸리고, 푹신한 쿠션 위로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이리저리 피해 다니는 손지아 씨 덕분에 요즘 내 오른손이 부쩍 피곤합니다.”

“이사님.”

“왜 날 피하는 거지?”

언제나 종이서류만 만질 것 같은 손가락이 그녀의 몸을 만지고, 서늘한 빛만 띨 것 같은 눈동자에 열기가 고이면 지아는 무기력해지고 말았다.

게다가 이처럼 피할 수도 없게 다가오면 더욱이.

지아는 정면으로 부딪쳐 오는 눈동자에 가로막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그를 마주할수록 마음이 혼란스러워져서라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정확히 나흘 됐습니다. 손지아 씨가 내 눈도 쳐다보지 않은 게.”

“…….”

“억지로 시선을 피하고, 고개 돌리고. 내 좆이 그립지 않나 봐요? 주면 허겁지겁 잘도 삼켜 대면서.”

그는 검지로 그녀의 턱을 끌어올리곤 억지로 시선을 맞닿게 했다.

“내가 싫어요?”

“아닙니다.”

“그럼 반대로 묻지. 내가 좋아?”

비스듬히 말려 올라간 입술은 이미 그녀의 대답을 알고 있는 듯했다. 그 모습에 숨이 막혔다.